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름을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태어난 계절이지만 너무 지나치게 덥다. 햇볕은 지나치게 뜨겁고 공기는 지나치게 답답하며 벌레는 지나치게 많다. 여름 자체의 풍경은 아름답지만 그 아름다움을 느낄 새도 없이 서둘러 시원한 그늘이나 에어컨 바람에 한여름 냉방병까지 도지는 실내를 찾아 헤매게 된다.
아무래도 여름이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은 네 개의 계절 중에서 생명력이 가장 왕성한 시기이기 때문일까. 모든 동식물의 활동이 가장 크고 격정적으로 일어날 때가 바로 여름이기에, 그 미시적인 활동성이 모여 거시적인 폭발을 이루어내는 순간은 분명 경이롭다고 생각한다. 나의 계절 취향이 어쨌든 여름은 매년마다 일정한 시기에 찾아와 일정한 시간 동안 머무른다. 다만 지구온난화로 인해 그 여름이 점점 더 뜨거워지고, 점점 더 길어지는 현상에 대해서는 모든 인간이 심각하게 숙고해야 할 환경 문제일 것이다.
책의 주제는 '여름'이다. 어째서인지 나는 두 번째 소설을 읽을 때까지 이 책의 주제를 '사랑'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맨 처음 작품인 김화진 작가의 단편소설이 사랑을 다룬 작품이어서 자연스럽게 사랑이라는 단어를 받아들인 것 같다. 그러다가 문득 이 책의 제목이 '사랑을 열어보니'가 아닌 '여름을 열어보니'로 시작한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제야 내가 착각하고 있음을 알았다. 조금은 부끄러운 일이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책의 중심인 소설보다 책 후반부에 실린 작가들의 짧은 산문에 더 많은 매력과 재미를 느꼈다. 가끔 소설은 시보다도 어렵다. 분명 어떤 이야기를 읽긴 했는데, 글에 대한 인상이 아예 남지 않은 건 아닌데, 이렇다 할 감상을 남기기가 애매한 작품들이 많다. 나는 아닌 척하면서 취향이 까다롭고 확고한 편인지라 이럴 때가 많다. 좋아하는 음식, 좋아하는 노래, 좋아하는 이야기가 뚜렷하게 정해져 있다. 취향의 다양성을 넓히지 못하는 것은 창작자로서 큰 문제다.
게다가 나는 내가 이야기를 좋아하고 어떤 스타일의 문체를 선호하는지 정확하게 모른다. 그냥 어떤 작가의 책을 읽다가 마음에 드는 이야기, 혹은 내 스타일의 문체를 우연히 마주치는 것이다. 완전히 자만추다. 같은 작가라고 해도 모든 책과 이야기가 마음에 드는 것도 아니고, 같은 가수라고 해도 그 가수의 모든 노래가 내 취향인 것도 아니다. 한마디로 설명하자면 까다롭고 변덕스러운 인간. 그래서 요즘에는 다양한 책을 읽으려 노력한다. 읽어야 할 책이 책장에 빼곡하게 쌓여 있다.
소설과 산문이 모두 있다는 것은 이 책의 아주 큰 장점이다.
여름의 냄새와 모습들
첫 번째 단편은 김화진 작가의 <사랑의 신>.
화자인 '나(신주희)'는 대부분의 시간을 사랑하는 데에 쓰는 사람이다. 사랑이 끊이지 않아서 연애도 멈추지 않고 하는 사람. 사랑의 신이라는 작품 제목도 주희의 별명에서 유래한다. 주희는 자신의 사랑을 지느러미 달고 주위에서 끊임없이 헤엄치는 존재로 비유한다. 그러니까 자신이 사랑 쪽으로 다가가는 게 아니라 이미 사랑이 제 곁에 와서 알짱거리고 있다는 말이다.
