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7(Three Seven)

중편소설 창고. 5

by 함문평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이시연 소위 첫 보직은 철원부대였다. 작년 동계 스케이트 대회에 꼴찌를 했던 연대장 장 대령이 인사과장에게 스케이트 잘 타는 소위 전입시키라고 말할 수 없어, 강원도 출신 소위를 전입시키라고 했다. 강원도 출신이지만 장손이라고 자전거, 오토바이, 스케이트를 부모가 금지했다. 철원, 화천, 춘천 출신 소위는 스케이트를 잘 탔다. 그만 스케이트를 못 탄다고 말하자, 인사과장은 연대장 신고에 꼭 물어볼 텐데, 무조건 잘 탄다고 대답하라고 했다. 연대장 신고를 마치자 빈 휴가증 50장을 주었다. 토, 일 일직사관이 아닌 날은 동대문 실내링크에서 연습하라고 했다. 겨울이 되었다. 동계 스케이트 대회에 위관 단거리 우승, 위관 400m 계주 우승, 개인 1,000m 우승, 마지막 계급별 계주에서 이병, 일병, 상병, 병장, 하사, 중사, 상사까지 2등으로 달렸다. 이 소위가 바통을 받아 1등으로 김세호 대위에게 전달했다. 김 대위는 육사 생도 시절 3군 사관학교 스케이트 대회 1등 했다. 육사에서 스케이트 잘 타기로 소문난 장교였다. 얼마나 격차를 벌렸는지 마지막 주자 노영호 소령은 걸어가도 될 정도로 간격이 벌어졌다. 스케이트 대회 종합우승하고, 만찬에서 연대장은 이 소위 앞으로 나오라고 했다. 우승 트로피에 막걸리를 따라주고, 자신도 한잔 받아 마셨다. 스케이트 잘 타는 것이 장교로 얼마나 역량 발휘에 기여도는 모르지만, 스케이트 연대 선수는 출신 구분 없이 모두 장기복무를 시켰다. 소대장 마치고 정보였기에 정보학교로 보수교육에 입교했다. 정보장교는 정보수집 수단이 인간, 신호, 영상정보 무슨 일을 할지 모르기에 소대장을 마친 초급 장교에게는 모든 것을 다 가르쳤다. 첫 보직을 서부전선 백령도 감청기지장을 받았다. 백령도, 연평도, 문산, 파주, 연천, 전곡, 철원, 화천, 춘천, 인제,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북한의 전파가 잘 잡히는 전방 고지는 쓰리세븐 부대 예하 말단 감청수집기지였다. 그곳에서 수집된 전파를 사령부로 보내면 숫자로 녹음된 것을 한글로 해독하고 정보보고서로 만들어 국방부에 보고하고 승인이 나면 전군에 배포한다. 감청기지장을 마치고 대위로 진급했다.

그는 대위 봉급이면 아내와 자식을 먹여 살릴 수 있다고 고향 부모님께 결혼 승낙을 받으러 갔다. 요즘이야 도로포장이 횡성군 월현까지 잘 되었지만, 그녀를 데리고 인사하러 갔을 때는 비포장도로에 버스도 원주에서 강림까지밖에 운행을 안 했다. 강림에서 하차하여 20리 길을 걸어 집에 도착했다. 그녀와 결혼하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발 없는 말이 천 리 간다고 큰 이모가 빨치산 여자 통신수였고, 북한에 가서 여군대좌로 은퇴한 것을 알고 있었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결혼 승낙할 수 없다고 했다. 연좌제가 엄연히 존재하는데, 육사 졸업한 아들이 소령, 중령, 장군까지 진급해야 한다. 월북한 여군 통신 대좌의 조카가 아내가 되면 소령 진급되겠느냐? 고 했다. 그녀는 죄송하다는 말만 남기고 떠났다.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은 변함없다. 그녀도 사랑하는 마음은 변함없었으나, 장래가 촉망되는 청년 장교를 진급 못 하게 하면 안 된다고, 연좌제 안 걸리는 여자 만나 결혼하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그는 미연에게 미안했다. 앞으로 어떤 여자와 선을 보더라도 미연이 네 얼굴이 어른거려 결혼하기 힘들 것 같다고 했다. 너도 웬만하면 독신으로 살다가 아버지 돌아가시면 그때 결혼하자는 말에 ‘미쳤어, 정말 미쳤어!’ 했다.

결혼이 수포가 되고, 그는 고등군사반을 마치고 동해안 최북단 통일전망대 중대장이 되었다. 정보병과라도 중대장은 필수라서, 통일전망대에 크리스마스트리를 장식하고 점등식을 했다. 김태섭 사단장이 1개월 동안 사단 전 장병들에게 크리스마스카드 많이 받는 병사와 가장 많이 받은 중대를 사단장 부대 표창을 한다고 했다. 원주여자고등학교 그녀에게 편지를 썼다. 간단한 인사말과 용건은 오늘 통일전망대에 크리스마스트리 점등했다. 사단장이 크리스마스카드 가장 많이 받은 병사와 중대에 표창을 준다고 했다. 중대원 명단을 동봉하니, 학생에게 나누어주고 카드를 보내는데, 한번 보내고 3일 후 또 보내고, 10일 후 마지막으로 보내달라고 했다. 아버지에게 혼나게 해서 미안하다는 사과도 했다. 정말 너를 사랑한다고 썼다. 편지를 읽은 그녀는 화가 났으나, 마지막 줄 사랑한다는 말에 봄눈 녹듯이 화가 사라졌다. 그녀는 동봉한 강원도 고성군 간성읍 반암리 사서함 115호 제9중대 1소대, 2소대, 3소대, 화기 소대 계급 성명을 나누었다. 1반은 1소대, 2반은 2소대, 3반은 3소대, 4반은 화기 소대, 5반은 1소대, 6반은 2소대, 7반은 3소대, 8반은 화기 소대로 나누어주고 국군장병 아저씨께 위문편지 겸 크리스마스카드를 보내도록 전교생에게 명단을 나누어 주었다. 1개월 후 사단 전체에서 가장 카드를 많이 받은 중대와 가장 많이 받은 개인 1등도 56 연대 9중대가 차지했다. 약속대로 사단장 표창이 내려왔다. 결혼을 거절당한 그녀는 원주여자고등학교에서 고향 제주도로 전보 신청했다. 가능한 시연에게서 멀리 떠나려고, 연좌제의 악몽으로 불편한 제주도로 신청했다. 전보 신청 사유는 고향에서 일가친척을 돌보고, 교사 생활 정년퇴직을 맞이하고 싶다고 했다. 전보 신청은 바로 처리되었다. 1980년부터 제주에서 제주여고 국어 교사를 시작해서 도네 전체 고등학교를 4년마다 이동했다. 세월이 흘러 이 대위가 소령, 중령 진급이 되고 대령이 되었다. 문제는 대령에서 장군으로 진급 심사 대상이 되면 교육점수, 상훈 점수, 근무 평정 모든 것이 진급하기에 부족함이 없으나, 미혼인 것이 유일한 감점 대상이었다.

영화 ‘공작’을 통해 그 전모가 일반인에게 공개된 ‘흑금성’을 알고 있을 것이다. 흑금성은 눈에 보이는 활동, 즉 인간정보다. 돈과 사람을 가지고 정보를 수집하고, 상부에 보고하면 상부에서 분석 보고를 하고 새로운 지령을 내리는 정보활동이다. 현재는 국군정보사령부가 서울 외곽으로 이전하였지만, 그 시기는 서초에 군부대가 아닌 것처럼 위병소 근무자가 철모 아닌 헐렁한 청원경찰 모자로 위장 근무했다. 위장간판 ‘서조 산업 주식회사’라고 있었다. 위장 간판을 달았는데, 서조 산업이 정보사령부라는 것은 서초주민도 알고, 고정간첩도 알고, 김정일도 알고 있는데, 위장 간판만 달면 보안이 지켜지는 것으로 생각한 것은 국군 정보 사령관뿐이다.

박철수는 1970년대에 남파간첩으로 명성을 날렸다. 대방동서 20년 동안 친근한 할머니로 행세한 암호명 ‘관악산 노파’로 활동했던 여간첩 리선실과 북으로 동반 월북했다. 박 대통령이 현충일 참배 시 폭파하려고 시도했다. 박 대통령이 현충일 2일 전에 다녀가는 바람에 미수에 그쳤다. 선전선동부에서 대남공작부서의 남한 경험자로 후배 공작원에게 남한 교육을 담당했다. 김일성 수령이 사망하자 장례위원 명단에 당 서열 22위에 호명되었다. 박철수가 국방위원장에게 정전협정에 대한 아부 발언을 했다. 국방위원장 동지, 정전협정 제2조 13-B를 보면 경기도와 황해도 경계선상에서 북서쪽에 있는 모든 섬은 우리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관할입니다. 다만, 백령도, 대청도, 소청도, 연평도, 우도 등 다섯 섬만 예외로 한다고 되었습니다. 문서에는 남조선이 다섯 섬의 관할권만 규정했을 뿐이지 해상분계선은 규정짓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그런 점에서 서해 5도는 각기 섬 하나하나가 기하학적 점으로 유엔군 통제에 놓인 군사 목적으로나 어업, 산업적, 정치적 목적으로 연결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백령도, 소청도, 연평도, 우도 등에 섬과 섬 사이의 해상 공간은 어떤 목적이나 명분의 선으로 연결할 수 없다고 선언을 하면 남조선은 찍소리 못할 것이라고 했다. 펑크 머리를 쓸어 올리며, 김 국방위원장이 박철수를 칭찬했다. 박 동무래 남조선 사업만 잘한 줄 알았더니, 해상에서의 군사적 이론에 대해서도 참 박식하다고 했다. 다음날 국방위원장 명의로 서해에서의 통항 질서를 발표했다. 2000년 3월 23일 인민군 해군사령부가 99년(그들은 主體 88년이라 함) 9월 2일 인민군 총참모부에 의해 설정된 「조선 서해 해상 군사분계선」의 후속 조치라면서 「서해 5개 섬 통항 질서」를 발표했다. 서해 5도가 휴전 협정상 미군 측 관할에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서해 5도를 둘러싼 바다를 포함, 「조선 서해 해상 군사분계선」 이북의 전 해역은 자기들 영해이며 또한 군사통제수역이라고 하면서 그러나 「서해 해상에서 충돌을 막고 섬 주민들의 생활상 편의를 주려는 최대 아량의 표시」로 서해 5도 주변에 일정 범위의 통항 구역을 인정하고 이들 통항 구역에 이르는 통항 질서를 지정한다는 것이다. 이 발표에는 우리가 선포한 서해 해상 군사분계선은 조선 정전협정에는 물론 국제법도 전적으로 부합되는 가장 합리적이고 현실적이며 공명정대한 해상분계선이다. 세계 여론은 물론 남조선 정계, 사회계, 학계에서도 북방한계선의 불법성과 새로운 서해 해상 군사분계선의 법적 타당성을 인정하면서 상당한 논리를 갖춘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국방위원장은 서해, 12해리를 되뇌었다.

* 제1 연평 해전

1983년 12월 3일 간첩 이상규, 전충남이 다대포로 침투했다. 침투해서 해변 화장실에서 옷을 갈아입어야 했다. 화장실 입구에 HID 대원 2명을 모래에 몸을 파묻고 눈만 살짝 내밀고 대기했다. 200 미터 후방에는 향토사단 벽력 1개 중대가 실탄을 장전하고 매복을 했다. 간첩 2명을 HID가 잡으면 상황종료고, 간첩이 도주하면 무조건 사살하라고 했다. 대남공작원 훈련소에서 잘 훈련된 간첩이지만, 고무로 된 잠수복을 벗고 사복으로 갈아입는 순간 기습적으로 가격한 HID에게 2명이 잡혔다. 국군정보사령부로 이송되었다. 간첩 이름이 이상규, 잡은 HID 부대장 정보 사령관도 이상규 육군 소장이었다. 정보사에 이송해 온 간첩을 보고 사령관은 상규가 상규부하에게 잡혔다고 했다. 김일성은 다대포로 보낸 전투원이 힘 한번 쓰지 못하고 HID에 잡힌 것이 분해 이 작전에 책임자 리명수 소장을 원산 632 군부대로 좌천시켰다. 노동당 부부장이던 임종혁은 탄광으로 보내졌다. 진폐증으로 사망했다.

6월 15일 연평도 주변 바다는 고요했다. 어민들은 꽃게 제철이라 한 마리라도 더 잡으려고 일찍 바다로 나갔다. 해군은 서해 바다 영해를 지키면서 어민이 해상북방한계선 이북으로 올라가는 것을 막기 위해 부표를 감시했다. 오전 8시 45분에 참수리 351정이 북한 함정 4척이 내려오는 것을 발견했다고 보고했다. 통신문을 접수한 2함대와 356 편대장 오삼영 대위는 경고 방송했다.

“아, 아- 참수리 356 함장이 경고합니다. 당신들은 대한민국 영해를 침범했다.

즉각 함수를 북으로 돌리기 바란다. 사시 한번 경고한다. 당신들은 대한민국 영해를 침범했다. 즉시 항로를 북으로 돌리기 바란다. 이상!”

갑판에서 전방을 살피던 병사가 보고했다.

“북한 함정이 정장님 경고 방송을 무시하고 계속 남하하고 있습니다.”

“속도는 얼마냐?”

“시속 24노트입니다.”

2함대 사령부 곽 제독은 지휘통제실로 내려왔다. 6월 1일부터 14일까지 NLL 선상에서 여러 번의 밀고 밀리는 상황을 확인했다. 주요 직위자들을 지휘통제실로 모이라고 했다. 곽 제독은 대통령이 햇볕정책을 발표하고, 청와대가 아무리 느슨한 지시를 해도 서해 바다를 지키는 2함대 해군이다. 북한 함정이 근거리에 있다. 각자 서해에 있는 함정을 지원하는 방안을 염출하고 조치하라고 했다. 그동안 수많은 상황훈련을 하고 임무 카드에 수정 반영하고 훈련한 경험으로 서해에서 북한 함정과 교전이 시작될 때 신속하게 함대사령부 참모부와 전투근무지원을 받는 부대에 협조할 사항 건의 사항이 조치 중이었다.

해상에서 북한 함정과 근접한 전대는 모든 사격 장치를 ‘락온 상태(Lock On)'로 돌렸다. 자동추적장치 가동을 했다. 북한군 함정에서 포탄 한 발이 날아왔다. 북한군 683함을 참수리 351 편대가 들이받았다. 합동참모본부에서 교전수칙이라고 내려온 것이 ‘선제사격을 하지 마라’였다. 북한군이 먼저 한 발을 쏜 상태서 들이받은 것이기에 교전수칙대로 선제사격도 아니었다. 레슬링 선수 박치기처럼 받았다. 참수리 함정은 선수가 강철로 되었다. 같은 강철이라도 북한군 배를 만든 강철보다 열처리가 잘되어 강도가 높았다. 선제사격을 당한 참수리 351 함정이 불을 뿜었다. 인접 388 함정도 불을 뿜었다. 자동사격통제장치가 장착된 두 배에서 연발사격으로 북한군 684함을 벌집으로 만들었다. 북한 함정의 수동조작 포는 배가 파도에 흔들리는 롤링과 피칭으로 포탄의 명중도가 떨어졌다. 모니터로 서해상의 전투를 모니터 하는 곽 제독은 지휘통제실에서 마이크를 잡았다. 참수리 편대 후방에 있던 충무함에 명령을 내렸다. 충무함은 즉시 참수리를 지원하라. 그 명령에 충무함의 함대 함 76 미리 함포가 불을 뿜었다.

