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로 첫째 아이의 유치원 졸업식은 취소되고 초등학교 입학식 또한 잠정적 연기상태였다. 아침마다 EBS방송을 보며 초등학교도 못 밟아본 아이와 지지고 볶는 일상이었다. 학원은 정상적으로 운영하고 있어서 그나마 할 수 있는 유일한 외출이었다. 마스크로 얼굴을 꽁꽁 싸매고 4월이지만 아직은 차가운 바람에 겉옷을 여미고 길을 나섰다. 아이는 학원에 들여보내고 카페에서 커피를 한잔 마시고 있었는데 웬일인지 속이 너무 거북하게 느껴졌다.
'먹은 것도 없는 데 체한 건가.'
혼자 생각하며 갸우뚱했는데 서늘한 느낌이 뒷목을 스쳤다. 이상한데 이 느낌은? 첫째 아이를 임신했을 때 속이 안 좋다며 초록매실 음료만 입고 달고 살았던 그 시간이 갑자기 생각났다. 일단은 그럴 리가 없다며 하원한 아이와 함께 스파게티 집에 갔다. 아빠도 늦게 오니 저녁 먹고 가자는 말에 아이가 고른 메뉴는 크림 스파게티였다.
"아놔, 엄마 속 안 좋은데 토마토소스 먹음 안될까?"
"나 크림 먹고 싶어. 그럼 엄마 토마토소스 하나 더 시키면 되잖어!"
"아들아, 맨날 많이 남기잖아. 알았어 그거랑 빵이나 추가해서 먹자."
역시 아들은 반정도 먹고 빵을 하나 먹더니 배부르다며 남겼다. 나머지는 모두 내 차지가 되었다. 애들이 남긴걸 안 먹어야 살이 빠진다는데 이렇게 먹으니 뱃살과의 영원한 동행은 언제 끝날까 싶다. 탄수화물 줄여야 하는데라는 생각을 하며 나머지 스파게티를 먹는데 속이 안 좋다. 불길하다. 느끼하다. 대충 남기고 집에 와서 아이를 씻기고 재우고 하루를 마감했다.
남편도 늦게 오니 한가하게 티브이를 틀고 보고 있는데 계속 속이 안 좋다. 이유 없이 짜증도 난다. 이럴 때 만만한 상대인 남편한테 문자 폭격을 날렸다.
"속이 안 좋아. 기분이 안 좋아 그냥 안 좋아 계속 안 좋아 짜증 나."
"왜 이래 그분 오신 거 아니야?"
"아니라고!!"
"기분이 싸한데 알겠어 내가 뭘 해줄 수 가없으니, 그럼 난 더 놀고 갈게!"
'에라이 문자를 보낸 내가 바보지......'라는 생각에 일단 억지로 잠을 청했다.
아침에 눈을 떴는데 이상하다. 눈뜨면서 계속 속이 안 좋다. 느낌이 싸하다. 주말이라 옆에서 늦잠 자고 있는 남편에게 약국에서 임신 테스트기를 사 오라고 침대 밖으로 밀어냈다. 남편도 어젯밤부터 뭔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는지 까치집 지은 머리로 주섬 주섬 트레이닝 복 바지를 입고 나가서 테스트기를 사 왔다.
고맙다는 말도 미뤄둔 채 재빨리 화장실로 들어가 테스트기를 해봤다. 두근두근두근 심장이 떨어질뻔했다.
두둥! 두줄이다! 임신이다! 이 나이에 임신이다.
갑자기 맥이 확 풀리면서 변기에 주저 앉아버렸다. 이제 곧 40인데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세상에나 세상에나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났나 싶었다.
이제 첫째도 8살이고 학교 들어가고 적응하면 나도 다시 일을 시작하고 좀 더 활기차게 살아보겠노라고 다짐하고 있었던 터였다. 외동아들을 키우면서 잠시 잠깐 둘째 생각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육아는 너무 힘들고 내 체질이 아니라며 이내 머릿속에 생각을 지우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생각을 지웠었다.
그런 내가 둘째를 임신했다. 그것도 7살이나 차이나는 둘째를 말이다. 난 외동예찬론자였단 말이다.
테스트기를 남편에 보여주니 이 남자 당황했다. 축하한다고 말은 하는데 입술이 가늘게 떨리고 있다. '임신이야!'라고 말하니 축하해라고 말은 하지만 영혼이 담겨있지 않다. 누가 보면 모르는 사람이 임신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좋은일이군!'이라는 인사말 하는 정도의 리액션이다. 하지만 남편의 태도를 문제 삼을 만큼 내 정신이 온전치 않았다.
이런 어쩐다. 계획에 없던 둘째였다. 무엇보다 난 다시 육아를 하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남편이 쉬는 날이었다. 대충 세수만 하고 점퍼를 걸치고 산부인과로 차를 몰았다. 테스트기를 확인하고 왔다고 하니 간호사가 "임신 확인하시려고요 초산이세요? 경산모세요?" 물어본다. "경산모에요." 짧은 대화 끝에 진료를 봤다.
초음파상으로 무언가가 보인다. 동그란 타원형이 또렷하게 보인다. 임신이다. 아기집이다.
사진출처 : Unsplash의Omar Lopez
난 둘째를 임신한 것이다.
"축하합니다. 임신이네요 6주예요"
"아하하하하 임신이네요 첫째가 8살이에요 이럴 수가 있죠?"
도대체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초음파 사진을 들고 집으로 왔다. 남편은 이를 어쩌나 하는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마냥 축하할 수만은 없었던 둘째가 그렇게 찾아왔다. 이 글을 쓰면서도 지금 둘째에게 마음껏 기뻐하고 축하하지 못했던 그 시간이 많이 미안하다.
아기는 뱃속에서 서운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큰 이벤트가 기다리고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