주희의 현재 애인은 '현우'다. 현우는 주희가 북 디자이너로 일하는 대학 선배들의 작업을 도와주며 지낼 때, 북 페스티벌 같은 게 끝나고 부스를 차렸던 사람들끼리 모인 술자리에서 만난 사람이다. 주희가 그곳에서 만난 사람은 현우뿐이 아니라 '솔아 언니'와 '지원 언니'도 있다. 네 사람은 어쩌다 보니 친해져서 모임까지 만들어 정기적으로 만남을 가지게 되는데, 주희의 애인은 현우지만 이 소설에서 훨씬 많이 등장하는 사람은 솔아 언니와 지원 언니다.
주희는 솔아 언니와 지원 언니가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된 사람들이었다고 말한다. 서로 좋아하는 마음이 분명하지만 누구도 먼저 말하지 않고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다가 결국 멀어져 버린 사람들이라고. 내 생각에, 아마 그 '좋아하는 마음'은 단순한 우정이나 친밀감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반대로 완전히 연애적인 감정 또한 아니었으리라 생각한다. 여느 친구가 그렇듯 평범한 우정이나 동질감에서 시작된 감정이 점차 사랑이라는 모호하고 발칙한 감정까지 물들어 그렇게 되어버린 게 아닐까, 나는 책을 읽으며 추측할 뿐이다.
모임은 지원이 먼저 떠나면서 서서히 시들어갔고, 종국에는 주희와 현우만이 남았다. 그리고 주희는 작은 만화책을 하나 만든다. 언젠가 지원에게 보여주었던 귀엽고 엉뚱하고 단란한 가족 만화. 하지만 주희의 가족은 남동생이 계곡에 빠져 죽은 후 흩어졌고, 주희는 그 트라우마로 여름이나 계곡이나 장마 같은 말로는 시를 쓰지 못한다.
언제나 차분하고 상처에 무감해 보였던 지원에게도 눈물에 젖어 곪은 마음이 있었다. 지원은 사이가 좋지 않은 가족 때문에 죽고 싶다던 친구에게 그렇게 나쁜 영향을 받을 바에는 헤어지라고 부추겼고, 고향과 가족으로부터 도망친 친구가 제 옆으로 왔는데, 그 친구가 바로 자신 옆에서 죽을까 봐 너무 무섭다는 고백이었다. 주희와 지원은 그 이야기를 서로에게만 했다. 지원은 어떨지 모르나 주희는 자신의 이야기를 솔아에게도, 현우에게도 하지 않는다. 슬픔은 슬픔을 알아보니까. 슬프지 않은 자에게 슬픔을 이야기하면 아무것도 이해하거나 공감하지 못할 테니 말이다.
지원과 솔아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어떤 일이 있긴 했던 건지 이야기에서는 밝혀지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현우를 사랑하면서도 현우에게 자꾸 상처를 입힌다. 주희는 저로 인해 상처받은 현우로부터 사랑을 느낀다. 주희는 생각한다. 사랑 곁에는 언제나 슬픔이 있는데, 어쩌면 자신은 사랑이 아닌 그것만을 사랑하는지도 모르겠다고.
43~44p
귀여운 가족 만화를 그리는 사람에게 가족이 없고, 상처에 무감한 캐릭터를 만들어내는 사람이 누구보다 상처를 오래 들여다본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항상 생각하려고 해.
누구나 숨기고 살아가는 속마음이 있고, 일부러 드러내고 사는 페르소나가 있다. 사람의 내면 혹은 이면, 직접 마주하지 않으면 결코 알 수 없는 것들이 존재한다. 그것을 의외라고 여기지 않고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타인에 대해 마음대로 기대했다가 마음대로 실망하는 태도는 아무래도 너무 성급한 것이다.
주희의 사랑은 독특하면서도 조금은 괴이한 구석이 있다. 멈추지 않는 사랑과 끊이지 않는 연애, 애인에게 상처를 줄 때 사랑이 살아나고 애인이 자신으로부터 상처받는다는 사실로 사랑의 안정과 안도감을 확인하는 것. 어찌 보면 그 또한 무수한 사랑의 형태 혹은 방식 중 하나라고 말할 수 있고, 또 다른 시선으로는 어떤 결핍이나 사무치는 고독이 낳은 정신적 공허감이라는 이야기를 꺼낼 수도 있을 것이다.