쾅! 쾅! 쾅! 연속 3발의 함포가 북한군 683함을 격침했다. 곽 제독은 북한의 모든 함정을 격침할 수도 있었지만 침몰하는 배를 구조해 가는 배마저 포격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곽 제독은 지휘통제실에 사격 중지 명령을 내렸다. 참수리 편대는 현 위치를 이탈하여 북한의 지대함 미사일 공격을 피해 섬 후면으로 피신하라고 했다. 곽 제독은 북한 등산 곶과 구월봉 해안포와 실크 웜(SILK WORM) 공격에 대비하라고 했다. 북한군 1척 격침, 반파 1척, 아군 피해 사망 0명, 경상 16명, 참수리 함수 반파 전투 보고를 해군 작전사령부에 했다.

조선중앙 TV는 연평 해전 보도했다. 남조선 괴뢰들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황해도 강령군 쌍고동리 남동 영해에서 공화국 함정의 정상적인 해상순찰에 불법적이고 기습적인 군사도발을 감행했다. 용감한 우리 조선 인민해군이 용감하게 물리쳤다고 보도했다. 최전방 통일전망대와 서부전선 백령도, 연평도에서 정보장교라고 북한에서 훈련하면 발신하는 통신 주파수가 가장 잘 잡히는 전방 고지마다 설치된 통신 감청 안테나 아래 벙커를 만들고 감청을 수집하고 수집된 생 첩보를 777부대 본부에 보내면 전문 분석관들이 음어를 해독한다.

777이라고 쓰면 모르는 사람은 칠백, 칠십, 칠로 읽는다. 맞춤법 공부 좀 한 사람은 잘난 척하느라고 쉼표가 빠졌다고 7, 7, 7이라고 친절하게 쉼표를 찍어야 한다는 사람도 있다. 777은 쓰리세븐이라고 읽고, 가방 잘 만들고, 지퍼 잘 만드는 회사도 777이지만 한미합동 감청부대를 777부대라고 한다. 한 서기관이 777 사령관을 처음 만난 것은 백령도 감청 기지장 때였다. 정보장교는 일단 소대장은 필수라 일반부대에서 마치고 중위로 진급 후에 정보학교에서 정보 보수교육을 받았다. 정보는 인간정보, 신호정보, 영상정보 어느 분야에 근무하더라도 임무 수행이 가능하도록 가르쳤다. 인간정보를 위해서는 독도법과 야전에서 생존, 적에게 포로로 잡히면 소속, 계급, 군번, 성명만 알려주고 묵비권 행사하는 신문 저항을 가르쳤다. 사람을 미행하는 방법, 망원렌즈로 먼 거리서 미행한 인물을 촬영하는 기법을 배웠다. 영상정보를 위해서는 항공사진 판독과 멀리서 망원렌즈로 촬영한 영상, 합성영상을 구분하는 것을 배웠다. 신호정보를 위해서는 신호 발신의 원리와 각 주파수 대역별 특성, 음어를 한글로 한글을 음어로 하는 것을 가르치고 수료 전에 모든 것을 평가했다. 첩보영화에 나오는 자물쇠 여는 기술까지 익혔다. 북한군이 음어로 교신한 것을 그대로 녹음한 후에 그 음어를 해독하여 정보보고서로 만드는 부대다. 백령도 기지에 777 사령부에서 합동 지도 방문이 내려왔다. 평소 하던 그대로 상황일지 기록과 헤드셋을 쓰고 24시간 3교대가 중단 없도록 근무했다. 휴가 보낼 사람 휴가 보내고 혹시 헤드셋을 쓰고 임무 수행 중인 병사가 화장실이라도 가게 되면 바로 백업을 할 수 있게 근무를 편성한다는 것은 이차방정식과는 비교가 안 될 고난도의 일이다.

검열 단장 이 중령이 10명 검열관과 백령도 감청 기지에 왔다. 육사임을 자랑하듯이 빨간색 반지를 뱅글뱅글 돌렸다. 검열 간에 한 중위는 출신이 뭐냐는 질문에 녹색 반지를 보여주면서 학군입니다.라고 했다. 어느 학군단이냐고 물었고, 고향이 어디냐고 물었다. 강원도라고 하니 강원도가 다 한 중위 고향이냐고 했다. 치악산이 있는 동네입니다.라고 했다.

“원주야?”

“아니요, 원주서 시외버스 타고 가는 시골입니다.”

“시골 어디?”

“강림입니다.”

“강림 어디?”

“뒷담입니다.”

“그래, 난 월현인데. 반갑다. 고향 후배, 아버님 존함이 어떻게 돼?”

“예, 한 태(泰) 자, 봉(峰) 자이십니다.”

“훈장 하신 분?”

“예, 조선의 마지막 세대 훈장입니다.”

“내가 강림서 원주로 나가기 전에 일 년 동안 어르신에게 한문을 배웠다.”

객지에서는 고향 개만 봐도 반가운데, 쓰리세븐 우수기지 검열 단장이 고향 후배가 근무하는 기지에 왔으니 얼마나 반갑고, 할 말이 많았을까?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이 중령은 한 중위 백령도 기지에 웬만한 체크 항목 만점을 주었다. 검열 단장 점검표에 만점인 것을 확인한 9명의 검열관이 좋은 점수를 주었다. 모든 감청 기지의 검열을 마치고 서부전선 한 개, 동부전선 한 개 우수기지 표창을 한다고 사령부로 오라고 했다. 서부전선은 백령도 기지, 동부전선은 화악산 기지가 뽑혔다. 요즘은 777 사령부가 분당에 있지만, 한 중위가 감청 기지장 시절은 용산 미 8군 옆에 있었다. 우수기지 표창장과 부상으로 벽시계를 받았다.

해군 사령관 김일철은 국방위원장이 부대를 방문한다는 소식에 놀랐다. 해마다 5월 1일 노동절에 국방위원장은 공장이나 농장을 방문했다. 1999년은 해군사령부를 방문했다. 남조선에서도 대통령이 6월 25일 전방부대를 방문한다면 한 달 전부터 대통령 이동 동정에 대해서 철저한 준비와 보안성 검토했다. 북한 해군 사령부도 대청소했다. 연병장에는 해군사령부 전 장병에 도열했다. 이용무, 이하일, 박기서, 전재선, 장성우, 현철해 등이 도열했다. 6대 벤츠가 도착했다. 974 호위사령부 경호원이 국방위원장이 탄 벤츠를 둘러 호위했다. 해군 사령관이 거수경례로 영접했다. 연병장에서 열병식을 마치고 본청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현관 복도에 자수로 만든 대형액자에 ‘잊지 말자 6.15 연평 해전’이라고 새겨져 있다. 상황실로 이동했다. 상황실 안에는 이미 많은 인원이 당 서열과 군사칭호에 맞게 앉아 있었다. 조명록, 김영춘, 전병호, 연형묵, 이용무, 박재경 등이 참석했다.

박재경은 남북정상회담 이후 우리 대통령이 북한으로 제주 감귤을 선물했다. 답례로 김 국방위원장이 송이를 선물로 가져온 책임자였다. 상황실에서 박재경은 국방위원장님 걱정 마시라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해군 장병들은 제1 연평 해전을 잊지 않고 복수의 기회를 노리고 있다고 말했다. 연형묵은 외화벌이 사정이 좋아지면 해군의 사격통제장치를 남조선처럼 자동사격 통제장치로 바꿀 것을 건의했다. 1999년 6월 15일 제1 연평 해전에서 북한군이 선제사격을 하고도 일방적인 패배한 원인이 남조선의 함정은 모든 사격 장비가 자동화되었기 때문이다. 북한군 683함 선제사격에 참수리호가 응사했다. 자동추적장치를 걸었기 때문에 적에게 100발 사격을 받고 3000발 보복 사격했다. 북한 함정은 벌집이 되었다. 선제사격을 북한군이 했기에 벌집이 되어도 찍소리도 못하고 퇴각했다.

제1 연평 해전 완패를 조선중앙 TV는 남조선 괴뢰들이 북침 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황해도 강령군 쌍고동리 남동쪽 영해를 침범한 남조선 해군을 용감한 우리 북조선 인민 해군 장병이 물리쳤다고 방송했다. 아울러 무모한 도발 책임자 남조선 해군 2함대 곽 제독 철직을 엄중히 요구하였다고 방송했다.

한광훈은 대위로 전역했다. <전선을 간다> 군가 가사처럼 ‘높은 산 깊은 골 적막한 산하’로 다니다 보니 결혼할 여자 만날 수 없을 것 같아 전역했다. 전역 후 보험회사, 제약회사 영업사원을 하다 보니 이 길도 나의 길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싫어했던 군부대서 일하는 군무원 시험에 합격했다. 7급 공채로 들어가서 6급 5급 승진을 하고 777부대로 발령이 났다. 백령도 감청 기지장 시절 최우수기지를 만든 경험이 있어, 신호정보 분석에 두각을 나타냈다. 서기관으로 승진했다.

사무관으로 승진하고 결혼했다. 첫딸이 초등학교 1학년에 입학을 했다. 사령부 본부에서 해군 2함대 파견 대장 명령이 났다. 아내는 그 촌구석에 딸을 전학시킬 수 없다고 한 서기관 혼자 가라고 했다. 어쩔 수 없이 딸과 아내는 ‘천당 아래 분당’이라는 살기 좋은 곳에 살고 혼자 2함대 독신자 숙소에 입주했다. 777부대 파견대장이 된 것은 제1 연평 해전에서 일방적인 승리를 거둔 것을 계기로 청와대로부터 부대 표창을 수상한 직후였다. 김 대통령에게 따라다니는 ‘좌익’이라는 레드 콤플렉스를 한 방에 털어버리는 계기로 제1 연평 해전에 관계된 부대에 대대적인 훈․표창을 내렸다. 그동안 ‘김대중 정권은 용공 정권’이라는 정치이념 공세를 한 번에 날려버렸다. 제1 연평 해전 승리를 높이 평가한다는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청와대 국정상황실과 외교안보 비서관실, 합동참모본부에서는 훈장과 표창을 안배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전투를 한 것은 2함대인데, 해군 작전사령부, 합동참모본부, 국방정보본부, 합동참모본 부전략기획실이 훈장과 표창을 챙기느라 여념이 없었다. 777부대도 정보지원 잘했다고 부대 표창이 내려왔다. 영월, 태백에 탄광이 번창하던 시절이 있었다. 탄광촌에 가면 개도 지폐만 물고 다닌다는 말이 있었다. 연평 해전 승리로 쏟아진 표창이 너무 많아 할당된 인원을 채우느라 당직 근무자까지 표창을 수여한다고 공적 내역을 올리라고 했다. 6월 19일 당직근무 명령서에는 조성상 중령이 명령이 나 있었는데 그날 장인, 장모가 오신다고 원성제 중령과 근무를 바꾸었다. 문제가 생겼다. 공적조서를 올리려는데 실제로 고생한 원 중령을 올리자니 한 달 근무명령서를 모두 정정 명령을 해야 했다. 근무는 안 섰지만, 명령 나 있던 조 중령이 표창을 받도록 공적조서를 올렸다.

7월 7일 해군 2함대 군항 부두에 조명호 국방부 장관이 대통령을 대신하여 훈장, 표창을 대독 수여하러 왔다. 국방부 장관이 오니 김인환 합동 참모본부의장, 조필원 해군 참모총장, 박윤희 3군 사령관, 김홍기 해군 작전사령관 등이 참석해 대대적인 훈․표창 수여식이 거행되었다. 상이든 벌이든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고 승리가 감격에 벅차도 표창을 남발하면 상의 의미가 퇴색된다. 함대사령부와 해군 수뇌부와 777 사령부가 부대 표창을 받은 것은 타당했다. 회식에 숟가락 하나 더 올리듯이 제1 연평 해전에 직접 참가부대가 아닌 2함대 군수지원단과 인근 연평도 해병 부대에 경계를 잘했다는 이유로 합동참모본부장 표창을 받았다.

제1 연평 해전이 발생하기 직전의 2함대 곽 제독은 사면초가였다. 합동참모본부에서 교전수칙이라고 내려온 것이 절대로 선제사격을 금지한다는 것이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과거 자신이 해군 소위, 중위, 대위 시절이 영화의 파노라마 영상처럼 지나갔다. 만약에 ‘선제타격을 하지 마라’는 수칙을 지키다 서해 망망대해에서 예하 젊은 장교와 부사관, 병들이 희생되고 배가 침몰한다면 그 책임은 온전히 제독의 책임이었다. 최악의 경우 간부들이야 직업으로 택한 것이니 법규대로 국립묘지 안장되고 유족 연금으로 타협이 된다고 해도 의무복무 징집된 현역병은 부모 형제에게 씻을 수 없는 한이 된다.

오래전 이야기다. ‘병역면제 신의 아들, 6개월 방위 장군의 아들, 18개월 방위 사람의 아들, 현역병 어둠의 자식들’이라는 말이 있다. 서해에서 희생되면 정말 어둠의 자식이 되는 꼴이다. 곽 제독은 하루도 마음 편히 퇴근할 날이 없었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말이 해군에 비유하면 ‘해상 작전에 육군 장군이 간섭하면 배가 서울로 간다.’가 될 것이다. 싸우는 지휘관은 2함대 한 명인데, 해군 작전사령관, 합동참모본부의장, 국방부 장관, 청와대 국정상황실장, 국방비서관까지 합세하여 모니터를 보고 간섭을 한다. 때로는 문명의 이기가 일선 지휘관을 힘들게 하기도 한다. 전에는 2함대 사령관이 해군 작전사령관 지시만 받고 현장에서 지휘관 판단으로 해상전투대형을 변경하고 사후 보고도 할 수 있었으나 군의 과학화를 한답시고 해군 전술 지휘 통제시스템이 도입된 이후로는 시어머니가 열 명이 되었다. 이장비가 합동참모본부에서 말단 함대사령부까지 설치되는 바람에 말단의 전투상황이 대형 TV 모니터에 생생하게 중계되었다. 대형화면을 보고 해군 작전사령관만 명령하면 될 것을 통신장치가 좋다 보니 합동참모부의장, 합참전략기획본부장, 국방부 장관까지 마이크로 지시하는 날이면 도저히 말단 2함대 사령관은 상관들의 통화에 대응하다 보면 바다에서 직접 싸우는 함장에게 명령할 기회가 없었다. 그런 조건에서 제1 연평 해전을 승리하게 된 것은 기적이었다. 기적이 일어나기 전에 보이지 않는 장병들의 피나는 노력을 아는 사람은 외부로 노출되지 않았다. 곽 제독은 예고 없이 지휘통제실에서 방송했다.

- 현 시간부로 서해상에서 2함대 예하 함정이 북한의 선제타격으로 반파되었다면 지금 각자의 조치할 사항을 무작위로 마이크로 발표하라- 고 명령했다.

예하 부대는 난리가 났다. 한 번도 이런 일은 없었다. 사전에 훈련계획을 세우고 참모들의 협조 사항을 사전에 조율하고 훈련물자를 군수참모가 시간을 두고 준비해서 훈련했지, 예고 없이 구두 상황부여 훈련은 처음이었다.

