10,000년 된 고대 도시 마테라 사씨
25. 마테라(Matera)
바리에서 마테라까지 디렉트로 가는 기차는 없어서 환승을 해야 하는데 오래 걸린다.
가장 좋은 방법은 플릭스 버스인데 오전 2회, 오후 2회 운행한다.
기차도 그렇지만 버스 역시 시간대에 따라 가격이 다르다.
전날 폴리냐노 아 마레에서의 차가운 바닷바람 때문인지 BB는 감기 기운이 있다고 하여 혼자 다녀오기로 했다.
마테라에 도착하여 버스에서 내리니 그냥 신시가지의 평범한 도로변이다.
그곳에서 마테라 사씨(Sassi), 그러니까 동굴 주거지가 있는 곳까지 약 2.5km로 대중교통이 여의치 않다.
마테라 관광지는 사씨 지구에 모여있는데 대부분 ZTL구역이기 때문에 외부 차량은 출입할 수 없다.
또한 길이 좁고 울퉁불퉁하며 계단이 많아 도보로 이동해야 하며 툭툭이 같은 소형차 투어도 가능하다.
택시기사에게 물었다.
'피아제타 파스콜리(Piazzetta Pascoli)까지 얼마인가요?'
'미터기를 사용하기 때문에 그때그때 다릅니다.'
'보통 얼마쯤?'
'15~25유로쯤 나오죠.'
걸을 수 있는 거리지만 택시를 탔다.
그곳에 가면 또 계속 걸을 게 뻔하니 미리 기운 빼지 말자 생각한 것이다.
'여깁니다. 혹시 택시가 필요하면 이 번호로 연락하세요.'
하며 명함을 내밀었다.
내가 내린 곳은 사씨가 오롯이 보이는 전망대, 팔라초 란프란치(Palazzo Lanfranchi) 앞 광장이다.
사막도 아닌데 황량하다.
드문드문 나무들이 보이는 바위산에는 모래색의 작은 집들이 묵언수행하듯 촘촘하게 엎드려 있다.
수천 년 동안 태양에 의해 색이 빠진 바위 동굴과 미로 같은 좁은 길은 운율이나 이유 없이 솟아오르거나 낮아졌다.
봄이 와도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 피어나지 않고 집집마다 검은 조기가 걸려있을 것만 같다.
웃음소리라고는 좀처럼 들리지 않을 것 같은 풍경이 마음을 묘하게 만들었다.
파란 하늘이 영 어울리지 않는다.
먹구름이 잔뜩 꾸물대거나 추적추적 비가 내려야 더 극적일 것 같다는 감상적인 생각이 들었다.
절벽 끝의 동굴에 매달린 삶은 마치 한 발을 묘지에 묻고 있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그곳의 팍팍했던 과거가 아련하게 보이는 듯하며 레 미제라블(Les miserables)의 한 장면이 오버랩되었다.
추위와 질병과 굶주림을 견디지 못한 어린아이들이 제대로 관도 쓰지도 못하고 허연 거적때기에 둘둘 말린 채 수레에 실려나가는 장면 말이다.
마테라 사씨는 고고학적 증거에 따르면 약 10,000년 전부터 사람이 살았다고 한다.
시리아의 알레포(아랍어: 할라브 ['ħalab]와 예루살렘의 예리코(영어: Jericho, 아랍어: 여리고)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오래된 도시로 201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이탈리아어로 사쏘(Sasso)는 바위라는 뜻이고 이것의 복수가 사씨(Sassi)이다.
사진을 찍는 동안 가이드 투어를 하는 사람들에게 설명하는 것을 주워 들었다.
사씨는 과거 절벽의 동굴 주거지로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살았던 곳이다.
대부분의 동굴은 하나의 방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그보다 더 안쪽으로 바위를 더 깊이 파 들어간 곳에는 동물을 위한 우리가 있었다.
출입문 하나, 약간의 빛을 안으로 들이기 위해 만든 작은 격자문, 그게 전부였다.
설계도나 청사진도 없이 만들어지다 보니 어떤 집의 천장은 이웃의 바닥이 되고, 교회 옥상이 묘지가 되기도 했다.
예나 지금이나 너나 할 것 없이 삶은 힘들다.
그러나 당시 그곳 사람들은 힘듦의 범주를 벗어나 비참했다.
가난은 멋도 유행도 아니다.
그저 침묵과 인내로 죽도록 견뎌야 하는 상처일 뿐 가능한 게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관광객들이 동굴 호텔의 객실에 머무는 것을 특권으로 여기며 낭만을 즐긴다.
