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릎까지 내려오는 롱패딩을 입고 캐리어를 끌며 공항에 입성했다. 인천공항은 아주 크고 넓다. 그리고 복잡하다. 유일하게 해외여행을 여러 번 다녀온 첫째 형제의 뒤를 아기 오리처럼 졸졸 쫓았다. 캐리어를 위탁 수하물로 부치고 입국 심사를 하는 줄을 길게 섰다. 공항 안은 더웠고 사람은 많았다. 제법 추운 날씨인데도 반팔 입은 사람들이 제법 보였다. 아무래도 해외여행은 봄이나 가을에 가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저가 항공사여서 비행기는 크지 않았다. 입은 옷의 부피가 컸기에 자리가 더 좁게 느껴졌다. 그래도 태어나 처음 비행기를 타고 구름 위로 올라가 내려다보는 세상의 풍경은 생경했다. 시차가 존재하는 하늘을 가르며 밤이 새벽이 되거나 낮이 저녁으로 변하는 하늘을 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는데, 그러려면 일본보다 훨씬 먼 나라로 가야 하고 그만큼 비행기 안에 있는 시간도 길어질 테니 먼 외국으로 떠나는 여행은 꼭 비즈니스석을 타야겠다고 다짐했다. 돈을 아주 많이 모아야 한다는 뜻이다.
첫 비행기라 그런지 하늘 위에서 멀미를 한 것 같다. 차멀미처럼 속이 메슥거리지는 않았지만 삿포로 공항에 착륙할 즈음에 무시하기 어려운 두통이 찾아왔다. 벌써부터 몸이 피곤했다. 짐을 정리할 숙소는 오후 4시부터 들어갈 수 있었지만 우리가 도착한 시각은 그보다 몇 시간은 앞선 오전이었다.
롱패딩을 입고 캐리어를 끌면서 일본의 지하철역을 헤매는 시간은 고된 여행을 끝마친 귀갓길 같았다. 하지만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생각에 눈앞이 아득해졌다. 길지 않은 여행이라 일정이 빡빡하기도 했다. ― 물론 나는 여행 계획에 관여하지 않았고 특별히 의견을 내지도 않았으므로, 당연히 다른 형제들이 짠 계획을 불만 없이 철저히 따라야 하는 책임이 있었다. ―
사실 이번 여행에서 나의 역할은 없었다. 여행 계획을 일일이 짜고, 비행기표와 숙소를 예약하고, 복잡한 지하철역에서 열차 티켓을 구매한 것도 모두 형제들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는 일본 지하철 티켓은 개찰구에 들어갈 때 다시 가지고 가야 한다는 사실을 몰라서 그대로 두고 오기까지 했다. 첫째 형제가 지하철 역무원에게 번역기 돌려가며 문의해서 간신히 임시 티켓을 받아 무사히 탈출했다.
숙소에 가기 전까지 캐리어와 짐을 넣을 코인 로커에서도 예상치 못한 변수가 생겼는데, 나와 둘째 형제의 캐리어는 무사히 락커에 들어갔지만 첫째 형제의 캐리어는 너무 커서 어디에도 들어가지 못했다. 결국 첫째 형제의 캐리어는 말 그대로 정말 짐덩이가 되었다. 허기가 진 우리는 역과 이어진 백화점 같은 건물의 돈가스 식당에서 아침 겸 점심을 해결했다. 육질이 부드러웠다. 생맥주를 시킨 첫째 형제는 맥주가 아주 부드럽고 맛있다며 좋아했다.
차를 별도로 빌리지 않았기에 일본 여행은 지하철을 타거나 내리 걸어야 했다. 하루에 거의 1만 5천~2만 보를 넘게 걸었는데, 첫날은 특히 힘들었고 삿포로 거리를 걸으면서도 얼른 숙소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가득했고 최대한 발목을 덜 쓰며 걷는 방법을 고심했다. 걷는 방법이 잘못된 것인지 조금만 오래 걸어도 발바닥과 발목 통증이 심해지는 탓에, 내게 배낭여행 따위는 상상으로만 이루어지는 일이다. 체력이 저질인 것도 있지만.
첫째 날은 저녁에도 속이 좋지 않아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모두가 피곤에 절여진 상태였다.