주희가 사랑한 사람은 현우만이 아니었다. 현우 이전에도 여러 애인이 있었고, 사랑의 결은 다르지만 솔아 언니와 지원 언니를 향한 애정 역시 남달랐다. 그들을 향한 주희의 애정은 거의 어릴 때부터 친밀했던 친언니 대하듯 견고하게 부푼 가족애 수준이었다. 그래서 지원이 먼저 모임을 떠나고 솔아와도 점차 멀어지며 결국 두 사람과 함께 했던 시절이 완전히 떠나갔을 때, 주희는 오히려 원망을 표출하거나 집착하기보다는 이별을 받아들였다. 사랑이란 갑작스럽게 구겨지고 망가지는 순간까지도 그것을 지그시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이기도 하니까. 사랑하기 때문에 되레 초연하게 체념한 채 떠나갈 수 있는 관계도 존재하니 말이다.
주희의 사랑은 매번 위태로운 느낌이었다. 지금도 그러하다. 이야기를 읽으면서 사랑이 반드시 애정만으로 채워지지는 않는다는 것, 그 안에는 슬픔과 외로움과 무기력감이 존재하고 무수히 많은 감정이 존재한다는 것을 느꼈다. 사랑하는 순간에도 아프고, 사랑이 떠나고 이별하는 순간에도 아프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다.
두 번째 작품은 이희주 작가의 <탐정 이야기>.
화자인 '나'가 도쿄의 셰어 하우스에 살면서 겪는 이야기다. 여러모로 불가사의하고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셰어 하우스에 어딘가에서 풍기는 정체불명의 악취는 끝내 출처가 밝혀지지 않고, 나와 같은 한국인이자 같은 셰어 하우스에서 사는 지헌의 방에 몰래 침입하려고 했던 범인도 밝혀지지 않으며, 그 외에 여러 가지 미심쩍은 것들도 시원하게 정체를 드러내지 않은 채 이야기가 끝난다. 시원한 결말을 좋아하고 열린 결말을 싫어하는 사람이라면 별로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다. 애초에 그런 성향이라면 이런 단편소설 자체를 좋아하지 않을 테지만.
다만 지금 다시 생각해 보면, 이야기를 읽으며 이방인으로서의 기분을 간접적으로나마 느낀 것 같다. 얼마 전 형제들과 홋카이도의 삿포로에 여행을 갔을 때도 그랬다. 일본과 한국은 사람들의 생김새도, 거리의 모습도 비슷한데 그럼에도 외국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어서 왠지 모를 소외감과 불안감이 매 순간 마음속에 내재되어 있었다. 내가 속한 모든 세상이 나와 아주 먼 곳에 존재하는 이질적인 존재들이라는 감상도 들었다.
일본어라도 할 줄 알았다면 그나마 나았을 테지만, 번역기의 도움 없이 자유로운 소통이 가능할 정도로 일본어 실력이 뛰어나진 않았고 역시 상상한 것과 실전은 달랐다. 혼자서 국내 여행을 세 번 다녀온 후에 ― 지금 생각 중인 곳은 강원도, 대전광역시, 제주도 정도가 있다. ― 일본 도쿄나 오사카로 혼자 여행을 떠날 계획을 세우고 있다. 아마 내후년쯤이 되지 않을까 싶은데, 그때까지 <두근두근 일본어>를 독파해야 한다.
아무튼 작품 속 인물들이 시간이 흐르는 동안 느낀 불안과 낯선 이질감, 세상과 동떨어진 듯한 소외감 등의 감정이 마냥 멀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특히 '이방인으로서의 감각'은 아무래도 그 상황이 직접 닥쳐야만 비로소 실감 나게 느낄 수 있는 것인지라, 피곤한 일정이었어도 삿포로에 다녀온 게 그저 힘들기만 했던 여행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다시 한번 해외여행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도 들고. 일본보다 조금 더 멀고 낯선 나라에도 방문하고 싶다는 마음이 슬쩍 고개를 내밀기도 한다.
127p
상상만 하는 인간과 실제로 하는 인간 사이에는 어떤 강이 흐르는 걸까? 그건 강일까? 아니면 마음만 먹으면 발목도 적시지 않고 건널 수 있는 얕은 샘일까?