처음은 오합지졸이었다. 곽 제독은 함대사령부 참모부부터 예하 부대까지 시간을 두고 전술 토의 한 것을 반영하고 각자 임무 카드를 새로 작성했다. 새 임무 카드로 모의 훈련했다. 점진적으로 손발이 맞게 되었다. 해상에서 불시에 어느 함정이 반파된 것을 상정해도 일사불란하게 훈련이 되었다. 해군의 함포지원사격과 공군의 공대함 포격까지 훈련했다. 함대사령부의 간부들에게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휴가 간 병사들이 부모와 일가친척들에게 불만을 털어놓았다. 지금까지 아무 문제 없이 2함대가 몇 년간 굴러왔다. 사령관이 바뀌더니 안 해도 될 일을 해서 부대원 전체가 피곤하고 힘들어 군대 생활 못 하겠다는 소리가 났다. 간부들의 입이 오리주둥이가 되었다. 장병들의 불만이 많은지 신직수 기무사령관이 예고 없이 2함대를 방문했다. 기무사령관은 곽 제독에게 부대 방문을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마라, 하도 부대원들의 불만 동향 보고가 청와대 민원실과 국방부 민원실에 올라왔다. 그대로 국방부 장관에게 보고할 수 없었다. 현장 확인 왔다. 기무사령관은 하지 않아도 될 것을 무리하게 해서 부대원의 불만이 있는지 확인하였다. 청와대와 국방부 민원실에 제기된 2함대 민원은 호전적인 ‘돈키호테’ 또는 몹시 정서가 불안한 지휘관으로 인식될 정도의 내용이었다. 그 말을 들은 곽 제독은 신문 한 장을 보여주었다. 1996년 11월 20일 강화도 석모도 앞 1.5 킬로미터 해상에 간첩선이 출현했다가 아군의 추격을 받고 도주했다는 기사였다. 간첩선발견은 해군이 아니고, 강화도 육상에서 경계 근무하는 해병대 경계병과 열상 감지 장비에 의한 것이었다. 해군이 제대로 추격하지 못해 북으로 넘어갔다.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이 되었다. 그 작전이 실패한 원인에 대해 합동참모본부가 2함대를 검열하는 기간에 곽 제독이 함대사령관으로 취임했다. 함대사령부의 직면한 상황에서 예하 부대원이 해상에서 적에게 선제공격을 당한다면 2함대는 망한다. 부대 지휘관으로 부대가 망하는 길을 갈 것인가? 욕을 먹더라도 부대가 사는 길을 갈 것인가? 곽 제독은 기무사령관님이 여기 2함대 사령관이라면 어느 길을 택하겠냐? 고 반문했다.

“당연히 사는 길을 가야지요, 제독님 말씀을 듣고 나니 그동안 많이 올라온 동향 보고와 민원의 불평을 알겠습니다. 제가 서울로 올라가 국방부 장관께 진실을 말씀드릴 테니 소신껏 지휘하시기 바랍니다.”

기무사령관이 2함대 불시 방문을 마치고 올라간 다음 날에도 합참에서 교전수칙이 내려왔다.

1. 적이 쏘기 전에 절대 선제사격 금지

2. 절대 확전 하지 말 것

3. NLL을 고수할 것

4. 지혜롭게 대처할 것

이런 모순이 또 있을까? 교전수칙을 읽고 또 읽었다. 청보, 작전 참모를 불렀다.

“사령관님 부르셨습니까?”

“참모들 다 부르려다 일단 정보, 작전 참모만 불렀어.”

“무슨 긴급한 일이라도?”

“이거 합참에서 내려온 교전수칙 다 읽어봤지?”

“네, 말도 안 되는 교전수칙이지만 상부 지시니.”

“선제사격을 금지하고 확전 될 빌미도 안 주고 NLL을 고수할 수 있어?”

“냉장고에 코끼리 넣는 것만큼 어렵습니다.”

육상에서 싸움은 호랑이가 잘하고, 하늘에서의 싸움은 독수리, 바다에서의 싸움은 상어가 잘한다. 해상전투에 육군 장군이 합참에서 해군에 상어처럼 싸울 곳에 호랑이나 사자처럼 싸우라고 지시한 것이다.

* 제2 연평 해전

1991년 8월 남한이 중국과 수교했다. 핵 개발이 유일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굳건하게 유지할 유일한 수단이라고 생각했다. 1994년에 미국과 북한이 일촉즉발의 위협에서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평양으로 갔다. 극적으로 북한이 더 이상 핵 개발을 중단 발표했다. 김영삼 대통령에게 사전 의사 타진도 없이 김일성-김영삼 남북정상회담을 평양발로 발표했다. 김일성은 남조선 김 대통령이 평양에 오면 무슨 선물을 줄까 고민했다. 그때 생각한 것이 순도 높은 조선 철광석을 강선 제련소에서 제련한 철강 5만 톤을 선물하기로 했다. 제련소 기업소장을 별장으로 불렀다. 김 국방위원장도 불렀다.

“곧 남조선 김 대통령이 평양에 오는데, 철광석 5만 톤을 제련하라고 명령했는데, 어느 정도 준비가 되었나요?” 물었다.

김 국방위원장이 뭐라 변명할 사이도 없이 강선 제련소 기업소장이 “준비 못했습니다.”했다.

“무시기?” 다그치는 김일성 말에 “수령님, 죄송합니다. 철광석은 산더미처럼 쌓여 있으나 제련소에 전기가 공급되지 못해 제련 기계를 돌릴 수 없습니다.” 말했다. 그 말에 충격을 받아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헬기로 봉화진료소로 후송했으면 어떻게 살릴 수도 있었다. 장맛비가 억수로 내렸다. 헬기 이륙이 불가능하자 앰뷸런스로 후송했다. 묘향산 별장에서 큰 도로에 진입 직전에 구렁이가 지나갔다. 평소 김일성 수령이 지나가는 동물 절대로 들이받지 말라는 교시를 무시하고, 급한 마음에 구렁이를 치고 지나갔다. 과속으로 봉화진료소에 도착했으나 사망했다. 김 국방위원장이 북한의 지도자가 되었다. 수령의 유훈통치를 천명했다. 수령은 김일성 고유한 직책이고, 자신은 겸손하게 유훈으로 통치했다. 유훈통치와 선군정치에도 불구하고 연속해 3년 흉년이 들었다. 굶어 죽는 사람이 300만 명이나 생겼다. ‘고난의 행군’이라고 불렀다. 힘든 시기가 지나고 2000년이 되었다. 2000년을 새천년이라 부르고 대대적인 신축 경축 공연을 벌였다. 군대의 공훈합창단을 불러 공연했다. 장성택, 현철해와 공연장에 도착했다. 공연을 관람하고 김정각 대장이 김 국방위원장을 전시지휘소로 안내했다. 지하 입구를 들어서면 600미터 터널이 있다. 터널로 이동하는 모노레일을 지나면 200미터 공간이 나타난다. 최고사령부 전시지휘소 벽면은 아연으로 도금되었다. 아연은 방사선을 차단하고, 통신 전파도 차단한다. 전시지휘소는 미국, 러시아 정찰 위성이 항공촬영을 매일 하는 곳의 하나다. 촬영해도 지상 모습만 찍히지 내부 노출이 없다.

2002년 6월 12일 한 서기관은 일일 블랙북 보고를 검토하고 있었다. 쓰리세븐 사령관으로 이 소장이 1월 초에 왔고, 한 서기관은 사령부 정보처 분석과에 근무했다. 사령관은 첫눈에 그를 알아봤다. 취임식을 마치고 나서 그를 호출했다. 사령관은 정보 소령이 부족하고, 언제 올지 모르니 2함대 파견대장으로 한 서기관을 보내려고 했다. 과거 백령도 감청 기지장 시절의 한 중위가 세월이 흘러 서기관이 되었는데, 소령 대신 그를 보낸다면 임무 수행 잘할 것 같다는 것이다. 이미 사령관이 결심하고 부른 것이기에 예.라고 짧게 대답했다. 아내가 딸 학교 문제로 반대할 것이 불 보듯 뻔하지만 승복한 것이다.

200년 6월 15일 남북 정상화 담을 마치고 돌아온 김 대통령은 ‘한반도에 전쟁은 없다.’라고 말했다. 5천만 국민이 해-한 민국과 오-필승 코리아를 외치던 2002년 6월 29일 서해에서 북한군의 선제기습 공격으로 해군 장병 24명이 전사하거나 부상이었다. 엄청난 비극에도 자신이 추구하는 햇볕정책 때문인지 참사를 참사로 생각하지 않고 태연하게 지냈다. 김 국방부 장관은 통일부 장관인지 구분할 수 없는 언행을 했다. 자신의 안위와 영달을 위해 정보장교가 목숨 걸고 수집하고 분석한 정보를 묵살 왜곡했다. 쓰리세븐사령관은 국방부장관의 ‘경고’에 항의하는 뜻에서 전역 지원서를 제출했다. 국방부 장관이 교체되면서 전역 지원서가 반려되었다. 이 소장은 자신을 국회 국정감사에 부르면 안 된다고 했으나, 국회는 불렀다. 국회 증언대에 선 이상 위증하면 위증죄로 처벌받는다. 작심하고 말했다. 국방부 장관이 자신의 잘못을 쓰리세븐부대에 책임 전가하고 거짓말을 한다고 폭로했다. 블랙 북을 흔들었다.

“국회 정보위원 여러분! 이것이 블랙 북입니다. 이 블랙 북을 쓰리세븐사령부가 감청한 것을 정보로 만들어 전 부대에 배포하기 전에 국방정보본부에 초안을 보고하여 국방부 장관 승인받습니다. 지난 6월 12일 블랙 북에 북한의 서해에서 NLL침범 의도를 첫째는 단순 침범, 둘째는 남한의 해군 작전 반응 속도 점검, 셋째는 한․일 월드컵 방해 등 3가지로 보고를 했는데, 2, 3항은 삭제하고 ‘단순침범’ 하나로 하달했습니다. 6월 29일 제2 연평 해전에서 패배하자 쓰리세븐 부대가 정보를 똑바로 지원하지 못했다고, 저를 징계한다고 국방부 장관실로 호출했습니다. 징계에 불복해 전역 지원서를 냈습니다. 국방부 장관이 경질되고 전역 지원서가 반려되어 이 자리에서 증언하게 되었습니다.”

2002 한일월드컵 경기 중계 전에 TV에서 해군 대위 윤영호는 함상 취재를 하는 기자가 질문하는 말에 서해는 우리가 지키니, 국민 여러분께서는 마음껏 월드컵을 즐기시라고 말했다. 녹화한 것을 월드컵 개막에 맞게 방송한 것이지만 (고) 윤영호 소령의 생전 인터뷰는 사실이었다. 서해는 함장과 대원들이 지켰다. 영화 ‘연평 해전’에서는 선제사격을 당하고도 부상당한 몸으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부정장이 지휘한 것으로 미화되었으나 거짓말이다. 1950년 6.25 전쟁 시기에도 심 일 소위 거짓 미화와 개성에서 김석원 장군의 부하 ‘육탄 십용사’의 거짓과 같은 수준의 사후 미화다. 아무리 애국정신이 중요하다고 해도 사실을 사실대로 기록해야지 거짓말로 미화해서는 안 된다. 일방적으로 선제기습을 당해 만신창이가 된 357함 합동 정보 분석조가 인양된 참수리 현장 조사했다. 한 서기관 1년 후배 국군정보사령부 신문기정 팀장 표세연 소령이 정보 분석조 활동을 마치고, 한 서기관에게 전해준 말은 영화와는 달랐다. 영화에서는 (고) 윤영호 소령이 적의 포탄에 맞아 쓰러지고 이 중위가 다리에 중상을 입은 상태서 우리 정장을 살려라! 외치고 필사적으로 전투지휘를 해서 북한 경비정을 격퇴한 것으로 미화했지만, 사실은 선제기습으로 참수리 357 정의 모든 장비와 대원은 항전할 수 없었다, 항전한 흔적도 없었다. 탄통의 고사총 실탄과 포탄이 거치된 그대로였다. 격발 된 흔적이 없었다. 영화에서 화력전을 펼친 것으로 묘사한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죽은 전사자에 대한 미화는 일본 강점 영향이다. 덧칠을 지우고 생생한 진실을 알아야 한다.

357 참수리 함정 영내 방송이 나왔다.

“현 시간 즉시 전원 전투 배치하라!”

참수리 357, 358정이 요란한 비상벨 소리에 전원 전투배치 완료했다. 정장 윤영호 대위, 이기원 중위, 고영락 병장, 김은철 병장, 권세영 상병, 김세중 일병이 좌․우현으로 나누어 배치했다. 윤 대위가 명령했다. 조상건 중사가 스로틀 밸브를 앞뒤로 조작했다. 윤 대위는 쌍안경으로 북한 함정의 일거수일투족을 눈에 담았다. 북한군 684 함정에는 14.5미리 고사총이 쌍 열로 장착되었다. 85 미리와 37 미리 선상포가 거치되었다. 합동참모본부에서 ‘선제사격 금지’ 교전수칙이 하달되어 패한 것을 쓰리세븐 부대 정보지원이 미흡해서 패했다고, 김 국방부 장관이 쓰리세븐사령관에게 경고장을 받으러 국방부로 출두하라는 전문이 왔다. 2002년 7월 10일이었다. 쓰리세븐 사령관 공관에서 참모장 탁규일 준장, 기무부대장 이 중령과 식사 중에 전속부과 안 중위가 팩스 전문을 들고 왔다. 이 소장은 화가 났지만, 꾹 참고 식사 중에 잠시 전화하고 오겠다고 양해를 구하고, 전화했다. 국방부 차관에게 ‘국방부 장관 경고장’을 받느니 전역 지원서를 낸다고 말했다. 서부전선 백령도에서 동부전선 통일전망대까지 고성능 안테나를 설치하고, 24시간 통신 주파수가 잘 잡히는 고지는 모두 감청 기지로 만들고, 수집한 감청 첩보를 사령부 전문 분석관이 숫자로 녹음 간청한 것을 한글로 해독하여 정보문건으로 만든다. 분석관이 북한의 도발이 의심되는 내용의 14자 정보 분석을 국방부 장관이 ‘특이사항 없음’ 여섯 자로 조작하여 하달했다. 원래 14자는 ‘해안포 사격 준비 및 해상에서 선제사격’이었다. 이것을 특이사항 없다고 조작 하달하고 선제 기습사격으로 참수리 357정이 참패를 한 것을 억지로 승리라고 영화까지 만들고, 국방부 책임을 777 사령부에 전가하여 경고장을 수여한다는 전문이 온 것이다.

기무사령부에서 제2 연평 해전에서 쓰리세븐 부대의 정보지원에 문제가 있는 것이라고 사고조사 했다. 부대의 명예와 사기가 걸린 문제라 순순히 경고장을 받을 수 없었다.

2002년 8월 9 일자 우주 신문에 ‘북(北) 도발 징후 여러 차례 보고’

- 김 국방부 장관 묵살 의혹-이라는 연평 해전 기사가 보도되었다. 기사 본문에는 감청 정보를 분석해 북한의 도발 징후를 정보보고서에 경고 문구를 넣었으나 김 국방부장관이 불안 조성할 필요 없다고 삭제하고 단순 침범으로 하달하라고 명령했다. 이 문제로 쓰리세븐 부대에 대한 국방부 장관 경고장 수여를 거부하고, 전역 지원서를 제출했다. 쓰리세븐 사령관, 정보 사령관은 국가정보원장만큼이나 노출되어서는 안 되는 직책이다. 우주신문은 군사기밀에 해당하는 특종을 터뜨린 것이다. 온 나라가 월드컵으로 축제 분위기인데 일부러 불안을 조성하는 정보문건을 하달할 필요가 없다는 국방부 장관의 야비한 처신에 부대원은 화가 났다. 어민들은 울화통이 터졌다. 에이, 씨 팔, 어느 놈이 이기든 통일이 되어야지, 매일 남북이 해상에서 대치해서 살 수 있겠나? 이 사령관은 비겁한 국방부 장관의 결정에 승복할 수 없었기 때문에 징계에 불복해 전역 지원서를 냈던 것이다. 쓰리세븐 부대는 창설 이후 사령관이 국회증언대에 불려 간 적이 없다. 왜 야하면 쓰리세븐부대는 존재 자체가 기밀 사항이었다. 2002년은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으나 이 사령관을 국회 국방위원회 국정감사장에 증인으로 출석시켰다. 국회에서는 국회법에 따라 위증(僞證)을 금지하고 있다. 위증을 한 사람은 국회법에 따라 처벌받았다. 상관이 자기 잘못을 하급자에게 전가하는 국방부 장관에 충성하느니, 전역하는 것이 낫다는 생각에 전역 지원서를 제출했다고 말했다.

