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이흘라바 (Jihlava)
이흘라바의 공기는 오래된 성곽의 숨결을 품고 있었다.
올로모우츠에서 브르노로 가는 길, 일정 사이에 생긴 다섯 시간의 틈.
그 빈자리를 채우기엔 말러의 고향이 가장 어울릴 것 같았다.
체크아웃을 마치고 차를 몰아 도착한 마을은 조용했고, 말러 하우스의 두꺼운 나무 문은 일과를 마친 사람처럼 묵묵히 닫혀 있었다.
초인종을 누르자 잠시 뒤, 반 세기의 세월을 훌쩍 지나온 듯한 여성이 문을 열었다.
그 순간부터 이 집은 단순한 ‘전시 공간’이 아니라 오래된 이야기를 품은 한 사람의 체온처럼 느껴졌다.
말러의 부모가 이곳 2층으로 이사 왔던 것은 그가 태어난 지 백일 무렵이었다.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늘 한 발짝 물러서 있어야 했던 부모의 삶은 넉넉하지 않았고, 때로는 경계의 시선을 견뎌야 했다. 작은 창문 너머로는 강과 성곽이 내려다보였다.
그 풍경은 마치 비좁은 공간 속에서 유일하게 열려 있던 세계처럼, 어린 구스타프에게 깊은 흔적을 남겼다.
말러의 재능은 그 집에서 조용히 자라났다.
벽 너머의 바람 소리, 시장에서 울리는 종소리, 어머니가 물을 끓이는 소리, 아버지가 계단을 오르내리는 발걸음,
그 모든 일상의 소음이 어린아이에겐 선율이 되었다.
세상의 소리들이 서로 다른 악기처럼 들렸고, 그는 이미 그때 다성(多聲)의 세계를 직감하고 있었다.
마치 바람이 불면 나뭇잎이 먼저 반응하듯, 그의 마음이 먼저 울림을 만들었다.
이 좁은 집에서 보이는 ‘천재성의 시작’은 그 누구보다 먼저 부모가 알아챘다.
경제적 여유는 없었지만 그들의 확신은 단단했다.
마치 아들이 이 세계가 자신에게 들려주는 소리를 누구보다 깊이 듣는 사람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본 듯했다.
그들은 결국 아들을 빈 음악원으로 보냈고, 그 순간 이흘라바의 작은 방은 그의 첫 번째 교향곡 같은, 오래된 기억의 서곡이 되었다.
말러 하우스는 기대보다 소박했다.
방 한가운데 해체된 채 놓인 화이트 그랜드 피아노는 말러와 상관없는 예술적 설치물이었고, 벽에는 실험적인 음표와 깨알같이 작은 글씨들로 만들어진 그림들이 걸려 있었다.
말러가 실제로 쓰던 악기나 가구는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 결핍이 어떤 공허한 진실을 드러내는 듯했다.
‘천재의 흔적’을 기대하고 들어온 사람이라면 아쉬움을 느낄지도 모르지만, 나는 오히려 그 단순함이 어두운 골목 같은 말러의 어린 시절과 겹쳐 보였다.
집의 끝방에 도착하자 알마와 말러의 사진, 소박한 입상, 그리고 알마의 또 다른 남자들—코코슈카와 그로피우스—의 흔적이 조용히 자리 잡고 있었다.
예술과 사랑, 치정과 집착, 그 모든 갈등의 실루엣이 좁은 방 안에서 서로의 그림자를 밟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그 사이에 불쑥 떠오른 것은 그들의 첫 만남이었다.
알마는 부유한 은행가의 딸로, 음악과 회화에 모두 능한 젊은 예술가였다.
말러보다 스무 살이나 어렸고, 빈의 거의 모든 남자들에게 사랑받던 존재였다.
1901년 겨울의 어느 밤, 음악 애호가들의 모임에서 두 사람은 마주쳤다.
대화보다 음악이 먼저였고, 시선보다 울림이 먼저였다.
알마는 말했다.
“당신은 진정으로 음악을 이해하는군요.”
그 말은 흔한 칭찬이 아니었다.
알마가 보았던 것은 그의 ‘기교’가 아니라 그의 ‘심장’이었다.
말러는 그 한 문장에 자신이 오랫동안 기다려온 동반자를 발견했다.
그녀의 손끝, 눈빛, 몸의 작은 각도까지도 자신이 듣는 음계의 한 조각처럼 느껴졌고, 그때부터 그는 악보 곳곳에 알마를 새기기 시작했다.
그렇기에 5번 교향곡의 아다지에토는 단순한 사랑의 헌정이 아니라, 두 사람이 처음 나눈 침묵의 대화였는지도 모른다.
1888년 그는 첫 번째 교향곡 '거인'을 완성했다.
이듬해에 부다페스트에서 이 곡은 지휘했지만 결과는 대실패였다.
“초연의 결과는 차갑게 돌아왔다. 두 번째 악장까지는 박수가 있었지만, 세 번째 악장에서부터 객석은 불안한 숨을 쉬기 시작했다.”
청중은 야유를 퍼부었다.
말러는 초연 이후 광인 취급을 받았다.
말러를 향한 비판 기저에는 그가 유대인이라는 점도 큰 몫을 차지했다.
이렇듯 작곡가로서 연거푸 쓴맛을 봤지만, 지휘자로서는 승승장구하여 1897년, 빈 국립 오페라 극장 총감독으로 지명받았다.
지휘자로서 최고 영예인 자리를 얻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출신이 문제다.
오스트리아 황실 직속인 오케스트라의 지휘자가 유대인이라는 건 이치에 맞지 않는다며 여론이 들끓었다.