실행력이란 어디에서부터 나오는 걸까. 실행한다는 건 좋든 나쁘든 과정과 결과가 나온다는 뜻이다. 왜, 소녀시대의 <The Boys>도 '겁이 나서 시작조차 안 해봤다면 그댄 투덜대지 마라 좀'이라는 가사로 시작하지 않는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일단 뭐라도 해 보자, 도전해 보자, 실패하더라도 시작하자, 그런 생각이 때로는 나라는 사람을 한 걸음 앞으로 미는 행위가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물론 무언가를 시도한다는 게 반드시 긍정적인 일만은 아니다. 나는 상상만 하는 인간과 실제로 하는 인간 중에서 전자에 가깝다. 뭐든 상상만 한다. 실제로 하기는 무서우니까. 현실적인 여건이 되지 않아서 불가능한 일도 있지만, 대부분은 조건을 갖춘다고 해도 정작 시도하지는 않을 것들이고, 개중에는 지금도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지만 귀찮거나 무서워서 대충 미뤄두고 있는 일도 있다.
나는 능동적인 실행력을 갖춘 진취적인 이들이 신기하다. 그러면 나 자신에게도 슬쩍 묻는다. 나도 저렇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지만 실패할 것 같다고 시도하지 않는다면, 내가 살면서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있을까. 그러면 질문을 들은 나는 대답하기도 전에 마음이 흔들리는 것이다. 그렇지. 맞지. 맞는 말이지. 하지만 아직 강을 건너지는 못했다. 혹은 얕은 샘을 강이라고 착각해서 주변만 서성이며 고민하고 있다.
136p
왜 모든 건 기대처럼 흘러가지 않는 건지, 그도 아니면 세상은 아름다운데 내 안에 무언가를 느끼는 능력이 사라진 건지……
요즘에는 순간을 온몸으로 느끼고 흡수하는 재능이 부럽다. 나는 무언가에 몰입하기를 힘들어하는 성격이다. 영화와 드라마를 별로 즐기지 않는 이유이기도 한데, 이러다가도 갑자기 특정 상황이나 인물에게 지나치게 이입해 힘들어하기도 한다. ― 그래서 최은영 작가의 단편소설집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를 읽을 때는 감정 소모가 심했다. ― 어쨌든 즐기는 것도 하나의 재능이라는 사실을 요새 실감 중이다. 경이로운 자연 속에 있을 때, 혹은 아름다운 풍경을 목도했을 때, 아니면 그냥 평범한 거리를 걸어갈 때, 우연히 날아가는 새나 나비를 목격했을 때. 그 순간을 머리로 의식하기 전에 마음으로 한껏 들이마시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어딜 가도 숨겨진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마음껏 사랑할 수 있는 능력자일 것이다.
나는 생각이 너무 많은지, 그래서 쓸데없는 걱정과 불안도 함께 늘어난 건지, 어떤 순간을 온전히 즐기거나 몰입할 수가 없다. 마음속에 있는 무언가가 조금씩 닳아서 점점 느려진 기분이랄까. 나 자신이 꼭 마모된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제 겨우 스물두 살인데 이런 마음을 벌써부터 느끼면 곤란하지 않은가. 아직 즐길 거리가 많고 즐겨야 할 시간도 많은데. 하지만 나이가 어리다고 이런 감정을 느끼면 안 된다는 법 또한 없기에, 나는 과거의 나보다 마음속 무언가가 뭉툭하게 닳아버린 지금의 나와, 과거의 나보다 마음속 무언가가 더 크게 자라난 지금의 나를 함께 생각한다.
세 번째 작품은 박솔뫼 작가의 <사랑하는 개>.
솔직히 이 작품은 읽을 때도, 지금도 완전히 이야기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해를 못 한 것이다.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개가 된 금이와 금이가 된 개' 정도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렇게 이야기하는 게 맞나 싶기도 하고. 화자가 헷갈리기도 했고 이게 현재 시점인지 과거의 어느 시점을 회상하는 건지 아리송하기도 했다. 이야기가 난해한 탓이라기보다는 나의 이해력이 다소 부족한 탓이다. 나는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사람이라기엔 문해력이나 개연성 이해도 부분에서 확실히 점수가 낮은 편이다.