1999년 6월 1일 국방부장관회의실에서 합참의장과 합참의 육, 해, 공군 장군들을 모아놓고 평양을 방문했던 페리 대북정책 조정관을 비난했다. 웰리엄 페리가 클린턴 미국 대통령의 친서를 들고 김 국방위원장을 만나기 위해 평양에 갔다. 페리는 평양을 방문해 노력은 했으나, 성과 없이 돌아갔다. 1994년 개인 자격으로 평양을 방문했던 지미 카터는 미국과 북한의 일촉즉발의 위기를 해결하고 김일성-김영삼 남북정상회담까지 계획했다. 김일성 수령이 서거하는 바람에 불발되었지만, 그것은 남이나 북이나 큰 반향을 일으켰다.

훈련하면 어쩔 수 없이 통신을 주고받는다. 전파가 발생한다. 전파의 일부는 꼭 쓰리세븐 부대의 안테나에 신호가 잡힌다. 감청 기지에서 수집된 첩보를 사령부에서 전문 분석관에 의해 해독과 정보 초안이 만들어진다. RC-135 정찰기는 오산 공군기지에서 이륙해 한반도 D. M. Z 남단 10킬로 미터를 좌에서 우로 우에서 좌로 비행한다. 한번 비행을 하면 그 시간에 북한에서 발생한 통신 주파수 90%를 수집된다. 그것을 오산기지에서 쓰리세븐 파견대에 넘겨준다. 한․미 합동으로 분석하여 정보문건으로 작성 통보한다.

남과 북이 광복 이후 적개심으로 불타 서로 잡아먹지 못해 안달하던 상황을 바꾼 것이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이다. 순안 공항이 바빠졌다. 활주로 입구까지 붉은 카펫이 깔렸다. 육, 해, 공군 3군 의장대와 군악대가 순안공항에 도열했다. 김 국방위원장이 등장했다. 엷은 녹색 인민복이 윤기가 흘렀다. 군악대 연주 소리가 공항 전체를 잔잔하게 울렸다. 국방위원장은 착륙한 비행기 트랩이 있는 곳 정면에서 서 있고, 뒤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이끌어가는 당․정․군 주요 인사가 도열했다. 김영남, 조명록, 현철해, 연형묵, 이용무, 조명록, 최태복 등 핵심들이 도열했다. 대한민국 태극기를 부착한 보잉 737-300 비행기가 순안공항에 착륙했다. 비행체는 서서히 바퀴를 굴려 빨강 카펫이 깔려 있는 곳에 탑승구를 일치시켜 정지했다. 군악대 소리가 잔잔해졌다. 탑승구 문이 열리고 김 대통령 내외가 트랩을 내려왔다. 진한 청색 정장에 빨강 넥타이였다. 비행기에서 내려와 이희호 여사와 나란히 섰다. 연주가 잔잔해지자 김 국방위원장이 내외에게 다가갔다. 잔잔한 음악이지만 군가 김일성 장군의 노래, 적기가, 아침이슬, 임을 위한 행진곡을 편곡하여 메들리로 연주했다. 한복을 곱게 입은 여자들과 양복을 입은 인민들이 순안공항 주변을 가득 채우고 김 대통령 내외를 환영했다. 남녀 어린이 두 명이 꽃다발을 들고 왔다. 여자아이는 김 대통령에게, 남자 어린이가 이 여사에게 꽃다발을 드렸다. 전 세계 언론은 평양발 남북정상회담에 김 대통령과 김 국방위원장이 포옹하는 장면이 톱뉴스로 전해졌다. TIME 지 그 주 표지모델도 남북정상 사진이었다. 백화원의 만찬을 마치고 숙소에서 수행원들은 각자 배정된 방에서 잤다. 다음 날 노동당 당사에서 대통령을 수행해서 북으로 올라간 주요 인사들과 북한 노동당 일꾼들이 정상 화담의 발표문 초안을 작성했다. 그동안 이 여사는 창광 유치원을 방문했다. 유치원 시설을 둘러보고 아이들과 함께 춤을 추었다.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온 김 대통령은 한반도에 전쟁은 없다고 선언했다. 2002년 6월 한일 월드컵에서 4강에 대한민국이 진출했다. 5천만 국민이 길거리 응원으로 ‘대~한 민국!’과 ‘오~ 필승 코리아~’를 외쳤다. 6월 29일 서해에서는 북한 해군의 선제기습 공격으로 해군 장병 24명이 전사하거나 부상당했다. 참수리 357정은 침몰했다. 김 대통령과 김 국방위원장이 정상회담 후 1년이 지났다. 2001년 6월 2일 제주해협에 북한 상선 3척이 나타났다. 대한민국 해군은 규정에 따라 해상 검문했다. 북한 상선은 우리 장군님이 개척한 통로라고 행해를 계속했다. 백마강호, 청진 2호, 장군봉호는 당당하게 통과했다. 해군은 해군 작전사령부에 보고를 하니, 검문하지 말라는 답변이 왔다.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에서 국무위원장이 김 대통령에게 북조선의 배가 제주해협을 벗어나 공해로 돌아서 오다 보니 기름도 많이 소모되고, 시간도 오래 걸린다고 했다. 그 말에 서울로 돌아가면 검토해 보겠다고 대답을 했다. 북한에서는 김 국방위원장이 검토하면 되는 것으로 하듯이 남한도 김 대통령이 검토하면 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제1 연평 해전 승리로 이끈 2함대 곽 제독을 취임 1년도 안 되어 조기 교체시켰다. 그것도 승진이 아니라 장군들의 보충대라고 불리는 해군 참모총장 특별보좌관이었다. 제2 연평 해전을 영화로 만들어 미화시켰지만, 국가를 위하여 희생한 군인을 대통령과 국민의 외면 속에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영결식에 해군 참모총장이 임석상관이라는 이유로 국방부 장관이나 합참의장, 육군, 공군 참모총장도 참석하지 않았다. 대통령은 서울 비행장과 국군수도통합병원이 근거리임에도 불구하고 2002 한일월드컵 폐막식에 가는 길에 조금 일찍 출발 조문하고, 일본으로 가도 되지만 애써 모른 척했다. 햇볕정책으로 김 국방위원장을 대화의 장으로 불러낸 것에 흠결이 가는 것을 두려워서 그런 것이라도 국군통수권자로 국가를 위해 목숨 바친 장병들의 영결식에 조문도 안 하는 것은 후세 대통령에게 아주 잘못된 선례를 남겼다. 유엔군 사령관과 미군 장군은 유가족에게 위로의 편지를 보내왔지만, 우리 정부나 국방부 장관은 위로 서한을 보낸 장군 한 명 없다. 김 국방부 장관은 이름부터가 북한을 좋아해서 북신이라고 할 정도로 통일부 장관보다 더 햇볕정책을 전도했다. 모 방송국은 7월 1일부터 4일까지 제2 연평 해전이 우리 어민들이 해상북방한계선을 넘어 조업한 것이 원인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방송했다. 정부의 무관심과 냉대로 유가족들은 죄인처럼 살았다.

터키와 3, 4위전에서도 2 대 3으로 패했다. 패했지만 행복했다. 뉴스는 지나가고 월드컵 하이라이트만 반복해 방영되었다. 월드컵 하이라이트를 내보내는 화면 하단에 자막이 보였다.

-연평도 앞바다 NLL 침범 북한 배와 교전 참수리 4명 사망 실종 1명-

자막의 참수리는 남편 한 중사가 승선한 참수리 357호였다. 눈앞이 캄캄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평소 알고 지내는 군인 가족에게 전화했다. TV 화면 자막에 실종자 한상국 자막이 스쳤다. 그 시절 한 중사와 그녀는 결혼식은 가을에 하기로 하고 군인아파트를 빨리 받을 생각으로 혼인신고만 해서 군인아파트 신청을 하고 평택에 단독주택 1층에 전세로 신혼생활 중이었다.

김 대통령은 국군수도병원 전사자 빈소에 조화와 비서실장을 보냈을 뿐 조문을 가지 않았다. 언론은 조문도 안 한 국군통수권자의 월드컵 폐막식 참석을 월드컵 정상외교라고 미화했다. 김 대통령 넥타이는 검은색이 아닌 빨강이었다.

‘해군장’은 최초 5 일장을 한다더니 서둘러 3 일장을 했다. 5 일장을 했으면 귀국길에 대통령 내외가 참석할 수도 있었을 것을 원천 차단했다. 8월 10일 해군본부에서 전화했다. 한 중사의 시신을 인양했으니 확인하라고 했다. 시부모와 시누이를 차에 태우고 국군통합병원으로 달려갔다. 국군수도통합병원에 도착했다. 가족 대표로 시아버지 혼자 연평도로 가고 나머지 식구들은 수도통합병원 장례식장에서 대기했다. 한 중사 시신은 물고기와 꽃게에게 살점을 내어주고 앙상한 뼈만 남았다. 고 생각하니 저절로 눈물이 흘렀다. 한 중사 시신은 군복이 튼튼해서인지 살아있는 모습 그대로였다. 사람들은 정부가 유가족을 우습게 대해서인지 서해에서 패한 주재에 무슨 낯으로 다니느냐고 조롱하는 사람도 있었다.

김 대통령과 참모들은 노벨 평화상에 목숨을 걸었다. 현대 아산을 통해 북한에 5억 달러를 보냈다. 그 후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되었고, 김 대통령은 대한민국 최초 노벨 평화상 수상을 했다. 하지만 정권이 바뀌자 현대 아산이 북에 보낸 5억 달러가 불법 정치자금이라고 누군가 폭로했고, 검찰의 수사가 진행되었다.

검찰 소환이 임박한 현대아산 정 회장이 투신자살했다. 검찰은 공소권 없음으로 종결지었다. 국가정보원이 중앙정보부 시절부터 북한의 4.3조에 대해 심증은 있으나 탈북자 중에 고위층이 없어서 베일에 가렸던 것이 황장엽 노동당 국제담당 비서가 귀순하면서 비밀이 풀렸다. 평양 중구역 창광거리는 남한의 명동이나 홍대 입구에 비교될 정도로 붐비는 곳이다. 인공위성 촬영 해상도가 좋아서 국방위원장이 타고 가는 벤츠 차량의 번호가 216-3727이라는 숫자가 선명하게 인화되었다. 앞번호 216은 김 국방위원장 생일이 2월 16일을 나타낸 것이고 3727은 6. 25 전쟁 휴전협정일이 1953년 7월 27일인 것을 북한은 ‘전승절’이라고 7월 27일을 국가 기념일로 보내고 있다. 53년 7월 27일에서 앞 5를 빼고 3727로 차량 번호를 부여했다. 말로는 승리를 했다고 전승일이지만 7월 27일 미제의 공군과 해상 함포를 잊지 말자 뜻이 담겨있었다. 나름 김일성의 승리 해석은 황해도 경기 북부의 곡창지대 황해남도를 38선 이남으로 차지하고 동부전선 산악을 38 이북으로 후퇴했기에 식량 확보 차원에서 승리했다고 언급했다. 김일성 사망 이후 통치권을 물려받은 김 국방위원장은 ‘유훈통치’를 강조했다. 자신을 내세우기보다 김일성 수령의 하던 통치를 계승하고, 인민들에게 수령의 권위를 그대로 자신이 별도 통치 철학을 발표하는 것보다 효과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노동신문을 통해 ‘인덕 정치’와 ‘광폭정치’를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남한 김 대통령은 햇볕정책을 발표했다. 김 국방위원장은 4.3조를 가동했다. 김용순, 임동욱, 강석주, 전금철, 안병수, 박영수 등을 불렀다. 남조선 김 대통령이 세계 언론에 ‘햇볕정책’을 떠드는 것에 대응 방법을 끝장토론을 통해 대응 방안을 만들라고 지시했다. 1988년 올림픽 직전의 KAL 858기 폭파 같은 충격을 주고 싶다고 국방위원장이 말한 것에 김용순이 국제여론만 조선에 나쁘게 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전혀 도움이 안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 말에 국방위원장은 4.3조를 가동했다. 김 국방위원장이 혼자 결정하기 곤란한 국내외 문제를 4.3 조에게 주면 주야 며칠을 끝장토론으로 대처 방안을 도출해 보고했다. 남한의 국가정보원장이나 해외정보국장, 심리전국장, 극동 문제 연구소장 등의 인적 사항은 물론 그 하부 조직의 상당수 인원까지 4.3조에 포함된 인원들은 남한 사정을 깊게 알고 있었다. 특히 북한에서 태어난 강 통일부 장관은 기회만 있으면 경질을 주장했다. 북한의 외교 전술에 대응하는 외교부 산하의 연구기관에서 통일부와 외교부가 관제를 주면 북한에 대응하는 방안을 연구보고서로 보고했다. 일종의 북한의 4.3조에 대응하는 일을 했다. 리명수는 김 국방위원장에게 NLL에 대해 보고했다.

해상북방한계선(NLL:Northern Limit Line)은 북과 남이 합의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미제국주의자가 1953년 7월 27일 전승절 협정체결 시 분명히 호상 간에 합의하도록 해 놓고서 제멋대로 그은 것입니다. 서해 대청도, 연평도 중간 어디 공해에서는 남조선과 군사적 충돌이 있어도 미제가 개입할 수 없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이해시켰다. 소청도 연평도 사이 바닷길은 중국과 교역에도 4월에 시작하는 꽃게잡이는 외화벌이에 지대한 부분을 차지한다. 서해 5도에 12해리 이내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영해라는 것을 본때를 보여야 한다. 고 건의했다. 국방위원장은 아주 좋은 생각이라고 칭찬했다.

1999년 제1차 연평 해전은 북한이 선제사격을 했으나 남한 해군함정의 자동 사격통제장비가 즉각 반격했다. 수동 조작하는 북한 함정을 벌집으로 만들었다. 제1 연평 해전의 보복으로 제2 연평 해전을 일으켰다. 북한은 해군에 자동 사격통제장비로 교체했다.

2002년 9월 16일 국회 국정감사 국방위원회가 열렸다. 국회 정보위원회는 말로는 비공개회의를 한다고 신문기자들을 철수시키고 회의했다. 다음 날 조간에 보면 국회의원 이름을 실명 대신 K, L, M 의원으로만 표시했지, 비밀내용이 그대로 신문에 보도되었다. 그런 비공개회의는 왜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쓰리세븐 부대는 한․미 합동으로 구성된 정보부대라서 한 번도 국정감사에 나와 본 적이 없는 부대장이 증언대에 섰다. 절차에 따라 이 소장은 증인선서 했다. 선서한 이상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여당 국회의원 천 의원이 백두사업에 대한 질문 했다. 천 의원은 모 잡지에 ‘구멍 숭숭 정보망 줄줄 새는 국가 안보’라는 기사를 인용해 질문했다. 쓰리세븐 부대가 제1 연평 해전 때는 대통령부대 표창을 받았던 부대가 제2 연평 해전에는 정보수집 및 분석 지원 모든 것이 잘못 아니냐고 따졌다. 박인환 의원은 더 한심한 질문을 했다. 쓰리세븐 부대가 감청 정보를 수집하고도 2 함대사령부에 전파하지 않아서 생긴 참사라고 혹평했다. 증언대에 오른 이 소장은 ‘블랙 북(Black Book)'을 흔들어 보였다. 777 부대는 북한군이 훈련한 모든 통신을 감청 수집 분석하여 작전사 이상의 장군들에게 이렇게 정보 보고를 합니다. 6월 12일 이 정보 보고에 서해에서 북한군이 NLL을 침범한 것을 3개 항목으로 국방부에 보고했습니다.