참 아이러니하다.
바실리카타 미술관 앞에 기름 위에 떨어지는 물방울같이 이질적인 청동 조각 하나가 덩그러니 서있다.
2010년에 설치된 그 작품은 일명 "아즈마의 물방울(The Drop of Azuma)"이라 불리고 있지만 실제 작품명은 <MU 765 G>
일본 조각가이자 화가인 아즈마 켄지로가 제작했는데 마테라의 역사를 특징짓는 다양한 측면을 요약했다고 한다.
물 한 방울이 땅을 적시고, 증발하고, 다시 한 방울이 되어 땅으로 떨어지는 생명의 순환에 비유하여 인간 생명의 영속적인 순환을 나타내는 의미이다.
마테라 사씨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불과 100년도 안된다.
1945년, 이탈리아 예술가이자 작가이며 의사였던 카를로 레비(Carlo Levi,1902 ~ 1975)가 파시스트 정권 하에 있을 때 이곳에서 정치적 망명 생활을 했다.
그리고 회고록 '에볼리에 멈춘 그리스도'에서 1870년 이탈리아 통일 이후 극도로 절망적인 빈곤에 빠진 마테라의 생생한 초상화를 그려낸 것이다.
레비는 사시를 비극적인 아름다움과 환각적인 쇠퇴의 분위기를 지적했다.
'말라리아와 만성적 영양실조에 허덕였지만 의사는 돌팔이뿐인 마을이었다.
교사, 군인, 사제 같은 중간계급이 남아 있었지만 농부들에겐 그냥 흡혈귀였다.
생존이 곧 사인(死因)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았다.'
레비의 책은 이탈리아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고, 사씨는 국가의 수치로 수면 위로 떠올랐다.
1950년, 이탈리아 총리는 그곳을 방문하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는 즉각 사씨의 모든 주민을 새로운 개발 지역으로 이주시킬 계획을 세웠다.
1952년, 이탈리아의 치욕으로 여겨졌던 사씨족의 대피와 신도시 개발을 위한 새로운 주거지역 건설을 요구하는 국내법이 제정되었다.
그 후 사씨에 살던 16,000명의 주민은 이 새로운 주택 프로젝트에 의해 건축한 집으로 옮기게 되었다.
빈 껍질만 남은 사씨는 곧 유령 도시가 되었다.
오래된 골목길과 빈 집은 무성하게 자란 풀 사이에서 썩어갔고, 마약상, 도둑, 밀수업자로 들끓으며 범죄의 소굴이 되어갔다.
이에 일부 마테라 관리들은 사시 지구 전체를 벽으로 막아 폐쇄시키자는 제안도 했다.
이전한 주민들 역시 새로운 공간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가난했지만 작은 뜰을 공유하며 이웃과 함께 소박한 식사를 나눠먹고 서로 돕던 생활을 그리워했다.
게다가 사씨 출신이라는 낙인이 찍히면 온갖 놀림과 멸시로부터 벗어날 길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다른 지역에서 이사 온 사람처럼 행세를 하며 사씨 출신임을 숨겨야만 했다.
2019년, 제임스 본드의 마지막 영화 '007 노타임 투 다이'가 촬영된 곳이라는 사실이 알려지고난 후 마테라는 과도하게 몰려드는 관광객들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한다.
오늘날 사씨 지역은 몇몇 이탈리아인에 의해 다시 이용되고 있는데 주로 관광객의 쇼핑과 식사, 숙박으로 이국적이고 새로운 경험을 제공한다.
마테라의 이정표이자 랜드마크는 두오모 성당( Cattedrale di Maria Santissima della Bruna e Sant'Eustachio)이다.
그곳은 사씨에서 가장 높기 때문에 길을 잃으면 두오모를 등대 삼아 걸으면 된다.
마테라는 2004년 멜 깁슨이 주연한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의 촬영지이기도 하다.
산골마을이나 작은 섬에서도 가장 웅장하고 큰 건물이 성당이다.
마테라도 예외는 아니다.
가난과 굶주림, 병마와 싸우면서 의지할 곳은 신 밖에 없었을 것이다.
여기가 거기 같고, 저기가 거기 같이 비슷한 마테라에서 나는 갈팡질팡했다.
어디부터 가야 할까 하다가 랜드마크인 두오모를 향해 걸었다.
어느 성당 앞에 익숙한 조각이 보였다.
나무의 둥치 부분은 남녀 한쌍이 부둥켜안고 있는 형상이고 뻗어나간 가지에는 올리브 나무 이파리가 달려있는 청동 작품, 생명의 나무(Tree of Life)이다.