다만 내가 이해한 대로 생각하자면, 화자인 '나'의 아는 동생인 '금'은 어느 날 개가 되고 싶다고 했다가 정말 개가 되었다. 그리고 죽었다가 다시 개로 태어났다. 나의 곁에 있는 금은 진짜 금이 아니라 금이 된 개라고 한다. 나는 어째서 개가 금이 되고 금이 개가 되었나 추리하지 않았고, 그냥 사람이었다가 개가 된 금이 괴로웠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인간으로 살아가는 건 끔찍한 일이지만 인간으로 살다가 인간이 아닌 존재로 살아가는 건 더욱 끔찍한 일이 아닌가! 내가 아무리 소리쳐도 사람들 눈에는 그저 짖는 개로만 보인다고 생각하니 왠지 모르게 섬뜩해졌다.
네 번째 작품은 정기현 작가의 <검은 강에 둥실>.
판타지 드라마 같기도 하고, 전래동화 같다고도 생각했다. 주인공 '새미'는 여름방학 동안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혼자 살게 되신 할머니 댁에 머무르게 된다. "할머니가 쓸쓸하시니 같이 있으라"는 부모님의 등쌀에 떠밀려 온 것인데, 정작 할머니는 그다지 쓸쓸해 보이지 않고 해야 할 일이 많아서인지 매일 분주하다.
이야기의 전개는 제법 독특하다. 말하는 멧돼지가 나오고,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무덤에서 나왔다가, 도망치는 할아버지를 쫓아가니 이승과 저승의 통로가 나오고, 망자를 저승으로 보내는 나룻배를 지키는 동행자가 나오고, 알고 보니 할머니와 그는 사랑에 빠진 사이였고, 엄청 커다란 야채들이 나오고, 망자들은 배가 아닌 거대한 야채를 타고 강을 건너고…. 대충 설명하자면 이런 이야기다. 동화나 꿈결에 가까운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지키는 '카론'과 사랑에 빠진 할머니는 이야기 후반부에 돌아가신다. 이승과 저승을 가로지르는 자와 사랑에 빠져서 그렇게 된 것일까, 아니면 그저 할머니의 수명이 다한 것일까. 곰곰이 생각해도 답은 나오지 않고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저승의 몸이 된 할머니는 사랑하는 카론과 진정으로 함께하게 되었을지 모르겠다. 죽은 자는 반드시 강을 건너야 하는 불문율에 의해 강제로 헤어져야 했을지도 모르고. 죽음 이후의 세계는 늘 궁금하다. 만약 정말로 죽음 이후의 세계가 있고, 내가 이승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면, 저승의 모습을 이승에 영영 알리지 못함을 아쉽게 여길 것이다.
네 개의 단편은 여름이 배경이거나 여름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같은 여름이라도 해도 채도와 습도가 전혀 다른 풍경들이다. 내가 여름을 주제로 글을 쓴다면 어떨까? 나는 여름에 추운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이야기를 쓸 것이다. 몸은 당장이라도 증발할 것처럼 더운데 마음은 아주 차가운, 그런데 몸이 정말 너무 뜨겁고 이글이글 타올라서 마음이 추운지 차가운지도 모르고 땡볕 아래에서 벌벌 떠는 이상한 사람의 이야기를. 아주 이상한 이야기가 될 것이고 온갖 혹평과 비판의 대상이 될 것이다.
여름의 맛은 다채롭다. 여름의 냄새는 여름이 지나면 순식간에 잊힌다. 그래서 이렇게 이야기로 여름의 냄새, 피부에 닿는 후덥지근한 공기, 시원한 과일의 맛, 햇볕과 바람 특유의 버석하고 눅진한 냄새를 남기는 것이겠지. 여름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여름은 그야말로 환상적인 시간이고 가장 맑은 계절일 테니 말이다.