1. 단순 침범

2. 월드컵에 대한 긴장 조성

3. 해군의 전투 반응 속도 점검

이상 3개의 의도로 분석 보고한 것을 김 국방부 장관이 2, 3항을 삭제하고 1번으로만 작전부대에 하달하라고 해서 발생한 참사이지 결코 777부대의 잘못은 아니라고 증언했다. 그러면서 블랙 북을 흔들었다. 순간 모든 카메라 기자가 블랙 북을 찍었다. 사진을 찍지 마시오. 하지만 플래시 터지는 소리가 더 요란했다.

천 의원은 군대는 지켜야 할 보안 사항이 있습니다. 쓰리세븐 부대는 그 존재 자체가 군사비밀 3급 이상입니다. 저도 군대 생활 30년 했습니다만 국방부 장관할 때까지 쓰리세븐 부대가 무얼 하는 부대인지 몰랐는데, 저렇게 블랙 북을 기자들 앞에서 흔들어대는 것을 보고 한심하고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김 국방 장관에게 당장 쓰리세븐 사령관을 인사 조치하라고 호통쳤다. 국방부 장관 되기 전에는 쓰리세븐 부대 자체가 비밀이라고 하면서 천 의원이 기자들 앞에서 777부대를 쓰리세븐이라고 용감하게 발언했다. 그것도 존재 자체가 3급 비밀이라는 말까지 했다. 그런 말을 안 했으면 쓰리세븐 부대가 있구나 하지 누가 777부대가 비밀부대라는 것을 알 수 없는 것을 만천하에 누설했다. 블랙 북을 흔들어 보인 이 소장만 중죄인 취급했다.

김 대통령이 남북 긴장 완화를 위해 ‘햇볕정책’을 추진한 것이 결과적으로 북한의 군사력을 강화했다. 제1 연평 해전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3년 동안 철저히 준비했다. 금강산관광에서 벌어들인 달러와 6.15 남북정상회담 성사를 위한 4억 5천만 달러의 대북 송금이 제2 연평 해전의 패배를 불러왔다. 4억 5천만 달러 불법 송금을 수사망이 좁혀오자 현대아산 정몽헌 회장이 투신자살했다. 제1 연평 해전도 선제공격을 당했지만, 북한 선상포가 수동포라 즉각 반격해서 승리했다. 제2 연평 해전은 양상이 달랐다. 북한 함정도 사격통제장치를 자동화시켰다. 그런 상태에서 선제타격은 승리의 초석이었다. 더구나 85밀리 전차포 2발이 흘수선에 명중이었다. 휴대용 대전차 무기 RPG-7을 4발 발사했다. 육상 전투에서 탱크를 부수는 무기를 배에 탑재한 것은 치밀한 계획을 하고 제2 연평 해전을 일으킨 것이다. 참수리 357호 희생자 (고) 윤영호 소령 외 6명에 대한 합동영결식은 ‘해군장’으로 거행했다. 임석상관이 해군 참모총장이다. 제2 연평 해전 전적비가 평택 함대사령부 내 안보 공원에 세워졌다. 영결식이 ‘해군장’이라고 국방부 장관, 합참의장, 연합사 부사령관, 육군참모총장, 공군 참모총장 등이 참석을 안 했다. 김 대통령이 6월 30일 일본에서 거행되는 2002 월드컵 폐막식에 참석했다. 국가를 위해 희생된 군인에게 국군통수권자가 외면하고 쓸쓸한 영결식이 되었다. 손 경기지사가 공직자 중에서 고위직 참석자였다. 정부가 햇볕정책을 추진한다고 모든 정책이 햇볕을 향할 수는 없을 터, 그 시절 군인은 죽어도 천대를 받았다. 특히, 장군들이라는 것이 비가 와도 군인, 눈이 와도 군인이라는 본분을 망각하고, 햇볕정책의 나팔수가 되었다. 김 국방부 장관은 말하는 것이 국방장관인지 통일장관인지 구분도 못할 정도로 햇볕정책의 전도사가 되었다. 777부대 창설 시부터 한․미간의 MOU에 따라 모든 감청정보는 수집과 분석 정보보고를 한미상호 합동으로 작성하도로 되었다. 사령부는 전방 감청 기지에서 수집 보고한 정보를 한미연합사령부 정보처에서 한미 정보실무자가 상호 통보하게 되었으나 김대중 정부 시기는 그것마저도 미군 측에 전달을 안 했다. 제2 연평 해전 직전 6월 12일 특이 징후를 쓰리세븐 부대로부터 통보받고도 한미연합사령부 정보 분야 최고 책임자가 미군 정보 책임자에게 통보하지 않은 상태서 미국 본토 DIA가 제2 연평 해전 참패 후 추궁을 했다. 해상에서 엄청난 해전이 발생했다면 사전에 감청 정보로 무엇이든 징후가 있었을 것인데, 왜 그런 보고가 없느냐? 문책성 질문이 왔다.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으로 군인이 청와대 눈치나 살피고 군인 본분을 지키는 장군들은 좌천되고, 햇볕정책 전도나 하는 똥별만 별을 하나 더 달았다. 이 소장이 쓰리세븐 사령관이 되고 취임사에서 밝히 ‘군인과 정치인’은 지금도 쓰리세븐 사령부에 전설처럼 기억하는 어록이다.

(777 사령관 취임사)

― 오늘 취임식 자리를 빛내주신 국방부 장관님과 여러 장군님에게 감사드립니다. 지금 대통령이 추진하는 햇볕정책 영향을 받아 온 나라가 햇볕에만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만 군인은 비가 와도 군인 눈이 와도 군인입니다. 정치가는 자신의 당선을 위해 유권자가 파란 모자를 좋아하면 파란색을 빨간색을 좋아하면 빨간 모자를 쓸 수 있습니다만 여러분이나 저나 군인의 모자는 얼룩무늬 하나입니다. 우리는 수집부대이지 사용부대가 아닙니다. 수집을 소홀히 해서도 안 되고 국방부에서 우리가 수집한 정보를 비중 있게 취급하지 않는다고 해서 의기소침해서도 안 됩니다.

777부대는 조기 경보부대로서 5천 만의 불침번으로서 또한 정보전의 첨병으로 북한군의 일거수일투족을 사진 찍듯이 정확히 그리고 철저히 수집 보고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부대에 부여된 지상 명제입니다. 수집된 정보가 국방부에서 어떻게 처리되고 활용하는지는 국방부 차원의 일입니다. 때로는 국가 정책을 시행하기 위하여 정보 조작도 가능합니다. (이하생략)―

남이 장에 간다고 똥장군 지고 장에 간다는 말이 있다. 장군 중에는 군인인지 통일부 서기관인지 구분 안 될 말을 하는 대령 장군들이 많았다. 대북 송금 및 현대 비자금 150억 원의 핵심 열쇠를 쥐고 있는 정몽헌 현대아산 회장이 2003년 6월 4일 오전 서울 중구 계동 현대 사옥에서 투신자살했다. 이것이 이날 모든 신문의 머리기사였다. 그가 고인이 됨에 따라 사건 진상규명 및 관련자 처벌을 위한 검찰 수사와 재판이 난항을 빚었다.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 조성 등 대북 경제협력 사업의 차질이 불가피했다. 8월 4일 오전 5시 50분경 서울 종로구 계동 140번지의 2 현대 본사 사옥 뒤편 주차장 앞 화단에서 쓰러져 숨져있는 것을 청소원 윤기선 씨가 발견, 경찰에 신고했다. 정 회장 집무실은 사옥 12층에 있었다. 화단 소나무 덕분인지 사체 훼손은 심하지 않았다. 반듯한 자세로 쓰러진 채 발견되었다. 119가 출동했다. 사망시점을 4-5 시간 전으로 추정했다. ‘나의 유분을 금강산에 뿌려 달라. 명예회장님께서 원했던 대로 모든 대북사업을 추진하기를 바란다.’라는 유서다. 그는 6.15 남북정상회담 직전 4억 5천만 달러 대북 불법 송금과 150억 원의 비자금 조성 의혹으로 출국금지 상태였다. 다음 주에 대검에 소환될 예정인 상태에서 고인이 되었다. 하지만 인터넷에는 정 회장이 자살이 아닌 타살 의혹이 떠돈다. 신문과 방송들이 일제히 ‘투신자살’을 보도한 것이 오히려 의심을 사고 있다. 수사기관에서 국과수의 부검도 없이 일제히 투신자살을 보도했고, 기정사실로 했다. 12층에서 투신한 것치고 사체가 너무 깨끗했다. 화장실 창문 가로 95, 세로 37인 개폐식 문을 투신하기가 얼마나 힘이 드는 것인데, 사체 와이셔츠는 좁은 구멍을 빠져나가기 위한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 북한은 김대중-노무현 정권 10년 동안 핵무기와 장거리 미사일을 계속 개발하였고, 미국 트럼프 대통령에게 핵보유국으로 호명받게 되었다. 트럼프는 서슴없이 북한이 핵을 보유한 나라라고 말했다. 현대 아산은 북한으로부터 7대 경제협력 사업권을 획득했다. 전력, 통신, 철도, 통천 비행장 건립, 임진강 댐, 금강산 수자원, 명승지 관광사업 등에 대해 독점적 지위를 얻었다. 문제는 그 사업권을 위해 4억 5천만 달러를 송금한 것인가? 김 대통령의 노벨 평화상 수상을 위해 송금했다는 폭로 인터뷰가 세상을 발칵 뒤집었다.

1994년 7월 8일 김일성이 사망하고 1995년 청진에 있는 6군단에서 김 국방위원장을 제거하려는 6군단 예하 부대 모의가 발각되었다. 조선 시대 ‘계유정난’에도 밀고자가 있어서 일망타진되고 ‘사육신-생육신’이 존재하듯이 6군단 사건도 밀고자가 있어서 일망타진되었다. 6군단 사건의 핵심 인물 중에 김일성종합대학교 졸업자들이 다수 있었고, 황장엽 제자들 때문에 처형 대상에 올랐으나 김일성 수령을 위한 ‘수령론’을 이론적으로 완성한 업적이 참작되어 처형에서 제외되었다.

처형에서는 구제되었으나 황장엽은 하루하루가 가시방석이다. 기회를 노리다가 필리핀을 거쳐 대한민국으로 귀순했다. 노동신문에서는 황 비서를 암시하는 ‘배신자여, 강 테면 가라’라는 제목으로 날조 비방의 사설을 한 페이지 가득하게 실었다. 그의 일가친척과 처가, 제자들이 처형당하거나 정치범 수용소에 수용되었다.

이 소장은 국방부 장관실로 경고장을 받으러 오라고 한 날 전역 지원서를 냈다. 부대의 명예를 위해 징계를 받느니 전역을 택했다. 전역 지원서를 국방부에 제출했다. 김 국방부 장관이 경질되고 새 국방부 장관이 취임하자 전역 지원서가 반려되었다. 그때 전역이 처리되었더라면 국회 국정감사에 출석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을, 전역이 취소되어 이런 수모를 당한다고 생각했다. 쓰리세븐 부대는 ‘매우 민감하고 엄중한 경고’라는 특이 징후를 포착해 일일 정보에 포함한 것을 국방부 장관이 하달 과정에 경고 문구를 삭제해서 쓰리세븐 부대에서 생 첩보와 가공 첩보, 최종일일 정보 보고를 모두 알고 있는 이 소장을 화나게 했다. 6월 14일 국방정보본부장실에서 정보 장군 회의가 있었다. 문상옥 육군 중장 정보본부장, 정보 사령관 조하영 육군 소장, 777시령관 이시연 소장, 북한정보부장 공군 준장 조민식, 정보융합 처장 해군 준장 채수석이 참석자였다. 회의에서 777 사령관은 6월 12일 문제가 된 일일 정보 보고를 작성한 날 정보사령부 항공사진 분석 그림에 북한의 지대함 미사일 실크 웜 발사대가 노출되어 항공사진에 주석이 달린 것을 보고 놀랐다. 지대함 미사일은 평소에는 동굴 속에 숨어 있다가 임무 준비 명령이 떨어지면 동굴 밖으로 나온다. 그런 미사일 발사대가 하루 2번 출격하는 U-2 항공사진에 찍힌 것은 확실하게 명령이 있었다는 증거였다. 참석한 장군들은 그 항공사진 주석을 보고도 무덤덤했다. 말 한마디 했다가는 청와대에 말이 전달되어 햇볕정책을 저해하는 말을 한 장군이라고 찍히는 날에는 승진은 고사하고 바로 전역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팽배했다. 포천시 이동면 노곡리 오뚝이 부대 연병장에서 이 소장 전역식이 거행되었다. 원래 장군 전역식은 마지막 보직 부대 연병장에서 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과거 자기가 근무했던 부대에서 할 수도 있다. 사전 보고를 하면 일정에 문제가 없으면 사전 국방부에서 해당 부대에 사전 준비 명령이 하달되었다. 쓰리세븐 부대는 부대 연병장이 좁고, 예포발사 시 소리가 주변 아파트단지까지 들린다고 포천 부대 사단장을 역임했기에 국방부에서 전역식을 오뚝이 부대네 지시했다. 부대 연병장에 장병들이 늘어섰다. 진행하는 순서에 따라 국민의례를 마치고 전 역사 순서가 되었다. 단상의 임석상관에게 목례를 하고 그는 단상 마이크 앞으로 나갔다.