안드레아 로기(Andrea Roggi, 1962~ 이탈리아)의 작품 'Tree of Life'는 장담컨대 이탈리아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다.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프랑스, 스페인 등도 마찬가지이다.
모로코 출생의 프랑스 조각가 브루노 카탈라노(Bruno Catalano)의 여행자(les voyageurs) 시리즈도 어디서나 자주 볼 수 있는데 그만큼 인기 있다는 뜻이리라.
브루노 카탈라노의 작품은 프랑스의 옹플뢰르에서 처음 보았다.
다소 기괴한 모습에 심장이 쿵 하며 고개를 갸우뚱거릴 수밖에 없었다.
사람 몸통의 중간이 잘렸는데 어떻게 쓰러지지 않고 서있을까? 하는 궁금증에 한참을 본 기억이 있다.
그의 작품은 여행가방을 든 사람을 소재로 하며 몸통 부분이 비어있는 특징이 있다.
작가가 조각에 빈 공간을 내는 것은 여행의 추억 일부를 남겨두는 의미라고 한다.
안드레아 로기아와 브루노 카탈라노는 한 가지 모티브로 작품을 만들기 때문에 한 번 보면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두오모 성당 앞에 도착하자마자 그의 작품이 또 보였다.
아이보리 컬러의 로마네스크 양식인 외관은 심플함과 적절한 화려함이 안정적인 느낌이다.
티켓 가격을 물어보니 마테라 통합티켓과 두오모 티켓이 있다고 하여 두오모 티켓을 구입했다.
1203년에 시작하여 1270년에 완공된 이 성당은 정면의 장미창과 왼쪽에 종탑이 지배적인 대성당 내부에는 놀랍게도 금박을 장식의 화려함에 놀랐다.
왕권보다 신권이 더 강력한 시대였으니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굶주림과 질병에 허덕이는 시민들과는 무관하게 신의 성전만 키운 게 아닌가 생각했다.
두오모가 있는 비토리오 베네토 광장(Piazza Vittorio Veneto) 아래에는 거대한 지하 저수조인 팔롬바로 룽고(Long Palombaro)가 있다.
이 물탱크는 주변 언덕의 경사면에서 나오는 빗물을 다양한 구멍을 통해 모아서 사용했는데 사씨에서 가장 큰 물탱크이다.
사실상 마테라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인정받는 데 가장 크게 기여한 게 이 수조라고 한다.
그만큼 독창적이고 복잡한 시스템이지만 과학적이며 효율적이라는 것이다.
지하 저수조는 사람들의 손으로 일일이 파서 만들었는데 그 크기는 높이 15미터, 폭 50미터로 상상을 초월한다.
벽은 물의 흐름을 방해하지 않으며 빠르게 흘러들도록 둥글게 처리되었다.
이 수조는 최대 500만 리터를 담을 수 있으니 그야말로 '물의 대성당'이라 할만하다.
물이 흘러들어올 수 있도록 만들어진 구멍은 지금도 남아있어 물을 저수할 수 있다고 한다.
저수조 쪽으로 내려가다가 발길을 돌렸다.
올라올 걸 생각하니 포기가 쉬웠다.
비코 솔리타리오(Vico Solitario)라고 불리는 동굴 주택은 1950년대의 가구와 물건이 원래 있던 자리에 정확히 배치되어 있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
내부에는 주방집기, 전형적인 테라코타 접시, 화로, 빨래통, 빵을 굽던 화덕이 있다.
양모와 옥수수 잎이 반쪽씩 채워진 매트리스는 계절에 따라 뒤집어 사용했다.
즉 양모가 채워진 쪽은 겨울에 따뜻하고, 말린 옥수수 잎으로 채운 쪽은 여름에 시원한 효과를 주었다.
이 아이디어를 응용한 매트리스를 출시해도 좋을 것 같다.
침대는 바닥의 습기로부터 가능한 한 멀리 떨어지기 위해 바닥에서 높게 설치했고 집의 뒤쪽에는 소, 당나귀, 말을 위한 마구간을 두고 통풍과 채광을 고려하여 주방, 거실, 식당, 침실은 집의 앞쪽에 두었다.
전망대 정면으로 동굴 유적지가 있는 협곡 건너편에 평평한 공간이 눈에 띄는데 그것은 동굴성당 (Chiesa di Santa Maria di Idris)이다.
이슬람 박해를 피해 터키에서 온 수도사들이 울퉁불퉁한 돌덩이를 파서 성당으로 사용했다.
