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만한 날은 오지 않을 수도 있으니
아직은 그때가 아니라 생각했다.
시간도 여유로워야 하고, 작업 공간도 있어야 하고
필요한 재료 장만 하는 것을 머뭇거리지 않을 만큼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이유로 손그림은 그때 가서 그리자 하고 저만치 밀쳐 두었다.
디지털로 그림을 그리게 된 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다 생각했다.
내 엄마는 마지막 숨을 들이마신 순간 알았을까?
'끝이다!'라는 사실을...
아마도 모르셨을 거 같다.
그저 엄마 몫으로 나온 병원 밥을 삼키기 힘들어
아빠에게 권했을 뿐.
아빠 역시 그 말이 엄마의 마지막 말임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엄마가 엄마의 밥을 권했기에 그 밥을 드셨을 뿐이다.
엄마는 유언이라고 할만한 어떠한 말도 남기지 못했다.
5개월 조금 더 지난 지금도 믿기지 않는다.
그날이...
엄마가 그렇게 떠나갔다는 사실이...
아무리 생각해도 맥락 없는 죽음이었다.
의사도 간호사도 별 문제없다 했었다.
믿기 어렵지만 그렇게 갑자기 죽을 수도 있는가 보다.
생사의 경계는 그리 두텁지 않아서
언제든 쉬이 넘어갈 수 있는 모양이다.
그리고, 알았다.
내가 생각하는 '할만한' 그날은 내일이 아니라
바로 오늘이라는 사실을.
내가 누릴 수 있는 시간은 지금이지 내일이 아니구나.
내일은 기약 없는 시간이구나....
우리 집은 일찌감치 거실 소파를 치웠다.
대신에 6인용 식탁을 놨다.
우리 집에서 가장 넓은 공간은 거실인데
소파가 있는 거실은 비실용적이었다.
그래서 '넓은 거실을 맘껏 누리자'라는 생각으로
소파를 치우고 커다란 테이블을 놓은 것이다.
이곳은 나의 일터이기도 하고
가족들과 함께 식사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그리고 지금은 한 가지 용도를 더해
내가 그림 그리는 공간이다.
여러 용도로 사용되는 공간이다 보니
그림 그리기 위해 즐비하게 늘어놓은 것들을
수시로 치워야 한다.
부지런하게 움직여야 한다는 뜻이다.
사진 속에 보이는 150 색깔 색연필도
큰맘 먹고 장만했다.
음... 남편에게 가불 받은 생일 선물이다.
무려 5개월을 땡겨 받았다.
테이블 전체를 사용할 수는 없고 가로 1m, 세로 1m 정도가 나의 작업 공간이다.
물감, 색연필, 종이박스, 칼, 가위, 접착제 등등...
잔뜩 어지럽혀져 있다.
작업을 빨리 마무리하고픈 마음에
아들과 함께 하는 저녁밥으로 특별히 피자를 주문했다. 테이블 정리를 하려니 아득하다.
그래!! 오늘은 바닥에서 먹자!
아라도 뭘 먹어야 한단다.^^
서서히 그림이 완성되고 있다. 꽤 여러 날에 걸쳐서...
드디어 완성이다. 가로 25cm 세로 33cm 크기의
MDF 패널 위에 작업했다.
매일매일 펼치고 치우고의 연속이다. 번거롭다.
하지만 나는 오늘 나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그 정도의 번거로움쯤은 마다하지 않기로 했다.
모든 것이 충족되는 그날은 오지 않을 수도 있으니
궁색한 오늘이 딱 좋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