(777 사령관 전역사)

저의 전역을 축하하기 위해 참석하신 육군 참모총장님과 선후배 장군 및 대령, 군무원, 부사관 전우 여러분에게 감사드립니다. 강원도 강림 촌에서 태어난 제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한 이후 지금까지 많은 분의 도움으로 777 사령관을 마지막 보직으로 전역하게 되었습니다. 욕심 같아서는 별 하나 더 달고 중장으로 전역하는 것이 좀 더 멋있을까? 생각을 해봤습니다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소장까지 온 것만으로 하느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후배, 장교, 부사관, 군무원, 병 여러분! 군인은 비가 와도 군인, 눈이 와도 군인입니다. 국가에서 햇볕정책을 펴든 바람 정책을 펴든 군인은 국가의 방패로 할 일을 묵묵히 해야 합니다. 국가가 햇볕정책을 편다고 군인이 첩보 수집을 느슨하게 하거나 경계를 소홀하게 한다면 나라 망하는 길이 될 것입니다. 북한군이 총을 쏘아도 확전을 방지한다고 대응을 안 하는 것은 군인이기를 포기한 것입니다. 북한군이 총을 10발을 쏘면, 우리는 100발로 갚아주는 것이 군인입니다. 선제사격에 대해서는 상부의 보고를 하기 전에 일단 응징보복부터 하고 상부에 보고해도 군법회의나 마지막 대법원판결도 군인의 본분을 다한 것으로 판결될 것입니다. 요즘 햇볕정책을 추진한다고 일선 장병들이 북한군이 총을 3발 쏘았습니다. 몇 발로 대응할까요? 상급 부대에 물어보고, 해상에서는 북한 상선이 제주해협에 진입합니다, 해상 검문을 할까요? 말까요? 통화하다가 검문도 못 하고 제주해협을 북한 배가 자기들 영해처럼 지나간다면 군인이기를 포기한 것입니다. 원 없이 군대 생활을 하고 저는 오늘 전역합니다. 이후 저를 대신한 후임 변형구 사령관에게 우리 부대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첩보 수집에 1년 365일 한 치의 오차도 없는 부대를 만들기를 기대하면서 떠납니다. 참석해 주신 내․외빈 여러분 앞날에 행복이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이 자리에 도열한 장병 여러분! 7번 쓰러져도 8번 일어나는 것이 오뚝이입니다. 군대 의무복무로 잡혀 왔다고 신의 아들이 아니고 장군의 아들도 아닌 어둠의 자식이라고 학대하고, 비하하지는 마십시오. 이 나라는 조선 말기 나라가 망했을 때나 임진왜란 시기나 국가에서 녹봉을 받는 정규군보다 녹봉 없이 참전한 의병들이 나라를 구한 것입니다. 정규군은 이미 일본군도 사전에 정보가 다 파악되어 있으나 의병은 정보 파악된 것이 없으니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는 두려움으로 일본 정규군이 불안 속에 지낸 것입니다. 정말 험한 산길을 가는데 예고 없이 나타나 멧돼지 잡는 총으로 일본군을 쏘고 달아난 것입니다. 총으로 멧돼지를 잡으면 수렵 총, 일본군을 쏘면 의병 무기가 되는 것입니다. 무사히 전역해서 부모 형제와 재회의 기쁨을 누리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이상! 전역사가 끝나고 연병장 대열 후미의 예포 21발이 발사되었다. 이 소장은 1948년 강원도 횡성군 강림면 월현리에서 태어났다. 현재는 강림면이지만 그가 초등학생 시절은 안흥면 강림리였다. 인구가 강림이 늘면서 1980년대에 면으로 승격되었다. 일본 강점기에는 영월군 수주면, 해방 후 안흥면 소속이 되었다. 강림초등학교 초기 이름이 ‘수주보통학교’였다. 강림은 중학교가 없었다. 강림초등학교를 졸업한 시연은 원주중학교에 진학했다. 아버지가 안흥중학교에 진학하면 자전거로 40리 통학은 가능하겠지만 공부하는 학생이 40리를 자전거로 왕복하면서 공부하면 공부에 지장이 있다고 원주중학교 근처에 방 하나 부엌 하나 딸린 집을 전세로 얻어 자취하면서 공부하도록 했다. 가장 골치 아픈 것이 연탄불 꺼지면 새로 살리는 것이 힘들었다. 주인 할머니가 시연 학생이 학교 간 시간에 연탄불을 확인하고 꺼지지 않게 갈아주었다. 연탄불이 꺼지면 그거 살리는 동안 공부할 시간 줄어든다고 할머니가 진심으로 연탄불에 신경을 썼다.

중학 2학년 때 수학여행을 갔다. 요즘은 경주에 관광호텔도 많고 시설이 좋아졌지만, 그 시절은 경주 불국사 근처에 여관이라야 현대여관을 중심으로 좌우 앞뒤 몇 개가 전부였다. 선생님들은 남학교 선생님은 여학생 만나는 것을 금지하고, 여학교 선생님은 남학생 만나는 것을 금지했다. 학생 시절은 꼭 금지하는 것을 더 하고 싶은 것이 심리다. 원주에서 수학여행 온 남학생 4명과 제주에서 수학여행 온 여학생 4명이 선생님 눈을 피해 현대여관을 나와 여관 담장 아래서 즉석 미팅을 했다. 육지 사람이 경주 불국사 구경하기는 쉽지만, 그 시절 제주에서 경주 불국사 구경을 온 것은 제주 애월 여자중학교 수준에서는 큰 모험이었다. 제주에서 부산까지 배를 타고 와서 부산 해운대와 오륙도 구경을 하고 경주로 온 것이다. 원주 중학은 원주에서 같은 강원도지만 가까이 있어도 구경 못 한 월정사를 먼저 보고 동해안 강릉 오죽헌을 보고 7번 국도를 타고 내려가 경주에서 1박을 하였다. 수시로 담임의 인원 점검 때문에 즉석 미팅은 서로의 짝만 정하고 헤어졌다. 즉석에서 남학생이 내놓은 물건 하나를 집어 들어 정한 짝이었는데, 성은 다르지만 이름 마지막 자가 ‘연(延)’이 같았다. 한자까지 같았다. 서로 이름에 관해 이야기했다. 지연의 아버지가 연세대학교를 가고 싶었다. 부모님이 거기는 학비가 비싸다고 국립대학교를 고집해 제주대학에 진학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제주에 취직해서 결혼하고 첫딸이 태어났다. 딸은 연세대학을 보내겠다고 이름 마지막을 연으로 지었고, 미는 여자는 예뻐야 한다고 어머니가 지었다고 했다.

원주 중학 학생들은 경주에서 1박이 마지막 밤이고 제주 여학생들은 경주를 보고 다음 날 부여 쪽으로 이동할 것이라고 했다. 수학여행을 마치고 시연이 제주로 고미연 앞으로 편지를 보냈다. 수학여행을 마치고 시연과 미연은 편지를 주고받았다.

선생님이 편지 검열을 할지 몰라서 편지에 ‘사랑’이라는 단어는 한 번도 사용하지 않고 편지 썼다. 내용도 수학여행지 경주에서 만난 것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는 내용으로 보냈다. 미연이 편지 잘 받았다고 답장이 왔다. 더 좋은 일은 편지에 흑백사진이 동봉되어 있었다. 이후로 편지를 계속 주고받았다. 그는 육군사관학교에 합격했다. 그녀는 아버지 바람대로 연세대학교 국문과에 합격했다.

제주에서 4.3 사건 때 큰 이모는 소문난 통신 하시였다. 제주에서 대대적인 토벌 작전이 진행되었다. 급하게 제주도를 탈출 육지로 밀항했다. 목포에서 지리산으로 이동했다. 일면 ‘빨치산’으로 불리는 이현상 부대를 찾아갔다. 몇 가지 사상 검증을 받았다. 통신은 통신 군관에게 테스트를 받았다. 모스부호 치는 것은 눈을 감고도 보냈다. 반대로 전문 수신한 것을 한글로 바꾸는 것도 통과되었다. 중요한 것은 통신 전문을 딱 2번만 읽으면 다 암기했다. 국군을 만나 몸수색을 당해도 걸릴 것이 없었다. 오히려 몸수색을 당하는 동안 눈은 국군의 수를 세었다. 다음 도착한 곳에서 전문을 암기해 전해주고 몸수색당하면서 눈은 국군의 수와 장교 계급장을 보았다. 큰 이모의 공으로 빨치산이 몇몇 전투에서 승리하기는 했으나 중과부적이었다. 점점 늘어나는 국군과 경찰의 토벌 작전에 백두대간 줄기를 타고 북으로 도주했다. 그녀는 북한에서 여자 통신 군관이 되어 대좌로 은퇴했다. 그 일로 고지연의 어머니와 2명 외삼촌은 공부를 잘하고도 공무원이나 공기업에 취직할 수 없었다. 오직 배 타고 고기를 잡아 팔거나 장사를 하는 것이 생계 수단이 되었다.

마음속에 있었으나 아버지가 북한 여군 통신 대좌의 조카라고 결혼을 반대한 이후는 어디서 어떻게 지내는지 몰랐다. 확실한 것은 원주여자고등학교 국어 교사였다는 것 하나로 찾았다. 원주여자고등학교 다음 보직이 어느 학교인지 문의했다. 제주도로 전보 신청해서 제주여자고등학교로 간 것을 확인하고 제주교육청에 문의했다. 지금은 군인인사법이 개정되어 총각 대령도 자격만 이상 없으면 장군으로 진급할 수 있지만, 그 시절은 총각 대령은 아무리 자질이 우수해도 장군이 될 수 없었다. 이 대령은 휴가를 내고 제주도로 갔다. 부모님께 결혼 승낙을 받으러 갔다가 빨갱이 조카를 며느리로 들일 수 없다는 아버지 말이 대못이 되어 가슴에 박혀있을 지연에게 무슨 말부터 할까 생각을 해도 떠오르는 말이 없었다. 그때 문득 지갑 속에 흑백사진이 생각났다. 흑백사진 뒷면에는 수학여행지 경주 불국사에서 주석이 달려있었다. 앞면 사진은 검은색 교복에 흰색 카라가 눈부신 소녀 미연이 빙그레 웃고 있었다. 사진 뒷면에 시연이 쓴 시보다는 낙서 수준의 글이 잉크가 희미하게 보였다.

소년의 사랑/이시연

너의 흑백사진을 받고/소년의 심장은 터지기 직전/천지 분간 못 할 사랑/밤마다 너를 안고 뒹구는 꿈에/아침에 깨고 나면 허전함이/구름처럼 피어나고/ 이 흑백사진을 늘 지갑 속에 넣고 다녔다. 소위 시절 유격장에서 140m 활차를 타고 도하전에 교관이 물었다. 애인 있습니까? 있습니다. 이름이 뭡니까? 고미연입니다. 좋습니다. 고미연 3회 복창 고미연! 고미연! 고미연! 도하! 도하! 정보장교라고 전방연대 정보과장 시절에 민간인이 더덕을 캐러 지뢰지대에 들어가서 지뢰가 터져 사망했다. 지뢰지대 개척을 수색 중대장과 정보과장이 선두서 개척하고 개척된 통로를 따라 수색 중대원이 들어와 시신을 헬기에 실어 국군 전곡병원으로 후송했다. 임무를 마치고 지갑 속에서 흑백사진을 보고 빙그레 웃었다. 이 지뢰밭 개척에 아무 사고 없이 한 것은 흑백사진 속 함박 웃고 있는 그녀를 만날 날을 하늘이 기다리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그녀가 원주여고 국어 교사였기에 원주여고부터 수소문했다. 원주여고에 근무하고 고향 제주로 전보 신청해서 제주로 갔다고 했다. 제주교육청에 문의했다. 서귀포 여자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는 것을 알고 전화했다. 제주공항에 도착했다. 미리 연락해서 공항에 그녀가 마중 나와 있었다. 흑백사진 소녀의 모습은 아니지만 멋있는 중년여성의 향기가 은은하게 났다.

“오랜만이야, 호칭을 미연아, 고미연 선생, 미 연 선생님 중 뭐로 불러?”

“야, 시연. 이시연? 이시연 대령 중 뭐로 불러주길 바라?”

“시연!”

“나도 미연 불러?”

“미연, 반갑다!”

“시연, 반갑다!”

주차장으로 갔다. 운전석에 미연 타고 조수석에 시연이 탔다. 능숙한 솜씨로 왼손으로 운전을 하고 오른손은 시연의 손을 잡았다. 오래전 대위 시절 강림으로 결혼 승낙을 받으러 갔다가 좌익의 조카라고 거절당하고 22년 만의 재회였다. 제주 해변 도로를 달렸다. 달리는 차에서 서로 그립지만, 감히 만나자는 말 한마디 못 하고 지낸 두 사람의 인생이 야기를 나누었다.

원주여자고등학교 국어 교사에서 제주도로 전보 신청해서 제주도에서 4년마다 전근 다니며 웬만한 고등학교는 한 번씩 근무하게 되었다. 그만큼 제자들도 제주도에 많고, 노처녀 선생이 언제 시집가나 호기심의 대상이었고, 남자 교사 중에는 결혼하자고 접근한 교사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자신이 교사인데 신랑까지 교사면 결혼생활이 재미있겠어요? 하면서 거절했다. 물론 이시연이 결혼했다는 소식이 있었으면 ‘갑돌이와 갑순이’ 노래 가사처럼 화가 나서 시집을 갔을지 모른다.

소문에 시연이 결혼하지 않은 것은 미연을 때가 되면 찾으러 오겠지 하는 기대도 있었다. 아주 오래전 4.3 시기의 북으로 간 큰 이모와 엄마가 살았고, 외삼촌과 조카들이 사는 집으로 갔다. 식구들에게 미연이 이 대령을 소개했다. 큰외삼촌은 놀랐다. 대령이 우리 집안이 좌익집안으로 알면서도 조카 미연과 결혼하려고 하느냐고 했다. 그렇다고 대답하자, 장군 진급을 포기한 것이냐고 물었다. 아니라고 했다. 어르신 시절은 연좌제로 월북자의 가족들은 공무원에 될 수 없었으나 요즘은 북한을 탈출해 남으로 온 사람들도 국영기업체에 취직을 시켜줍니다. 연좌제는 확실하게 철폐되었고, 대령에서 장군으로 진급을 해야 하는데, 결혼해야지 장군 진급이 가능하다고 상관들이 여러 번 맞선을 주선해서 여군 대령도 선을 봤고, 대기업 창업주의 손녀도 맞선을 봤는데, 미연 같은 여자를 만날 수 없어서 강원교육청과 제주교육청을 수소문해서 찾아왔다고 대답했다.

그 말에 미연 외삼촌과 이모들이 손뼉을 쳤다. 외삼촌 집에서 하룻밤을 자고 뒷산 아버지, 어머니 산소에 막걸리 한 잔 부어 드리고 절을 했다. 어머니와 외삼촌 이모가 좌익의 후손이라고 한 맺힌 생을 사셨는데, 당신의 사위가 국군 장교이고, 장군으로 진급할 수 있게 도와주시라고 소원을 빌었다. 그렇게 제주에서 좌익집안 친척을 2박 3일 동안 돌고 인사를 하고 휴가 복귀를 했다.

육군회관에 결혼식장 사용신청서를 냈다. 그렇게 결혼했고, 대령에서 장군으로 진급을 했다. 신혼여행은 다시 제주도를 돌았다. 지난번 일가친척 인사드린 곳이 아닌 둘만의 추억의 장소, 신혼여행 팀들이 많이 가는 곳을 피해서 알려지지 않은 명소로 돌았다. 미연 막내 이모는 서울로 시집와서 개봉동에 살았다. 막내 이모에게 결혼 소식을 알렸다. 막내 이모 박선자 여사 역시 조카사위가 대령이라는 것에 깜짝 놀랐다. 어떻게 장교 그것도 고급 장교에 속하는 대령을 만나 결혼하느냐고 눈물을 글썽거렸다. 사실 막내 이모는 미연 엄마가 두 살 차이이고 제주에서 알아주는 수재였으나 국군간호사관학교에 합격하고도 신원조회에서 떨어진 것을 알고 있었다. 정권이 몇 번 바뀌고 (고) 노무현 대통령 시기에 금강산에서 남북한 각각 100명을 추첨을 통해 이산가족 상봉을 하였다. 그때 북한에서 여군 통신 대좌로 노병이 된 박경자 대좌가 남한의 여동생 박선자를 찾는다고 신청을 했다. 남동생과 조카들도 신청할까 하다가 혹시라도 신청했는데, 남한에 2살 차 나는 남동생 박봉기가 이미 고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남동생 봉기, 인기, 영자, 선자 중에서 막내 선자가 어리니까 살아있을 확률이 높다고 신청했다. 적중했다. 이미 미연의 부모님과 봉기, 인기 두 외삼촌은 고인이 되었고, 인기 외삼촌과 막내 이모만 생존해 있는 상태에서 남북 이산가족 상봉 행사가 금강산에서 이루어졌다. 8월 20일에 금강산에 도착했다. 막내 이모와 이모부, 조카가 참석했다. 남북이 산 가족 상봉은 2015년 10월 이후 3년 만의 행사라고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선자 이모는 미연과 장군 정복을 입고 있는 모습의 조카사위 결혼식 사진을 경자 이모에게 보여주었다. 언니가 월북해서 좌익의 조카라고 이 남자 아버지가 미연이 결혼을 반대했었어. 25년 전에 미연이 예비 시집에 인사하러 갔다가 좌인 조카라고 결혼시킬 수 없다고 해서 울면서 돌아왔어. 그런데, 대령에서 장군 진급 대상자가 되었는데, 총각은 장군으로 진급시킬 수 없다고 해서 제주도까지 찾아가서 결혼하자고 해서 늦은 나이에 결혼하고 장군이 되었다니까요.