전망대에서 바라볼 때는 무척 멀게 느껴지나 거리는 멀지 않다.
그런데 막상 나서면 생각보다 멀다.
손에 잡힐 듯한 무지개처럼 말이다.
햇빛 하나 가릴 나무 한 그루 없는 길과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이미 가져온 생수는 동이 났지만 마땅히 요기할만한 음식점이나 커피 한 잔 할만한 카페도 없다.
젤라토를 먹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이탈리아의 젤라토 맛은 어디든 보통 이상이다.
피스타치오를 즐기지만 오늘의 선택은 레몬, 새콤하고 은은한 단맛이 시원하여 게 눈 감추듯 먹어치웠다.
젤라토가 디저트가 아닌 애피타이저 역할을 한 듯 갈증이 가시니 이젠 시장기가 돌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음식점은 브레이크 타임,
커피라도 마실까 하여 검색을 해보니 젤라토 집 바로 앞 카페가 영업 중이다.
게다가 사씨 전경이 보이는 루프탑 테라스가 있다는 거다.
테라스라는 단어에 흥분하여 당장 그곳으로 갔다.
그 러 나
안타깝게도 그곳은 맥주나 칵테일 등 콜드 드링크만 판매한단다.
실망 가득 도로 나오다 보니 바로 옆집이 피자집이다.
비록 주문을 받은 후 바로 화덕에서 굽는 피자가 아닌 쇼케이스에 진열된 피자지만 그것도 감사하다.
왜냐면 여기는 사씨니까.
비록 옆집보다는 작지만 루프탑 테라스도 있다.
거기다 더 맘에 드는 것은 손님이 없어 나 혼자 독차지할 수 있다는 점이다.
구석구석 찾아다닐 필요도, 이유도 없는 풍경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주문한 두 조각의 피자는 눈으로 보는 맛보다 훨씬 맛있었다.
오직 버거와 피자를 먹을 때만 마시는 콜라도 남김없이 비웠다.
만일 사씨를 바라보는 그 풍경에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이 있었다면 어울렸을까?
아마도 그건 고무신 신고 명품백 든 사람처럼 어색하지 않을까 한다.
택시 기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오후 6시 40분까지 파스콜리 광장으로 와주세요.'
그러나 그가 도착했다는 메시지를 보내온 시각은 6시 20분이었다.
아마도 손님을 태우고 왔는데 혹시 근처에 있을까 하여 문자를 보낸 모양이라고 추측했다.
기다리라고 할 수도 있었지만 그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4.5유로예요.'
피자 두 조각에 콜라까지 마시고 한 시간 남짓 테라스를 오롯이 즐겼는데 고작 4.5유로라니 깜짝 놀랐다.
두오모와 박물관 티켓이 3.5유로, 젤라토가 3유로로 마테라는 다른 지역에 비해 전반적으로 저렴했다.
광장 옆으로 스테레오 스피커를 통해 흥겨운 음악이 울려 퍼졌다.
힐끗 쳐다보니 젊은 사람들이 꽤 많다.
그리고 이브닝드레스로 한껏 멋을 낸 아가씨들이 미술관 옆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택시 기사에게 물어보니 결혼식 파티 중이란다.
버스 정류장에는 다양한 회사의 버스들이 각기 다른 지역에서 도착하고 또 다른 목적지를 향해 떠나갔다.
길 건너에는 어린이를 위한 간이 놀이 기구 몇 개가 보였다.
회전 그네는 빈 의자들만 빙글빙글 돌아가고 애벌레 모양의 어린이용 롤러코스터에는 몇몇 아이들이 레일 위를 오르락내리락한다.
그 풍경은 독립 영화의 한 장면 같기도 하고 소설의 한 대목처럼 이질감이 들었다.
저 놀이기구를 운영하는 사람의 삶도 녹록지 않겠다 싶다.
쇼펜하우어의 아포리즘이 떠올랐다.
그대의 오늘은 최악이었습니다.
내일은 오늘보다 더 나쁠지도 모릅니다.
그것을 알면서도 그대의 청춘은 내일을 준비합니다.
'당신의 인생이 왜 힘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나는 내 인생이 힘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힘듦에도 강약이 있다.
그게 너무 세게 오면 원망도 못한다.
그저 외면하고 회피할 뿐!
인생은 날씨와 같다.
불행과 행복은 비례하는 법,
괴로움이 없으면 기쁨도 없다.
오죽하면 '외로우니까 사람이다'라고 했을까?
바리로 가는 시타 버스가 천천히 들어서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