다행히 둘째 날부터는 몸 상태가 전반적으로 양호했다. 둘째 날에는 홋카이도 버스 투어를 떠났다.
비에이의 패치워크를 지나 세븐스타 나무를 보았고, 흰수염폭포와 청의 호수에 방문했고, 자작나무 숲길이 있는 마을의 탁신관이라는 미술관을 구경했고 ― 이곳에서 사진집 1개와 엽서 4묶음을 샀다. ― 패치워크는 마치 유럽의 시골 마을처럼 지평선 너머까지 넓게 펼쳐진 들판이 인상적이었는데, 새하얀 눈이 쌓이면 더 아름다운 풍경이라고 했지만 눈이 내리지 않아 드러난 초록빛과 땅의 색깔도 충분히 아름다웠다.
앙상한 세븐스타 나무
홀로 선 크리스마스 트리
비에이역 마을
흰수염폭포
설산
청의 호수
비에이역 근처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거리가 드라마 세트장처럼 예뻤고 주말인데도 길거리에 사람이 거의 없었다. 홋카이도 쪽으로 여행을 가려면 차를 빌려서 여유롭게 구경하는 게 좋을 듯하다. 도로도 한적하고 이곳저곳 거리를 걸으면서 운치를 즐기기 좋은 장소다. 운전면허나 차가 없다면 자전거를 타고 다녀도 좋을 것 같은데, 자전거를 빌릴 수 있는 장소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다음 일본 여행 때 자세하게 알아보기로.
맨 마지막 코스로 '팜도미타'라는 곳에 들렀다. 원래는 라벤더 꽃밭으로 유명한 장소이지만 우리가 갔을 때는 꽃이 다 지고 난 후여서 라벤더는 흔적만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탁 트인 전경은 아름다웠고, 날씨가 맑아 선명하게 보이는 새하얀 설산은 꽃밭의 화려함을 웅장한 중후함으로 바꿔주었다. 다행히 날씨가 좋아서 사진을 많이 찍었다.
다시 삿포로에 돌아와서는 식당에서 우동을 먹고 ― 나의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다. ― JR타워 전망대에 올라갔는데, 삿포로 시내의 야경을 한눈에 볼 수 있어 굉장히 마음에 들었고 주말이었는데도 의외로 사람이 많지 않았다. 크게 기대하지 않아서 기대 이상이었다. 야경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삿포로에 놀러 갔을 때 이 전망대에 가는 것을 추천한다. 전망대의 카페에서 커피와 음료, 와플 같은 디저트를 팔고 있어 야경을 보면서 간단히 즐기기에 좋다.
셋째 날에는 지하철을 타고 미나미오타루역으로 향했다. 유명한 오르골당에 방문하기 위함이었다. 그곳에서 친구의 생일 선물을 샀다. 둘째 형제는 그곳에서 비싼 오르골을 두 개나 사서 가지고 있던 현금을 탕진했다.
사실 기억에 더 선명히 남은 것은 오르골당이나 거리가 아니라 미나미오타루역으로 가던 길이다. 지하철은 바닷가를 달렸다. 바로 눈앞에 푸른 바다가 펼쳐졌는데 그 또한 난생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운 좋게도 내 앞자리에 사람이 없었기에 바다를 감상하며 목적지로 달려갔다. 지하철의 덜컹거리는 소리 ― 기차와 철도의 심장 박동처럼 들리는 ― 너머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푸른 수면과 하늘 사이의 수평선이 얼마나 선연하고 고요했는지. 역시 불멍보다는 물멍이 좋다. 파도멍이나 폭포멍의 진미를 아직 느끼지 못한 점이 아쉽다.
오르골당 근처에 있는 라멘집에서 식사를 해결하고 관광지로 유명한 운하가 있다고 해서 ― 정확한 이름은 모르겠다. ― 걸어갔다. 기념품가게와 식당과 카페가 늘어선 거리도 구경하며 걷기 괜찮았다. 다만 좁은 거리에 비해 사람이 다소 많아서 느긋한 구경은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걸어가는 길에 양초 가게 2층에 있는 카페에서 휴식 시간을 가지며 한국에 돌아가면 이번에야말로 좀 더 나은 사람으로 거듭나자고 둘째 형제와 몇 번째인지 모를 다짐을 했다.