말러는 결국 가톨릭으로 개종까지 하며 그 자리를 겨우 유지할 수 있었다.
말러는 세 겹의 국적을 안고 살았다.
보헤미아(지금의 체코)에서 태어났지만 독일어를 사용했고 활동 무대는 오스트리아 빈이었다.
게다가 그의 혈통은 유대인이므로 미묘한 배척과 불안을 견뎌야 하는 시대를 살았다.
그래서 그는 나는 삼중으로 국적을 가졌지만 어느 나라에도 속하지 않는다 라는 말을 하며 쓸쓸함을 안고 살았다.
그의 딸 마리아가 다섯 살로 세상을 떠났을 때, 말러는 이미 몇 년 전 작곡해 두었던 '아이의 죽음을 그리는 노래' 가사와 다시 마주해야 했다.
"언젠가는 나도 이 노래처럼 아이를 잃을지 모른다".
고 말했던 그 예언 같은 문장이 현실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 찢긴 스케치 속에서 그의 삶 전체가 흔들리고 있었다.
그즈음인 1907년,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장인 하인리히 콘리트가 말러를 초청했다.
말러는 당시 빈 궁정 오페라 극장 감독으로 재직 중이었으나, 빈 사회의 반유대주의적 분위기와 언론의 끊임없는 공격, 극장 행정부와의 갈등 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는 빈에서 받던 연봉의 몇 배를 제시했고, 말러는 이를 수락했다.
그렇게 뉴욕으로 건너간 말러는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뿐만 아니라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상임 지휘자로도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다.
1911년 1월, 뉴욕의 회색빛 하늘 아래에서 그는 극심한 피로와 통증에 시달렸다.
지휘봉을 내려놓은 손에는 여전히 음악의 여운이 남아 있었지만 몸은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이 곧 세상을 떠나게 될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1911년 4월 8일, 말러와 그의 아내 알마는 뉴욕에서 함선 "아메리카" 호에 승선하여 유럽으로 출발했다. 바다는 차갑고 무거운 안개에 싸여 있었다.
파도 소리, 배의 굉음 속에서도 그는 자신의 교향곡을 되새겼다.
죽은 아이들을 그린 노래, 알마와의 사랑, 그 모든 기억이 물결처럼 출렁였다.
배는 대서양을 건너 프랑스의 북부 노르망디 해안의 셸부르에 도착했고, 그들은 그곳에서 파리로 이동했다.
건강 상태가 악화된 말러는 파리의 한 개인 병원에서 며칠 동안 치료를 받았지만 호전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서둘러 빈으로 돌아가는 방법 밖에 없었다.
5월 11일 밤 기차를 타고 다음 날 오후 6시에 빈의 서역에 도착했다.
도착 직후 그는 뢰브 요양원으로 옮겨졌으나 며칠 뒤 사망했다.
그의 유언대로 그린칭의 묘비에는 'Gustav Mahler'라는 이름만이 새겨졌다.
그렇다.
그의 음악은 너무 빨리 세상에 왔다.
말러의 음악이 인기를 끌기 시작한 것은 그가 사망한 후 50여 년이 지나서부터였다.
오늘날 말러는 고전 음악계의 슈퍼스타다.
클래식 음악계에서 흔히 '바그네리안'(바그너 음악의 애호가), '브루크네리안'(브루크너 애호가)과 함께 가장 막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팬덤이 바로 '말러리안'이다.
이것은 말러의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을 통칭하는 단어이다.
물론 '말러리안'들 조차 그의 음악은 쉽지 않다.
대부분이 난해하고, 불안하고, 소란스럽고, 고독하면서 가끔씩 아름답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클래식 입문자가 처음부터 말러 교향곡과 같은 방대하고 복잡한 작품을 듣기는 어렵고 극히 드물다.
그의 음악은 인간의 고통에 깊이 공감하게 만드는 요소들이 있다.
가장 어려운 음악, 그럼에도 구스타프 말러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가 겪었던 세계가 교향곡에 그대로 담겨있고, 대중들은 그런 고통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특히 필자가 그의 교향곡을 좋아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방대하게 사용되는 금관악기가 한몫 차지한다.
그 강렬하고 밝은 음색들이 절정의 순간을 효과적으로 전달할 때면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된다.
현악기나 목관악기의 부드러운 부분과 극명한 대비를 이루어 극적인 효과를 주기 때문이다.
루체른에서 클라우디오 아바도가 지휘한 말러는 내게 하나의 귀환이었다.
말러의 장대한 절규가 아바도의 손끝에서 투명하게 뿜어져 나오고 산의 새벽 공기처럼 가슴을 깨웠다.
사이먼 래틀의 말러는 또 다른 건축의 세계였고, 두다멜의 말러는 살아 움직이는 불꽃에 가깝다.
여행을 하면서 수십 곳의 콘서트홀, 오페라하우스를 다녔지만 아직도 내 지도를 완성하지 못한 곳이 있다.
암스테르담 로열 콘세르트헤바우, 그리고 LA의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이다.
헤바우의 황금빛 잔향 속에서 울리는 말러와 두다멜의 폭발하는 말러는 여전히 남아있는 약속이다.
그래서 지금도 가끔 그들 콘서트홀의 연간 프로그램을 들여다보곤 한다.
언젠가 마음과 길이 동시에 열릴 때를 기다리며...
말러 하우스의 좁은 계단을 내려오는 동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집은 ‘천재의 박물관’이 아니라, 누군가의 삶이 아주 조용히 흘렀던 자리라는 것.
그의 출발점은 이렇게 소박하고 흔적조차 미미한 공간이었다.
말러의 생과 나의 여정이 잠시 같은 페이지에 머무는 순간에 의미를 두는 것만으로도 충만했던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