“어머나, 남조선은 총각은 장군을 안 시켜? 우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처녀, 총각도 능력만 되면 장군 진급시키는데? 그거 남조선이 북조선만 못하는구나?”

그 말에 선자는 아무런 대꾸도 못 했다.

이 소장 전역하는 날이 밝았다. 군인 신분에서 민간인 신분이 되었다. 미연은 자신이 운전하던 그랜저를 오뚝이 부대 담장 밖에 세웠다. 부대 안 연병장까지 차를 몰고 갈 수도 있지만, 최대한 부대 안에서 행사는 부대 안 행사이고, 행사 이후에는 민간인 신분의 부부라는 것을 지키기 위해 밖에 차를 세우고 걸어서 행사장 안으로 들어갔다. 모든 행사를 마치고, 악수할 사람에게 모두 악수를 하고 걸어서 부대 정문을 통과했다. 운전석에 미연이 앉았다. 조수석에 예비역 소장 이시연이 앉았다. 미연은 어디로 갈까? 물었다. 원주여고라고 대답했다.

“왜 하필 그 많은 학교 중에 원주여고야? 그리고 원주여고 그러면 원주여고 한 명도 합격 못 한 집안이야. 원주여고 출신은 원여고 그러자 원주여고라고 안 해?”

“뭔 소리야 원주여고를 원주여고로 말하는 것이 왜 틀려?”

“이유는 모르는데, 원주여고가 요즘은 추첨이지만 내가 원주여고 국어 교사 시절은 시험으로 뽑아서 원주에서 중학 나온 여학생도 정말 공부 잘해야 원주여고 들어갔지, 타지서 전교 1, 2등 하는 학생들이 시험을 보러 와 합격하는 만큼 원주 토박이 여학생 들어갈 자리가 부족했어. 그래서 시험시대 여고 출신들은 ‘원여고’라고 하지 ‘원주여고’라고 안 해.”

“그래, 그럼 목표 ‘원여고’ 출발!”

“오케이, 출발합니다. 예비역 시연 소장님, 육군참모총장 운전사도 대위가 해주는데, 육군 소장의 아내가 운전해 주는 차 옆에 탄 사람 직급은 뭐야?”

“군대서 내가 대위 시절은 말이야 남편이 대위면 사모님은 소령, 남편이 중령이면 사모님이 대령이라는 말이 있었는데, 당신은 소장의 아내라 중장, 별 셋이야.” “그럼, 별 셋이 운전해 주는 사람은 뭐야? 직급 지구상에서는 찾을 수 없겠지?”

그렇게 20대, 30대에 연애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으나 큰 이모가 월북한 북한군 통신장교 대좌라는 이유로 이 남자를 사랑하고도 결혼을 못 하고 지내다가 여자 나이 50이 훌쩍 넘어 결혼하게 되었다.

예비역 소장 이시연이 민간이 되어 하룻밤을 지냈다. 알람을 맞추고 잔 것도 아닌데, 정확히 5시에 눈을 떴다. 미연은 세상모르고 자고 있었다. 살살 고양이 걸음으로 방에서 나와 거실서 정수기 물을 한잔 마셨다. 냉장고 문을 열었다. 우유가 눈에 잡혔다. 유리컵에 한잔 마셨다. 편한 일상복을 입고 승용차 키를 들고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시동을 걸었다. 20년 만에 승용차 운전이다. 군대서 늘 운전병이 운전해 주는 차를 탔고 어쩌다 서울 동창 모임 나갈 때는 대중교통을 이용했기에 운전할 일이 없었다. 차를 몰고 아파트를 나왔다. 시흥대로를 달렸다. 독산동 군인아파트를 지났다. 시흥사거리에서 은행나무 동네로 들어갔다. 언덕길을 달려 별장 동네로 갔다. ‘별장 동네’가 왜 별장 동네인가를 아는 사람이 요즘은 드물다. 초대 수도청장 ‘창랑 장택상 별장’이 이곳에 있었다. 지금은 별장은 사라지고 별장 있던 곳에 표지석만 남았지만 커다란 별장이 있어서 별장 동네로 불렸다. 별장 동네 도로는 아는 사람만 안다. 시흥대로가 막히면 이 길을 아는 사람은 우회하여 신림동으로 넘어간다. 별장 동네를 돌고 삼막사 아래서 은행나무 마트를 돌아 시흥사거리로 빠져나왔다. 아파트로 돌아왔다.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후진으로 주차를 했다. 쿵! 소리가 났다. 정지하고 시동을 껐다. 문을 열고 나와 차량 뒤로 갔다. 큰 지하 주차장 기둥에 부딪혀서 범퍼가 깨졌다. 아내 미연에게 전화를 했다.

“여보세요?”

“당신 잠자는 거 깨워 미안해.”

“뭔 소리야, 뭔 일 있어?”

“아니, 뭔 일은 아니고, 지하 주차장으로 좀 내려와.”

“알았어요.”

그녀는 잠옷에 상의 잠바만 걸치고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왔다. 기둥에 차량 후미를 받아 범퍼를 부서뜨리고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이 1학년 입학 전 일곱 살 어린이가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처럼 보였다.

“주차를 오랜만에 하다 보니.”

“아이고, 미쳐요. 내가 일곱 살 시연이와 산다.”

“미안해, 주차하고 올라가 밥만 먹고 자동차 정비업체에 가자?”

“범퍼야 고치면 되고 당신 다친 곳은 없어요?”

“응, 없어.”

“그럼, 다행이고. 앞으로 절대 혼자 차를 몰지 마. 명령이야. 나, 결혼도 늦은 나이에 했는데, 과부 되기 싫거든.”

“알았어. 절대 혼자 안 나갈게.”

이시연이 소령 계급으로 정보사령부에 근무할 때 일이다. 정보처장에게 들은 말이다. 정보사령부에서 부사령관으로 은퇴한 장군이 전역 후 아파트 정문 차단기를 받았다는 말을 들었다. 그 일로 그 장군은 사모님에게 차 키를 압수당해 운전을 못 했다고 한다. 정문이 아니라 지하 주차장 기둥을 받은 자신이 그 정보사 부사령관보다 더 운전을 못 하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미연이 반듯하게 주차하고 13층 집으로 올라갔다. 아침을 먹고 카센터가 문을 열었을 시간에 둘은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왔다. 미연이 운전석에 타고, 예비역 소장 이시연이 조수석에 탔다. 안전띠를 맸다. 동네 카센터로 갔다. 사장이 2시간 정도 걸리니 어디 커피라도 마시고 두 시간 후에 오라고 했다. 커피 마시면서 시연에게 말했다. 복잡한 서울서 살지 말고, 당신 고향에 원하던 모양으로 집을 짓고 살면 어떨까? 우리가 결혼을 너무 늦은 나이에 해서 딸이나 아들을 만들 수도 없고, 입양해 키우는 것도 젊은 사람 이야기지 늙은 할아버지, 할머니가 애 키우면 학생이 되어 다른 엄마는 절고 예쁜데 왜 우리 엄마 아빠는 늙었느냐? 소리 들을 수 있으니까 입양도 싫다고 했다. 그래, 원주에 고등학교 동창회 나가면 알아볼게 했다. 그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두 시간이 흘렀다. 카센터에 가서 차를 찾았다. 집에서 일단 밖으로 나오면 들어가기 싫어하는 미연이었다. 어디로 갈까? 원주나 갈래? 그래, 왕년에 원주여자고등학교 처녀 시절 선생하고 20년이 더 지난 후에 한번 가볼까? 검색으로 원주여자고등학교를 찍고 출발했다. 차 안에서 고등학교 3학년 때 짝 두 연에게 전화를 했다.

“강두연입니다.”

“두연, 고등학교 3학년 때 같은 반 이시연인데 기억나?”

“나지, 육사 갔고, 신문에서 블랙 북 흔들었다고, 군사비밀 노출했다고 난리 기사 난 것을 봤다.”

“지금 서울서 원주로 내려가는데, 점심은 늦었고, 저녁같이 할 수 있겠니?”

“둘이, 아니면 다른 사람도 부를까?”

“동창 중에 원주, 횡성에 건축하는 친구 있으면 불러 봐, 나 서울 아파트 처분해 고향으로 내려가 집 짓고 살려고 해.”

“그래, 그러면 진섭은 전원주택 전문이고, 현진은 통나무집, 창용은 펜션을 전문으로 짓는다. 누구 불러 줘?”

“진섭, 현진 둘 불러줘?”

“알았어, 예비역 소장 이시연이 밥 산다고 모이라고 할게.”

“고마워.”

경부고속도로를 달리다 영동선으로 진입했다. 미연이 시연에게 말했다.

“영동선 들어섰는데, 약속 장소를 차량 주차장 있는 식당으로 정하고 내비게이션으로 가게 주소 알려달라고 하세요?”

“두연아, 주차장 넓은 식당으로 정하고 주소 좀 문자로 보내줘.”

“알았다.”

잠시 후 문자가 왔다. ‘원주추어탕 원주시 단관공원길 90-3’ 원 주 추어탕에 도착하니 친구들이 다 모여 환영했다. 군인 장교로 지내면서도 초, 중, 고 동창회 잘 참석하는 사람도 있는데, 난 정말 휴전선 155마일을 나 혼자 지키는 것도 아닌데, 한 번도 동참 모임 참석 못 하고 이제 은퇴해서 찾아왔다. 여기 제 아내 고미연을 소개합니다.

“인사해?”

“안녕하세요? 여러분의 동기 시연 아내 고미연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우리 동창들 아내 인사하면 무조건 노래 한 곡 하는 것이 기본입니다. 노래 한 곡 하시죠?”

“노래는 밥 먹고, 노래방 가서 부르죠? 제가 무대 체질이라 탬버린 없이는 노래를 안 합니다.”

“아, 좋습니다. 그런데, 소문에 이 친구를 장군 만들기 위해 장군심사 직전에 결혼했다는 것이 사실인가요?”

“남편이 국방부 장관으로 발탁된 것도 아닌데, 그런 청문회 성 질문에 답을 해야 합니까?”

“안 하셔도 되는데, 하면 더 친밀해지겠죠?”

“저 솔직히 학생 시절부터, 저는 제주도 시연 학생은 원주중학교 시절부터 연애편지 주고받았어요. 이 사람이 대위로 진급한 해에 강림으로 결혼하겠다고 인사를 갔습니다. 그런데, 시아버님이 우리 집안이 좌익집안이라는 것을 알고 있더군요. 당신 아들은 육사를 나왔고, 소령, 중령, 대령, 장군까지 진급해야 하는데, 결혼을 월북자 조카와 하게 되면 진급 안 되면 그 뒷감당이 되겠냐고 하셔서 울면서 강림을 나왔어요. 지금은 버스도 여러 대 다니고 급하면 택시라도 부르지, 그 시절은 강림에 버스가 밤에 들어가면 강림서 자고 다음 날 새벽에 나오던 시절 새벽 버스에서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강림이 싫어지니 원주도 싫어서, 원주여고 국어 선생 4년이 안 되었는데, 제주로 전출 신청을 했어요. 제주도에서 맞선도 보고, 같은 학교 남자 선생들이 결혼하자고 했는데, 이렇게 될 팔자인지 결혼하려고 추진하면 꼭 남자 부모님들이 반대해서 여자 나이 35세 넘기니 혼담 오는 것도 없어 독신으로 각오하고 살았어요. 세상에 50세 넘은 나이에 제주도로 찾아왔어요. 최대한 빨리 결혼하자고요. 왜냐고 물었더니 육사 성적, 소대장, 중대장, 대대장, 연대장 평정, 각종 표창, 정보학교 기초반, 고급반, 전략 정보반 모든 점수가 장군 진급에 이상이 없는데, 딱 하나 독신이라 장군이 안 된다고 장군 진급 후 1년 후 이혼하더라도 결혼하자고 그래서 했어요. 결혼하니 바로 전직 국어 선생에서 장군 사모님으로 호칭하더군요. 이혼 안 하기로 했어요.” 그 말에 참석한 두연, 진섭, 현진, 창용 친구들이 손뼉을 쳤다. 서로 지나온 30년의 인생이 야기를 하면서 식사를 했다. 장소를 카페로 옮겼다. 여기서는 시연과 미연이 정착할 집을 논의했다. 대지 80평에 38평은 2층 통나무와 황토 찜질방이 있는 집을 짓기로 했다. 계약한 날로 6개월 안에 완공하기로 했다.

서울로 돌아온 미연은 아파트를 공인중개사에 매물로 내놓았다. 시연이 미연에게 말했다. 운전하면서 한 손으로 내 손 만지는 일이 유일한 즐거움이니까 운전하지 말고 경춘선 ITX청춘으로 가보자고 했다. 청량리역까지는 독산역에서 1호선으로 갔다. 청량리역에서 ITX청춘을 탔다. 열차 안 손님 대부분은 2030 젊은 남녀였다. 청량리까지 갈 때는 맑았는데, 청춘을 타자 비가 내렸다. 차 창밖으로 빗물이 흘러내렸다. 천둥 번개도 쳤다. 청춘 열차 안에 많은 남녀가 서로 포옹을 하거나 키스했다. 키스하는 모습을 보고 그녀는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키스하는 애들이 부러워?”

“뭔 소리야?”

미연이 눈을 흘겼다. 얼떨결에 시연도 연미에게 키스를 했다. 맥아더 장군이 인천 상륙작전 하듯 기습적으로 키스를 했다. 처음은 주먹으로 시연 어깨를 치면서 미쳤어! 하더니 정작 키스를 하자 미연이 혀를 더 깊숙하게 넣었다. 시연이 미연을 양팔로 깊게 안았다. 미연 눈이 촉촉하게 젖었다. 우리에게도 분명 20, 30 젊은 시절이 있었고, 그때 키스도 하고, 결혼하고 딸, 아들을 낳았더라면 지금 ITX청춘을 4석을 구해 애들과 함께 여행할 수도 있었는데, 연좌제로 결혼을 포기했다. 이렇게 늦은 나이에 키스할 거라면 그때 아버지 반대가 있어도 결혼을 감행 못 한 것이 후회된다고 말했다.

미연은 촉촉하게 젖은 눈에서 눈물이 더 굵어지고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열차는 어느덧 곧 남춘천에 도착한다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기차에서 내려 춘천 공지천을 걸었다. 춘천을 다녀오고, 제주도를 다녀왔다. 제주에 감귤 농장을 팔았다. 제주는 둘이 와서 며칠 정도 지낼 수 있는 집 한 채만 남기고 정리했다. 서울 아파트도 바로 팔렸다. 통나무집 공사 잔금을 치렀다. 월현 2층 통나무집이 완공되었다. 이 집을 만드는데, 원주 추어탕 모임에 참석했던 사람들을 초대했다. 다음날은 이장님과 지역 어른들을 집으로 초대했다. 시연은 강림 한태봉 훈장에게 어린 시절 한문을 배웠고 강림초등학교 졸업하고 원주중학교, 고등학교 마치고 육군사관학교 간 이후 나이 육십에 고향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동네 어른들은 잘 왔다고 환영했다. 동네 어른들과 인사 후에는 강림면사무소에 전입신고를 했다. 강림초등학교와 중학교에도 인사했다.

