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고한다', '고생한다'는 빈말을 너무 자주 듣다 보면 실제로 자신의 업무가 과중하며 아주 열심히 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게 되는 것일까. 상상하기 쉽지 않지만, 자신의 일은 어렵고 힘들고 과중하며 다른 사람의 업무는 그것에 한참 못 미치는 '간단한'일이라고 여기는 집단이 실제로 존재한다.
나는 교육행정직을 그만두었다.
그만두게 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이 글을 통해 전하고 싶은 것은 한 가지다.
학교가 이상하다는 것.
바로 당신들의 학교다.
교사의 업무
학교의 교사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면 가장 먼저 '수고하시는' 이라던가 '요즘에 고생이 많으신'과 같은 추임새가 붙는다. 서이초로 대표되는 교사들의 고충이 너무 많이 미디어에 노출되어 생기는 현상인 것 같은데, 진심으로 교사들을 존경하거나 수고한다 생각하더라도 이 글을 읽을 때는 잠시 잊으시길 바란다. 도움을 드리자면 교사의 면직률 (그만두는 비율)은 모든 직렬의 공무원은 물론 모든 직업군에 비교해 봐도 상당히 낮은편이다. 너무 걱정하지 말자.
학교 안에서 지켜보고, 학부모로서도 보았는데 교사들은 일을 하기 싫어하는 편이다.
특히 초등학교가 심한데, 너무 칭찬만 하는 업무환경이 문제가 아닐까 한다. 게다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어쩐 일인지 아무도 뭐라 하지 않고 오히려 수고하고 고생하신다 해주는 문화 때문인지 업무량에 관계없이 자신은 정말로 일이 많고 바쁘다고 생각하는 교사가 많다.
이런 분위기에 젖어든 교사들은 학교라는 곳은 교사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지탱되는 것이며, 점차 힘들어지는 환경(일부의 사례를 들어)을 생각하면 업무를 줄이거나 업무를 넘기거나 교사를 더 채용해야 하는 게 옳다는 결론에 이르는 것 같다.
학교 안에서 보기에, 교사의 업무는 과중하다기보다는 한쪽으로 몰린 것이 문제인데 업무폭탄을 짊어진 젊거나 의식 있는 교사는 불만을 크게 말하지 못하고, 업무를 거의 맡지 않는 교사들은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아주 적은 업무에도 앓는 소리를 하는 것은 수 없이 경험했다.
공평하게 업무를 분담하거나 경험과 연륜, 능력에 따라 업무를 맡는 것이 아니라 나이를 따지고 권위를 따져서 더 경험 많고 노련한 교사가 수업만 하는 동안, 고작 임용한 지 2,3년 된 교사가 하얗게 불을 밝히며 야근하는 모습 또한 많이 보았다. 야근하는 그 젊은 교사는 '교사의 살인적인 업무량'의 좋은 사례가 되어, 수고하는 교사, 고생하는 교사의 이미지를 굳히는 데 사용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업무의 양은 이러한데, 업무의 질은 또 어떠한가. 성과를 측정하고 그 결과를 남겨 나중에 참고자료로 삼는다던가 하는 건설적인 행위는 희미한 형태로만 존재할 뿐, 실제로는 어떤 행사를 치르거나 학기가 끝나거나 할 때는 그저 수고하셨고 너무 고생하셨다는 얘기만 서로 주고받는다. 어떤 업무를 누가 했고, 누가 성과가 좋았고 누구는 아쉬웠고 따위는 일절 말하지 않는다. 이래서야 교사들 사이에서의 업무량 불평등이 사라질 리 없다.
블라인드에 올라온 '교사가 일 많이 했다고 인증하는 글', 교사가 한 업무가 저것 뿐 일리는 없지만, 스스로 생각하기에 '아주 많은' 업무량이 저 정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교사의 업무와 관련한 또 다른 문제도 있다. 업무능력과 효율 향상을 위한 각종 프로그램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업무를 위한 각종 협의회, 전문적 학습동아리 활동, 워크숍, 연수, 자율연수 등등은 모두 교사의 업무능력 향상을 위해 존재하고 사용되는 것이지만 그것이 기대한 효과로 이어진다는 증거는 없다. 오히려 간식파티, 맛집탐방, 공금으로 여는 회식, 연수를 빙자한 여행, 휴식 등으로 사용된다는 심증이 강하다.
이정도 업무를 나열하는 것으로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 킬포. 실제로 연수를 해야하는 방학때 교사들은 서로 '잘 놀고오라'며 인사를 나눈다.
교사들이 일을 하기 싫어하는 경향은 교사들끼리의 업무 떠넘기기와 본질을 잃어버린 연수 정책 등으로 끝나지 않는다.
일을 하기 싫다는 감정은 교사들 사이에서 확대 재생산되어, 마침내 교사들의 업무가 부당하며 이를 교사가 떠맡고 있는 것이 너무나 억울한 지경에 이른다.
