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사일런트 스카이 Silent Sky>
최근 은막의 스타들이 연극 무대에 서서 관객과 더 가깝게 만나려는 시도가 늘고 있다. 그러나 27년 만에 연극 <벚꽃 동산> 무대에 올라 화제가 되었던 배우 전도연이나 연극 경험이 별로 없는 유명 배우들의 출연이 연극 공연 활성화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좀 더 느긋한 마음으로 지켜봐야 할 것이다. 연극 관객 수가 느는 것과 유명인 팬이 잠시 관객이 되는 것은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연극 표가 오픈되자마자 금세 매진된 연극 <사일런트 스카이>(로렌 군더슨 작, 김민정 윤색·연출, 명동예술극장, 2024.11.29.~12.28)도 7년 만에 무대에 선 배우 안은진 캐스팅 효과를 톡톡히 보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평소 컷 단위로 연기하는 영상매체에 익숙한 배우라면 긴 호흡으로 밀고 나가야 하는 무대에 서는 건 꽤 큰 도전이다. 그러나 우려와 달리 연극 <사일런트 스카이>에서 가장 좋았던 것 중의 하나는 출연 배우들의 연기였다. 어느 한 사람도 빠지지 않는 연기로 배우들의 앙상블 또한 좋았다. 게다가 이 연극은 배우가 무대에서 연기 외에 어떤 몫을 담당해야 하는지도 일깨워주는 극이기도 했다.
배우는 연결의 꽃
연극은 무대라는 장소의 한계를 가진다. 어떤 극에서는 무대를 회전시키거나 빠르게 세트를 바꾸며 다양한 장소 연출을 시도한다. 이처럼 연극에서 장면 전환은 늘 풀기 어려운 숙제이다. 따라서 한정된 무대를 확장하며 장소의 상상력을 증대시키는 것은 무대 예술과 더불어 무대 공간에서 호흡해야 하는 배우의 역할이 중요하다. 배우는 연기뿐만 아니라 장소의 한계성을 벗어날 수 있도록 온몸으로 그 몫을 담당해야 한다.
연극 <사일런트 스카이>는 무대에 설치한 세트가 단 하나로 막이 내릴 때까지 변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이 극의 무대는 네 개의 층으로 구분한 하나의 거대한 무대 세트로 이루어져 있다. 무대는 바닥 공간과 두 개 계단 위에 있는 공간, 그리고 단이 있는 곳에서 위로 올라갈 수 있는 계단 공간과 다시 끝자락에서 꺾어져 걸어갈 수 있는 맨 위의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바닥 공간에는 일인용 책상과 의자가 각각 세 개씩 설치되어 있고, 두 개 계단 위에 있는 공간에는 한쪽 끝에 피아노가 놓여 있다. 만약 관객이 그 어떤 설명 없이 이 무대를 바라본다면 모두가 하나로 연결된 저택의 내부로 생각할 것이다. 혹은 집 안의 거실에서 계단을 통해 옥상 공간으로 올라갈 수 있는 구조로도 볼 수 있다. 하지만 배우들이 각각의 공간에서 호흡하고 움직이면서 이 공간들은 매번 다른 시간과 장소로 변모한다. 바닥은 사무실 공간으로, 피아노를 칠 수 있는 공간은 주인공의 고향 집이 된다. 또 계단을 통해 맨 위로 올라가면 그곳은 야외이면서 때론 바다에서 바라보는 하늘 공간으로 탈바꿈한다. 거대한 스크린이 맨 위 공간 위로 설치되어 있어 때때로 수많은 별이 스크린에 드러날 때마다 거대한 우주 공간의 느낌을 자아내기도 한다.
배우는 무대 위에서 존재한다. 관객에게 무대 공간의 의미를 발견해 주고 연극을 온전히 누릴 수 있도록 연결해 주는 것은 배우의 몫이다. 배우는 무대와 관객을 이어주는 다리인 것이다. 즉 배우는 연기뿐만 아니라 조명 빛 하나, 작은 소품 하나, 무대 위에 놓인 모든 것이 긴밀하게 연결되도록 매개자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 명의 배우만이 아닌 모든 배우의 앙상블이 매우 중요하다. 이 극에 출연한 박지아, 안은진, 정환, 조승연, 홍서영 배우는 각 인물의 캐릭터를 잘 창조해 주어 관객들이 몰입도를 높여주었다. 윌러미나 플레밍 역의 박지아 배우는 자신만의 어투와 움직임으로 때때로 진지함을 깨고 유머를 던져주어 극에서 웃음이 끝이지 않도록 해주었고, 뮤지컬 배우인 홍서영은 직접 피아노 연주를 담당하며 극의 현실감을 높여주었다. 주인공인 안은진 배우의 연기에 관객이 끌려간 것은 출연한 모든 배우와 안은진 배우의 연기가 잘 연결되어 함께 빛났기 때문이다.