중학교 교장 선생님이 예전에 고미연이 원주여자고등학교 근무 시 교무부장 하시던 연경흠 선생님이 교장이 되셨다. 남편이 예비역 소장이라는 것을 알고 봄이 되면 학생들이 수학여행을 가는데, 이번 수학여행은 판에 박은 불국사 수학여행이 아니라 학생들에게 국가의 소중함, 안보의 식을 고취하기 위해 안보 수학여행으로 인솔 선생님께 지시했는데, 시간 되시면 학생들과 동행하여 장군님이 수학여행안내 및 해설자를 해주실 수 있냐고? 했다. 미연이 좋아요.라고 하니, 교장 선생님은 당사자 이 장군은 답변을 안 하는데 먼저 말하면 되나요? 했다. 남편이 저에게 지은 죄가 커 제가 하자면 안 할 수가 없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치악산 각림 작은 도서관’에서 회원 등록을 했다. 미연이 시연에게 물었다.

“왜 강림인데 도서관 이름이 치악산 각림 작은 도서관이야?”

“응, 말하면 좀 이야기가 긴데, 인내심 가지고 들을 수 있겠어?”

“뭔, 강림과 각림 차이만 설명하지, 인내심을 들먹여?”

“명색이 국어 선생님으로 27년을 근무해서 교원 연금을 받는 분이 나중에 누구를 만나 설명하려면 제대로 알아야 하지 않겠어요?”

“전설 따라 삼천리야?”

“그 정도는 아니야.”

강림은 신라 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 있었던 ‘각림사(覺林寺)’라는 절이 있던 동네라서 강림이었다. 조선 시대 강원도 관찰사가 원주 목에 있었고, 양곡 창고와 무기 창고가 있어서 초등학교 터가 조선 시대 무기창고가 있던 곳이라고, ‘창말’이라고 불렀다. 각림이 강림으로 된 것은 일본 강점기 시기에 토지조사 사업을 하면서 측량기사와 말단 주사가 ‘각림(覺林)’ 발음이 안 되어 ‘가꾸림’‘강림’을 고민하였는데, 조선총독부 고급 관리가 ‘강림(講林)’으로 하라고 해서 강림이 된 것이다. 깨달을 각(覺)을 외울 강(講)으로 한 것을 보면 조선총독부 고급 관리는 한자 실력이 상당한 것으로 보였다. 20년 전에 강림 노인들이 지명을 각림(覺林)으로 되돌려달라는 청원을 했으나 강원도지사, 횡성군수, 안흥면장들이 수없이 바뀌어도 자기들 월급 축나는 일 아니라고 거들떠보지도 않았다는 말에 그녀가 지금 우리가 다시 지명 찾기 운동 나서볼까? 했다.

주민등록증도 횡성군 강림면 월현 주천강로로 만든 것을 찾아가라는 연락이 왔다. 미연은 시연을 조수석에 시연을 태우고 강림면으로 갔다. 강림면민 된 기념으로 명소 드라이브를 나섰다. 가장 먼저 간 곳은 태종대와 노고소였다. 태종이 왕자 시절 원천석의 가르침을 받았다. 불교가 득세하던 시기에 유학의 대가였다. 이방원에게 인의예지신을 오상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하나에 귀결된다고 가르쳤다. 중용의 도가 중요하다고 하면서 그것이 동대문과 서대문 어디 중간쯤으로 생각하는 엉터리 유생들이 수두룩하다고 개탄했다. 방원에게 의에 살고 의에 죽을 각오가 되어 있으면 나의 제자가 되고, 적당하게 시류에 타협하고 좋은 것이 좋다고 눈치껏 살려거든 공부할 생각 말고 한양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방원은 저를 잘 지도해 주십시오. 스승님의 가르침 의를 실천하겠다고 했다.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하면서 오래 사는 길이 아닌 의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하고 제자가 되었다. 사서삼경을 배우고 각림을 떠나 한양으로 갔다. 왕자의 난을 평정하고 임금이 되었다. 임금이 된 후에 스승을 조정으로 모시고 싶었다. 태종의 수레가 원주 감영에서 강릉 가는 길을 따라 안흥을 거쳐 각림으로 들어왔다. 주천강 언저리를 따라가마는 한쪽은 기암절벽 한쪽은 맑은 강이 흐르는 안견의 몽유도원도에 나오는 절경보다 더 아름답다. 하는 색시 바위와 덕 벼루를 지났다. 송실에서 잠시 쉬었다. 휴식을 마치고 추천이 아닌 각림천을 따라 가마는 강 상류로 올라갔다. 원주 감영 관할의 창을 지났다. 각림 창은 조선 시대 원주 감영에서 양곡과 무기를 보관하던 창이 있었다. 조선이 망하고 일본 강점기에 조선 강원도 원주 감영 창이 있던 곳에 영월군 수주보통학교를 세웠다.

각림천에서 빨래하는 노인을 원천석이 발견했다. 노파에게 뒤에 나를 찾는 사람에게 앞서가던 선비가 어느 방향으로 갔냐고 물으면 우측 길로 갔다고 말해주시라고 부탁했다. 정말 수레를 몰고 많은 일행이 노파에게 물었다. 앞서간 선비가 어느 방향으로 갔느냐고 물으니 노파는 우측 고개를 넘어갔다고 말했다. 노파는 우측을 갔다고 말했다. 제자가 임금이 되어 스승을 찾아왔으나 노파의 거짓말로 만나지 못하고 수레만 덜컹거리고 넘어갔다. 노파는 태종의 수레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기겁했다. 일반 높은 양반의 수레로 생각했는데 용이 그려진 임금의 수레였다. 앞서간 선비는 좌로 갔는데 자신의 말로 수레가 우로 가는 것을 보고 임금에게 거짓말을 했으니 죽음을 면할 수 없다고 빨래를 하다 말고 물에 빠져 자진했다. 왼쪽으로 올라간 원천석은 높은 산에서 수레가 넘어가는 곳을 향해 절을 했다. 산 이름이 배향산(拜向山)이 되었다. 수레가 넘어간 고개는 ‘수리 너 미’가 되었다. 배향산에서 원천석이 할 일을 마치고 살다가 죽었다고 ‘마치 골’이다. 제자가 임금이 되었다. 인의예지신을 아는 제자를 도와 국정을 이끌 마음이 왜 없었겠는가? 아무리 제자에 대한 사랑이 있다고 해도 운곡은 고려 유생이다. 대장부가 배운 사람과 못 배운 사람 차이가 무엇이겠는가? 배고픈 돼지처럼 그때그때 시류에 아부하고 녹봉만 이상 없으면 된다는 허접한 유생과 다르다는 것을 후세에 보여주고 싶었다.

태종대와 노고소를 보고 통나무집으로 가는 중에 강림초등학교에 들렀다. 시연이 강림초등학교 다닐 때는 목조건물이었다. 학교 주변이 아름드리 전나무가 빽빽하게 있었다. 학교와 선생님들 사택 중간에 연못이 있었다. 선배들로부터 전설로 내려오는 이야기가 연못에 승천하려던 이무기가 있었는데, 학교 소사가 그 이무기를 잡았다. 그 저주로 학생들이 소풍만 가면 맑던 날씨가 비가 온다고 했다. 정말 6년 다니는 동안 소풍날 비가 안 온 날이 없다. 어린 시절에는 넓어 보이던 운동장이 작아 보였다. 교실과 강당 선생님들 사택까지 한 바퀴 걸었다. 시연은 강림초등학교 시절 이야기를 했다. 초등학교 1학년 입학을 하고 4월에 보건소에서 예방접종을 했다. 주사약을 어린 학생에게 과하게 놓았는지 어깨가 부었다. 청소 당번이 시연 분단이다. 8명 중에서 7명이 도망갔다. 고민했다. 도망갈까? 아니야, 혼자라도 청소를 해야 하느냐고 속에서 갈등이었다. 혼자 했다. 일단 의자를 책상 위에 올렸다. 혼자 책상을 뒤로 물릴 수 없었다. 혼자 비를 들고 책상 밑을 다람쥐처럼 넘어 다니면서 쓸었다. 다음 걸레로 역시 책상 아래를 넘으면서 닦았다. 담임이 청소 검사를 맡으러 올 시간이 되었는데 안 오자 교실로 왔다. 책상 아래로 넘어 다니면서 걸레질하는 시연을 불렀다.

“이시연?”

“네?”

“혼자 뭐 해?”

“청소요!”

“야, 이 바보야, 다른 애들 갔으면 너도 가지 혼자 청소를 왜 해?”

“선생님이 책임을 다하는 어린이가 되라고 하셔서.”

“그래, 장하다. 이 바보 놈아!”

선생님은 시연을 안아주었다. 시연은 눈물이 흘렀다. 선생님이 너는 책임감이 강한 것을 보니, 이다음 군인이 되면 잘하겠다고 하셨다. 시연에게 1학년 선생님 말씀이 씨가 되었다. 원주서 중․고등학교를 마치고 육군사관학교에 합격했다. 강림 초등학교 20년 사에 최초 육군사관학교 합격생이었다. 교문에 현수막이 붙었다.

‘경축, 본교 11회 졸업생 이시연 육군사관학교 합격’

가을에 통나무집에 이사를 왔다. 곧 겨울이 되었다. 장독대 위에 눈이 소복하게 쌓였다. 강이 얼음으로 언 상태에 눈이 내려 하얀 솜이불을 깔아놓은 듯했다. 통나무집 옆 비탈진 밭에도 눈이 하얗게 쌓였다. 시연은 어린 시절 눈썰매 타던 것이 생각났다. 눈썰매 만들 시간은 없고, 헛간에서 비료 포대 두 장을 꺼냈다. 미연을 불렀다.

“제주에는 눈이 와도 눈썰매 안 타 봤지?”

“썰매를 만들려고?”

“아니, 이 비료 포대가 썰매 대용이야. 따라와.”

경사진 밭에 눈이 쌓이고 날씨가 추워 눈 위를 걸어도 눈이 부서지지 않았다. 비료 포대를 깔고 경사진 눈밭을 타고 내려갔다. 시연이 앞에 가고 미연이 뒤따랐다. 밭 아래 평지에서 만났다. 눈밭에 큰 대자로 누웠다. 둘은 눈에 뒹굴며 키스도 하고, 눈싸움도 했다. 마치 20대, 30대에 연애하고 싶어도 못 하고, 결혼하고 싶어도 연좌제 굴레로 못 한 것에 분풀이라도 하듯이 몇 번 키스를 반복하고 눈싸움도 했다. 한참 어린아이처럼 놀다 보니 배가 고팠다. 통나무집으로 올라갔다. 드럼통을 반을 잘라 만든 난로에 장작불을 피웠다. 냉장고에서 삼겹살과 김치를 꺼내고 치악산 막걸리를 가져왔다.

월현 겨울은 길다. 강을 가운데로 이쪽 언덕과 대안이 산이다. 겨울은 오후 5시만 되면 어둡다. 눈이 오면 시골집 지붕과 밭과 산이 온통 설국이 된다. 긴긴 겨울을 보내고 산에 진달래, 개나리가 피었다. 학생들이 개학하고, 신입생이 둘이 생겼다. 4월에 수학여행을 간다고 했다. 다른 농촌은 인구 감소로 학교가 폐교되는데, 이곳은 폐교된 초등학교를 재개 교했다. 이유는 동네에 통나무 학교가 있는 덕에 전국에 통나무 애호가들이 모여 살면서 도시의 젊은 부부들이 자신의 아이를 도시의 경쟁이 치열한 학교보다 자연 속에서 마음껏 뛰노는 초등학교가 교육 방송에서 특집 취재했다. 그것을 영국 BBC와 미국 CNN이 영어 자막으로 보도했다. 얼마나 인기가 있었으면 재방송까지 했다.

연 교장 선생님이 전화가 왔다. 시연, 미연 부부가 고향에 정착했다고 강림중학교에 인사차 갔을 때, 안보 수학여행으로 계획하였는데, 안내 및 해설을 부탁드렸는데, 시간이 되시나요? 물었다. 일자는 4월 16일에서 20일까지이고, 강림중학교를 출발해 서울에서 남산, 북촌, 홍대거리, 전쟁기념관을 보고 철원에서 1박을 하고 백마고지, 노동당사, 월정리역을 보고 평택으로 이동 1박을 하고 제2 연평 해전 순직자에 대해 참배를 하고 안보 공원을 돌아볼 것이라고 했다.

남쪽으로 아산 현충사와 남해안 이순신 장군 전적지를 돌아보고 강림으로 올 것이라고 했다. 시연은 교장 선생님께 알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바로 백지에 메모하고 안내 및 해설문 초안을 썼다. 남산, 북촌, 홍대거리, 전쟁기념관, 백마고지, 노동당사, 월정리역, 제2 연평해전, 현충사, 이순신, 노량해전, 명량해전, 한산대첩 제목을 백지에 제목만 썼다. 미연이 슬며시 다가와 등 뒤에서 시연의 목을 감쌌다.

25명 학생과 인솔 교사와 이시연 부부가 수학여행 버스에 올랐다. 계획대로 서울과 철원을 돌고 평택 안보 공원에 도착했다. 제2 연평 해전 순직자에게 묵념했다. 오늘 여러분에게 일일 해설을 맡은 이시연입니다. 여러분은 중학교 학생인데, 저는 월현이 고향입니다. 강림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강림에는 그 시절 중학교가 없어 원주로 나가 중, 고등학교를 마치고 육군사관학교를 진학했습니다. 군인으로 정년을 마치고 고향에 정착했습니다.

방금 묵념한 제2 연평 해전은 2002년 6월 29일에 발행했습니다. 여러분이 태어나기 전 이야기입니다. 2002 한일월드컵 4강에 우리나라가 올라가서 전 국민이 붉은 악마 티셔츠를 입고 길거리 응원을 했습니다. 서해에서 북한 해군의 선제공격을 받아 일방적으로 우리 해군이 패한 해전이 제2 연평 해 전입니다. 여기 안내문을 읽으면 다 이해할 것입니다. 안내문에 없는 이야기를 하나만 하겠습니다. 여러분! 지상의 왕자 호랑이, 하늘의 여왕 독수리, 바다의 장수 상어 셋이서 치악산에서 싸우면 누가 이길까요? 호랑이요. 그럼, 여기 평택 하늘에서 싸우면 누가 이길까요? 독수리요. 그럼 저 백령도 앞바다에서 싸운다면 누가 이길까요? 상어요. 그렇습니다. 중학생 여러분들도 다 아는 싸우는 장소에 따라 누가 이길지를 다 압니다. 국방부와 합동참모본부는 해군 2함대에 서해에서 싸우는 해군에게 상어처럼 싸우라고 지시할 것을 호랑이처럼 싸우되, 절대 선제공격을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겼을까요? 아니요. 안보 공원을 한 바퀴 돌아보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학생은 손뼉을 쳤다. 학생들이 제2 연평 해전전적비로 이동했다. 비문에는 제2 연평 해전의 경위와 조국의 바다를 지킨 2함대 장병들의 숭고한 감투 정신과 빛나는 무훈을 민족의 가슴에 깊이 새기고 산화한 젊은 영령들의 전공을 높이 기리고자 비를 세운다고 기록했다. 끝.

일반부 장려상 연영흠님이 <백서>로 독후감을 써 장려상을 받았습니다. 수상 후 블로그에 777은 엄청 많은 내용을 단편으로 담기에 부적합하다고 중편이나 장편으로 개작해보라는 것에 용기를 얻어 다시 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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