수많은 '교원업무경감'이 그렇게 나온 것인데, 일단 다음을 보자.
전교조의 공식 인스타 게시물
전교조의 안내문(?)이다.
품의는 교사의 업무가 아니며, 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교육에 집중할 수 있는 학교를 만들자'는 것이 그들의 주장인 것 같다.
나는 이에 대해 실소할 수밖에 없는데,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저기서 말하는 '예산집행품의'는 저렇게 묶어서 쓰는 말이 아니다. 흔히 예산업무, 예산집행 또는 지출업무, 품의라고 따로 쓰는 말이다. 물론 '예산을 집행하기 위한 품의'이니 틀렸다 말하기는 어렵지만,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대단히 전문적이고 어려워 보이게 하고 싶다는 욕망이읽힌다.
2. 그렇다면 '품의'는 무엇인가. 학교에 한정해서 말하자면, 교사들에게 배정된 예산을 사용하기 위한 신청서를 작성하는 것이다.
예컨대 A교사는 교내 오케스트라 활동을 담당하고 있고, 사용 중인 악기를 일부 교체하고 소모품도 좀 사야 한다. 그러려면 신청서를 작성해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품의이다.
제목과 예상되는 금액을 포함한 개요, 사용되는 예산항목을 기재하거나 선택해서 결재를 올리는 것인데, 교육행정직에 갓 들어온 신입도 무리 없이 할 수 있는 업무이다. 난이도는 주민센터에서 등본을 발급받기 위한 신청서와 구청에서 여권을 발급받기 위한 신청서 사이의 어딘가 쯤이다.
오케스트라 억기 구입을 위해 작성한 품의 예시.
3. 교사는 공무원이다. 주 40시간의 업무가 규정되어 있으며, 보건교사, 영양교사, 교감, 교장을 제외한 나머지 일반교사는 주 20회 (20시간이 아니다. 20회다) 정도 수업을 한다. 나머지 시간은? 수업 외의 각종 업무를 '해야 하는 시간'이다.
교사들이 만날 말하는 '교사 본연의 업무'라는 것에는 품의를 비롯한 행정업무가 포함되어 있다. 교사는 강사가 아닌 '교육공무원'이기 때문이다.
4. 사실 이 문제는 상식에 기대어 생각하면 간단하다. 학교에서 쓰는 돈도 국민의 세금이 들어간 돈이므로 함부로 쓸 수 없다. 그래서 정확한 지침과 단계를 밟아 지출하도록 법에 나와있다.
그중에서 '이러저러한 물건이나 서비스를 어떤 용도로 사용하기 위해 여기 배정된 예산을 이용해서 이 정도 쓰려고 합니다.'라는 신청서는 사용하는 사람이 작성하는 것이 상식적이다. 왜 이 업무를 하지 않으려 기를 쓰는 것인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어렵지 않고, 크게 잘못될 일도 없는 일인 데다, 시간이 많이 걸리지도 않고, 하루에 몇 번이나 해야 하는 업무도 아니다.
다행히 일선 학교에서 교사들이 실제로 품의업무를 거부하는 일은 드물다. 전교조가 몇 년 전부터 품의는 회계업무니까 하지 말자고 하고는 있지만, 실제로 교사가 품의업무를 거부한다면 큰 혼란에 빠질 것이다.
왜냐하면 신청하지 않은 물건을 '알아서' 구매하는 일은 없는 데다, 공문이 아니고서는 1원도 지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전교조의 주장을 들여다보면 행정실에서 이 일을 맡아주었으면 하는 생각도 있나 본데,
1. 무슨 물건이 얼마나, 어떻게 필요한지 알 바가 없다.
2. 50명의 교사가 품의를 거부하면 그 업무를 1명의 교육행정직 공무원이 해야 한다는 얘기인데, 그게 일이 될 리가 없다.
3. 장바구니에 담아두거나, 말로 설명하면 '알아서 해주는' 시스템을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는데, 개인 비서를 둔 사람이나 할 수 있는 업무방식이다.
결국 말도 안 되는 주장을 지속적으로, 강력하게 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한 가지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다.
진짜 일하기 싫어하는구나.
글이 길어지니까 교사의 방학과 그에 관련한 거짓말, 조퇴, 보결수당, 시설문제, 안전문제, cctv, 방송장비 문제, 안전관리자와 비가 오는 날 학교, 주차장 등등의 소재는 차차 나눠서 다루겠다.
마지막으로는 전교조의 주장에 요즘말로 '참교육'시켜주는 교육부의 국민신문고 답변을 싣는다. 대부분의 교사들이 지금도 품의를 하고 있지만, 일부 교사들이 '원래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인데 억울하고 부당하게 하고 있다'며 볼멘소리를 하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 분들에게는 가르쳐주자. 신청서에 해당하는 품의는 신청하는 사람이 작성하는 게 맞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