땅에서 그리는 하늘의 지도
연극 <사일런트 스카이>는 실존 인물인 미국의 여성 천문학자 헨리에타 스완 레빗(Henrietta Swan Leavitt 1868~1921)의 삶과 그녀의 연구 업적을 극화한 이야기이다. 이 극의 시간적 배경은 여성에게 투표권이 부여되지 않았던 19세기 미국으로 하버드대 천문대가 주요 장소다. 여성은 망원경을 직접 만지며 별을 관찰하거나 연구할 수 없었던 시대에 헨리에타 레빗은 시간에 따라 밝기가 변하는 변광성의 변광 주기와 광도 사이에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을 발견한 최초의 인물이다. 이 발견은 지구와 멀리 떨어진 은하들까지의 거리를 측정할 수 있게 해준 위대한 업적이다. 당시 하버드대 천문대는 망원경을 통해 관찰한 별들을 용액을 이용해 유리판에 새겼다. 사진건판에 나타난 항성들의 위치와 밝기를 확인하고 분류하는 단순 작업은 임금이 싼 여성들이 도맡았는데 이 일을 하는 여성들을 ‘컴퓨터’라고 불렀다. 오늘날 사용하는 컴퓨터라는 말의 원조가 바로 19세기 천문대에서 일했던 여성들이었다.
남성들이 망원경으로 찍은 별을 헨리에타 레빗은 끈질기게 관찰하지만, 변광성의 밝기에 패턴이 없으며 별들 사이에 어떤 연결도 없다는 것에 절망한다. 오직 예외로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별들의 빛남은 여동생 마거릿 레빗이 자신이 작곡한 연주곡을 직접 피아노를 치면서 들려주는 순간 마법처럼 우주의 신비가 풀린다. 헨리에타 레빗은 여동생의 연주를 듣다가 변광성의 밝기도 마치 음악처럼 주기가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연극은 많은 부분 천문학과 관련된 전문 지식으로 대사가 이어지지만 그리 어렵지 않게 이야기를 따라갈 수 있다. 왜냐하면 별의 거리를 알고자 하는 열망은 곧 우리의 존재가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다는 주제로 향해가기 때문이다. 밝기와 거리가 연결되어 있다는 천문학의 관점은 극이 진행되면서 우리의 인생을 되짚어보게 한다. 여성의 지위가 매우 낮았던 시대의 한계를 딛고 자신의 길을 개척해 인류에게 빛을 선사한 헨리에타 레빗. 예외를 파고들어 표준을 만들어낸 그녀의 삶은 관객들에게 지금 무엇을 해야 잘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으로 거리를 좁혀가게 해준다.
삶과 죽음을 연결한 무대
“천국이 하늘 위에 있네.”
헨리에타 레빗이 등장하면서 말하는 연극의 첫 대사다. 별을 사랑하는 이의 눈에는 수많은 별로 가득한 빛나는 하늘이 천국일 것이다. 우리가 죽은 뒤 가는 곳이 천국이라고 생각해 본다면 연극 <사일런트 스카이>는 우리의 삶이 죽음과 연결되어 있다는 걸 인식하게 해준다. 무엇보다 죽음을 과학과 연결한다. 질량과 에너지는 평생 형태만 바꿀 뿐 사라지지 않는다면서 인간 또한 죽음으로 몸의 형태가 달라지는 것이지 영원히 사라지는 게 아니라고 말한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건 천국이 하늘 위에 있다고 말하는 첫 대사처럼 아름답고 따뜻하게 들린다. 연극을 보고 나니 하늘은 결코 침묵하고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별들은 반짝이면서 우리에게 계속 신호를 보내고 있다고 여겨진다. 별들이 무슨 말을 우리에게 하는지에 대한 발견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기에 지금 이 시대에도 여전히 도전하는 헨리에타 레빗이 필요하다.
연극이 끝나고 딱 한 번의 특별 강연이 12월 21일(토) 오후 5시에 있었다. 천문학자 지웅배 유튜버 강사의 강연이 1시간 동안 이어졌는데 연극에서 미처 다 설명하지 못한 천문학 내용과 실존 인물인 헨리에타 레빗의 이야기를 더 깊게 알게 된 시간이었다. 2024년이 저물어가는 시기에 맛본 천문학 이야기는 새해를 기원하는 시간이 되어주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