여름이 남기고 간 것들
앞에서도 말했다시피 이 책에는 소설뿐만 아니라 짧은 산문도 네 개 실려 있다. 네 명의 작가가 제가끔 보낸 여름의 시절, 혹은 여름의 기억들을 실은 이야기. 이런 글을 읽으면 여름이 아주 싫으면서도, 어쨌든 여름이 있기에 태어나는 것들과 세상에 남는 것들이 있다는 생각은 든다. 바다, 물놀이, 아이스크림, 햇볕, 그늘, 과일과 곡식, 여름에만 피는 꽃들, 무성한 나무… 그런 것들.
김화진 작가의 <여름휴가 기억>은 작가의 어린 시절, 여름방학에 친척들과 계곡에 놀러 갔던 기억을 쓴 글이다. 나에게도 여름방학의 기억이 있다. 밀린 일기와 하기 싫은 숙제가 그득하게 쌓여 괴로웠던 방학. 하지만 일기니 숙제니 그런 귀찮은 것들은 모조리 미뤄두고 놀고먹고 자기 바빴던 방학. 왜 학교는 어린아이들에게 굳이 방학숙제라는 거대한 짐을 안겨주었던 걸까? 방학은 마음 편히 쉬고 놀라고 있는 건데, 아이들은 놀기 위해 아이로 사는 것인데 말이다. 숙제라도 있어야 그나마 아이들이 방학 내내 게임과 텔레비전과 컴퓨터에만 빠지는 길을 막을 수 있어서였을까? 어쩌면 어른들은 아이들을 질투했는지도 모른다. 어른이 되면 방학도 없고, 직장에서도 가정에서도 일을 하며, 아이들은 볼 수 없는 것들을 보고 느끼고 생각하고 알아가며 괴로워하는데 아이들은 아무 걱정 없이 뛰어노 ― 는 것처럼 보이 ― 니까, 그래서 아이들에게 숙제라는 짐을 잔뜩 안겨주어 아이들을 혼내고 괴롭힐 구실을 마련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나는 방학마다 매번 엄마의 본가인 외조부모님 댁으로 내려가 친척들을 만났다. 나이대가 비슷비슷한 이종사촌들을 만나서 놀았다. 우리가 아이였을 때는 당연히 마당에서 물놀이를 하거나 식구들이 다 같이 모여 계곡으로 놀러 가기도 했다. 그때는 무더위의 맹렬한 기승이나 그로 인해 무기력하게 가라앉는 몸과 마음을 잘 감지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저 뛰어놀기 바빴고 밥을 먹고 다시 놀기 바빴던 나날이었기에.
지금은 여름이 그저 뜨겁고 불쾌하고 답답하고 벌레도 많고 음식도 빨리 상하고 뙤약볕에 의식을 흐릿하게 만드는, 그런 골치 아픈 계절이 되었다. 물놀이도 하지 않고 계곡에 놀러 가지도 않고 여름방학도 없다. 어린 시절 기억은 뭐든 미화되곤 한다. 지나간 시절이고, 나는 그 지나간 시절 속에 있던 아이보다 성장했으니까 어쨌든 너그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사실 아이였을 때도 마음속에 남모르는 걱정과 불안이 많았다. 그러나 아이들은 그것을 잠시 잊고 순간에 충실하는 방법을 안다. 나도 한때는 그 방법을 알았다. 아련하다 못해 아득해지는 기억을 하나둘 서랍에 간직하면서, 나는 살아가는 힘을 조금씩 만들어내는 건지도 모르겠다.
이희주 작가의 <도쿄 노트>는 도쿄에서 보낸 여름을 실은 글이다. 여름의 도쿄라니, 얼핏 상상하면 아름다울 것 같지만 일본의 한여름은 한국의 한여름보다도 무섭다는 이야기를 드물지 않게 들었다. 젊은 시절에 혼자서 일본 유학을 떠났던 아빠는 여름에 일본을 가면 죽음뿐이라고 말한다. 무더위도 무더위지만,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인 섬이다 보니 한국보다도 훨씬 습도가 높아서 여름에는 호흡조차 힘들다는 것이다.