도착한 운하는 생각보다 크고 예뻤다. 배를 타고 운하를 도는 코스도 있는 모양이었는데 작은 배에 사람들이 빈틈없이 빽빽하게 앉아 있었다. 저러다가 배가 뒤집히거나 가라앉으면 어떡하지, 그런 고질병 같은 상상을 했다. 운하 옆에는 벽돌 건물들이 줄지어 서 있었는데, 그중 사람들이 건너는 다리와 가장 가까운 건물은 벽 절반이 단풍처럼 보이는 붉은 나뭇잎의 넝쿨로 뒤덮여 있었다. 일본이 아니라 유럽 같았다.
와중에 갑자기 화장실이 급해진 나로 인해 황급히 화장실을 찾아 떠났고, 다행히 화장실이 있는 기념품 가게를 발견하여 고비를 넘기고 근처 바닷가를 잠시 구경했다. 나중에 나이가 들면 집 근처에 바다나 오를 수 있는 산이 있는 곳에서 살고 싶다. 젊은 시절을 화려하고 복잡하고 삭막한 도시에서 모두 태워버리고 나중에는 소음과 빛에서 멀어진 세상으로 떠나서 유유자적한 일상을 보내는 것이다. 모든 이의 낭만일 테다. 그만큼 이루어지기도 어렵겠지만.
낮에 들른 운하는 밤에 더 예쁘기로 유명했는데, 둘째 형제는 신사에 들러서도 줄곧 밤의 운하를 보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러려면 저녁에 가기로 한 삿포로 팩토리 ― 일본 최초의 맥주 양조장을 개조하여 세운 대형 쇼핑 및 엔터테인먼트 복합 단지 ― 에서의 일정은 사실상 취소되어야 했기에, 둘째 형제는 한참 고민한 끝에 밤의 운하를 포기하고 삿포로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밤의 운하는 다음에 다시 삿포로에 놀러 와서 구경하자고 기약했다.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많으니까. 혹은 그렇게 믿기로 했으므로.
마지막 날에는 공항버스를 타고 공항으로 향했다. 운 좋게도 숙소 근처에 바로 공항버스의 출발역이 있었다. 출발지부터 이미 사람이 꽉 차므로, 일본 여행을 갈 때는 숙소 주변에 공항버스의 출발 정류장이 있는지 확인하는 것도 좋을 듯하다. 이번 여행은 피곤하고 힘들기도 했지만 대체로 운이 좋은 편이었다.
공항에서는 아침으로 초밥을 먹었다. 한국인 관광객이 많아서인지 한국어 버전 메뉴판도 있었다. 나는 초밥을 좋아하지 않아 계란초밥을 먹었는데 굉장히 맛있었다. 간이 딱 적당한 느낌. 너무 달지도 않고 너무 짜지도 않은 폭신한 계란과 밥의 조화가 놀라울 정도였다. 초밥을 좋아하는 둘째 형제는 앞으로 한국 초밥을 못 먹을 것 같다고 말했다. 사실 나는 한국의 일식 프랜차이즈에서 판매하는 우동과 돈가스가 더 취향이다.
운이 나쁘면 일본에서 한국과 한국인을 싫어하는 현지인을 만나 고생한다. 기분 좋게 떠난 여행인데 불친절한 사람을 만나거나 차별당하면 얼마나 기분이 불쾌해지는가. 이번 여행은 운이 좋았다. 모든 사람이 친절했고 일본어를 몰라서 번역기와 어설픈 영어로 소통하면서도 귀찮은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다음 여행은 도쿄나 오사카 쪽으로 가고 싶다. 둘째 형제는 디즈니랜드에 가자고 말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생애 첫 해외여행이었고 엄청난 설렘은 없었지만, 그래도 한국을 벗어나 다른 나라에서 다른 문화, 다른 언어, 다른 환경을 겪으며 여행하고 그곳을 탐방하는 일은 한 사람에게 있어서 무척 좋은 경험으로 축적될 것이다. 여행을 많이 한 적은 없지만 나는 내가 썩 여행 체질이라고 느끼지는 않는데, 그래도 지구에 존재하는 수많은 땅과 하늘과 자연과 도시를 보며 좁은 시야와 꽉 막힌 마음을 조금씩 넓히고 싶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