하지만 시원한 음식과 땀 흘리는 것과 해가 길어진 하루를 좋아하는 작가는, 도쿄의 화창하고 강렬한 여름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고 이야기한다. 나는 더위에 약하다. 여름의 뜨거운 햇볕에 사정없이 맞다 보면 일사병처럼 머리가 어지러워지고, 피부가 따가워지기도 한다. 이건 자외선 차단제를 제대로 바르지 않아서였나? 아무튼 더운 것도 싫고 땀을 흘리는 것도 싫다.
그래서 때로는 억울하다. 사계절마다 볼 수 있는 자연의 모습과 풍경의 아름다움이 다른데, 여름에는 거의 밖에 나가지 못하며 나간다고 해도 더위를 피할 장소만 모색하고 있으니 그런 것들을 마음 편히 구경하고 마음에 담을 수가 없다. 나도 사실은 한여름의 도쿄를 향한 일종의 환상 같은 로망이 있다. 한겨울에 새하얀 눈이 소복하게 쌓인 홋카이도 어느 지역의 풍경처럼 말이다. 유럽 여행을 떠난다면 봄이나 여름이 좋겠다고도 생각한다. 해외여행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낸다면 언젠가 가장 난이도가 쉬운 나라 정도는 도전할지도 모르겠다. ― 적어도 일 년 동안 적금을 차곡차곡 모아야 가능할 테지만. ―
글을 읽으며 도쿄의 여름을 머릿속으로나마 상상해 보았다. 도쿄의 하늘, 구름, 나무와 그늘, 사람들의 말소리와 자전거 소리, 인파로부터 한 발자국 멀어진 곳에서 내려다보는 어느 도시의 풍경들. 번화가보다는 한적한 골목이나 언덕을 찾고 싶다. 도쿄에 그런 곳이 있을까? 도쿄는 넓은 도시니까, 어딘가에는 반드시 있을 테다. 하지만 영화나 애니메이션 속에나 존재하는 장소를 찾다가 더위 먹고 탈진하는 게 먼저일 듯하다. 언젠가 회사를 그만두고 여행을 떠난다면 여름의 도쿄, 한 달 살기 정도는 시도해 보겠다. 바쁜 일정을 소화하며 여행하기보다는 천천히 산책하듯 풍경을 즐기고 홀로 느리게 걷는 시간을 보내고 싶다.
박솔뫼 작가의 <여름이 몇 걸음 뒤에>는 반대로 한여름 햇볕에 잘 마른빨래 냄새가 아니라, 장마철의 축축하고 우중충한 냄새가 난다. 먹구름으로 흐린 하늘과 빗소리가 멈추지 않는 시간.
나는 장마철의 학교를 기억한다. 학교 실내가 전반적으로 어두웠고, 비가 쏟아져서 하늘이 잔뜩 흐려지면 신기하게도 교실과 복도의 쨍한 형광등 불빛이 유난히 눈에 잘 들어오는 기분이었다. 차가운 에어컨 바람과 희미한 빗물 냄새와 어쩐지 학교가 조금 낯설어졌던 기억. 교실에서 멀어져 어느 모퉁이를 돌면 그동안 발견하지 못했던 미지의 무언가를 마주칠 것도 같았던 뒤숭숭하고 들뜬 감정이 떠오른다. 아이들의 목소리도 평소보다 웅성거렸고 조금 꿈결처럼 몽롱해지는 감각이 있었다. 어째서 그런 기분, 그런 감정, 그런 느낌이 들었는지는 모르겠다. 단순히 하늘에서 쏟아지는 수천만 개의 물줄기가 어떻게 그런 힘을 만들어 냈던 걸까?
어떤 계절에 관련된 기억이나 감정이 뚜렷한 일은 때로 신기하다. 나는 계절에 관한 호불호와 간단한 감상만이 존재할 뿐, 계절이 어떻게 날아와서 내 곁에 머무는지에 관해서는 생각한 적이 없다. 이 글을 읽으면서 문득 '여름에는 이것을 하자'라고 생각한 일이 있는데, 하나는 비가 내리는 날에 냉커피를 마시는 일이고 하나는 자전거를 타는 일이다.
자전거를 타지 않은지 너무 오래되었다. 길거리에서 자전거를 탄 적도 없다. 사람과 차와 장애물이 많아서 두려운 마음이 크다. 중랑천이라도 타고 달려야 할 것 같다. 배낭여행에 대한 낭만은 없지만 자전거 여행에 대한 낭만은 조금 있다. 자전거를 타고 여행을 떠나려면 우선 자전거가 필요하고, 자전거를 능숙하게 타고 달리는 실력이 필요하며, 자전거를 탔을 때 생기는 두려움은 필요하지 않다. 과감히 버려야 한다. 가방에는 냉커피를 담은 보냉병과 얼음물을 담은 보냉병을 하나씩 넣고 책과 공책도 챙겨서, 자전거를 타고 서울까지 달려가는 것이다. 여름이라면 더더욱 힘든 여정이 될 테다. 선크림과 양우산도 필수다.
그러고 나면, 그동안 하지 않았던 어떠한 시도 끝에 다시 돌아오고 나면, 나의 여름도 어딘가 조금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미약한 기대를 안고 있다.
정기현 작가의 <물 기억 잇기>는 작가가 처음 물에 빠졌던 순간, 처음 물에 떠올랐던 순간에 대한 이야기. 나는 수영을 전혀 못 하고 물도 무서워한다. 물에 뜨지도 못한다. 그래서 수영을 잘하는 사람을 보면 늘 부럽다. ― 이런 식으로 내가 부러워하는 사람은 지구에 대략 60억 명 정도 있을 것이다. ― 부드럽게 물속을 유영하며 자유롭고 수면 위로 올라왔다가 다시 가라앉기를 반복할 수 있다니! 수영은 물에 빠졌을 때도 생존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니 배워서 손해 볼 건 없는 운동이 아닌가.
그렇지만 수영을 배우고 싶은 마음은 없다. 평생 운전면허를 따지 않겠다고 다짐한 것과 비슷하다. 물에 대한 기억은 많지 않다. 가족들과 어쩌다 바다 구경을 가면 동해보다 가까운 서해를 갔고, 서해에 가면 썰물 시간이라 바닷물이 빠진 뻘을 자주 만났다. 맨발로 밟는 모래는 아주 부드럽다. 내가 걷는 곳이 원래는 바다라고 생각하면 기분이 꽤 오묘해지기도 한다. 물이 잠시 나가주어 나는 바다의 영역을 안전하게 밟고 다닐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서해는 바닷물이 차면 되레 예쁘지 않다. 바다에 뛰어들기보다는 조금 멀리에서 운치를 즐기는 맛이다.
여름은 싫지만, 여름이 남기고 떠난 기억들은 그럭저럭 나쁘지 않다. 개중에는 좋은 것도 있고 지금 떠올리면 그리운 순간도 있다. 비단 여름이 아니더라도 어떤 시절이든 그럴 테다. 지나고 나면 그리워지고, 더 지나고 나면 뭉개져서 윤곽조차 흐릿해지고…. 다 그렇게 지나가고 흘러가는 걸까. 시간이라는 개념을 삶에 적용한다면 우리는 늘 시간과 만나고 이별하는 중이다. 지금은 여름이 내 곁이 없고, 언젠가는 다시 또 지겹게 찾아와 나를 괴롭히겠지.
'여름'이라는 시간의 색다른 결을 느껴보고 싶다면 이 책을 읽어도 좋다. 무엇이 여름이고 어떤 곳에 여름의 공기나 냄새 따위가 숨어 있는지 찾아보는 일 또한 괜찮은 감상이 되지 않겠는가! 마지막은 인상 깊게 읽은 구절 하나를 남기고 가겠다. 여름이 아닌 봄과 가을과 겨울 속에 숨은 이야기는 무엇일지 문득 궁금해진다.
231p
이런 식으로 몰입하는 순간을 보내고 나면 글을 써서 책이 된다는 건 하등 쓸모없는 일이고 오로지 쓰는 순간, 그 순간만이 진실이 아닌가 싶다.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나든, 다가올 불행에 미리 마음 쓸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