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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성 Nov 18. 2017

칼럼: About Giotto tour

'덕후의 행복은 셀프'


나는 지오토 디 본도네(Giotto Di Bondone) 라는 중세 화가를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이 여행을 기획했다. 그의 그림을 더 많은 사람들이 알았으면 좋겠다는 단순한 바람과 그 여정의 특별함에 대한 확신이 더해져 <지오토 투어>라는 조금 엉뚱한 여행이 탄생했다.


엉뚱하다고 말한 이유는 유럽의 예술을 주제로 한 인문학 투어는 많고 다양하지만 단일 화가에 대한 투어는 드물고 그나마 르네상스나 근대 작가에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중세 화가를 주제로 여행을 만든다는 것이 현실성이 있다고 판단하기는 쉽지 않다. 지오토가 잘 알려져 있는 유럽에도 그의 작품만을 감상하기 위한 투어 같은 건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대부분이 프레스코화인 그의 작품을 보기 위해 이탈리아의 도시들을 돌아보는 투어가 있다는 얘기는 들어보지도 검색에서 발견하지도 못했다.                            


(Giotto Di Bondone, 1267~1337)

- 지오토는 키가 무척 작았고, 카리스마 넘치는 성격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당대에 그는 혁신적 작가의 대명사였으며 그의 이름은 최고의 회화와 동의어였다.

     

내가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은 바로 그 점이다. 회화 예술이 본격적으로 꽃 피기 이전 시대의 화가지만 나는 지오토의 그림이 회화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작품들 사이에서 거론될 만한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니 이런 여행 하나쯤 세상 어딘가에는 있을 법도 하고 또 있어야 하지 않은가?’ 이것이 나의 불만이고 의문이었다.


지오토는 평가절하 된 예술가는 아니다. 당대에도 그랬고 현대에 와서도 그렇다. 대부분의 미술사가들은 그의 그림을 회화 역사의 시작점으로 꼽는다. 서점에서 서양회화사 책을 펼치면 한두 페이지 안에 지오토의 이름을 보게 될 것이다. 회화 예술의 발상지인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은 시대 순으로 작품을 전시하고 있는데 그 첫 번째 관의 중앙에 지오토의 <옥좌 위의 성모자>가 놓여 있다. 압도적인 아우라를 뿜어내는 그 한 점의 그림으로부터 서양회화의 역사가 출발한다는 상징적인 배치다. 그는 살아있을 때 유럽의 어떤 예술가보다 높은 명성을 누린 작가였지만 그것은 그가 현대에 와서 갖게 될 지위에 비하면 한결 소박한 것이었다.  

                          

지오토 <옥좌 위의 성모자> Virgin and Child Enthroned (1310, 우피지 미술관)  

- 옥좌 위의 성모는 미술사의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가톨릭의 전통 하에서 회화의 패러다임이 바뀌는 순간이었으며 예술이 신의 것에서 인간의 손으로 넘어온 순간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가 여전히 저평가 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우선 대중적 인지도에서 그렇다. 오늘날 이탈리아를 여행하는 사람들에게 그의 작품을 보는 것은 첫 번째 혹은 두 번째 선택지도 아니다. 그나마 그가 잊히지 않은 것은 피렌체 두오모 성당 옆에 부속물처럼 서 있는 ‘지오토의 종탑’ 덕분이다. 사람들은 어떤 미학적 즐거움 없이 그저 탁 트인 전망을 감상하기 위해 숨차게 탑을 오른다. 누군가는 계단을 오르다 무릎이 저려올 때 그의 이름을 부르며 욕을 할지도 모르겠다. 지오토는 저 유명한 르네상스의 스타들에 비하면 무명에 가까우며 그의 이름이 잠시 반짝하는 순간은 ‘르네상스의 출발점’이라는 수식이 붙을 때뿐이다.

  

이것은 부당한 대우다. 르네상스가 빛이고 중세가 어둠이라는 해석처럼 부당하다. 미술사에서 그의 위상을 생각하면 더 많은 대중이 그를 알고 더 자주 그의 작품을 볼 기회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중세의 다른 모든 문화, 예술과 마찬가지로 지오토의 작품은 르네상스라는 빛에 가려 대중의 관심 밖에 밀려나 있다. 하지만 역사가들의 말대로 중세는 암흑이 아니었고 바로 그런 중세로부터 르네상스라는 꽃이 피어났다. 13세기 말, 단지 세상을 보이는 대로 그리고 싶었던 한 청년의 시도가 회화의 역사를 바꿔놓았다. 그는 대중의 잠재의식에 꿈틀대던 것을 그림에 담아냈고 열렬한 지지를 받았으며 이후 명백해졌듯 그것이 앞으로 인간이 향하게 될 길이었다.                            

(지오토, 십자가상 Crucifix 1290,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

- 이십 대 초반의 지오토가 그린 것으로 전에 볼 수 없는 사실적인 방식으로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를 표현하고 있다. 보이는 대로 있는 그대로 그리고 싶었던 청년 지오토의 열망을 마주하게 된다.     


그는 단지 길을 제시한 것만이 아니었다. 지오토의 그림에는 예술가가 갖춰야 하는 중요한 내적 자질들, 화가로서의 재주는 물론이고 분방한 상상력, 관습을 뛰어넘는 실험성, 기술적 완벽에의 추구, 무엇보다 인간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담겨 있었다. 그래서 지오토를 설명할 때 자주 인용되는 ‘당시 지오토의 이름은 최고의 그림, 화가와 동의어였다.’라는 말은 그의 명성에 대한 것이면서 동시에 그가 사람들에게 예술가에 대한 하나의 전범이자, 그때까지 정립되지 않았던 내적 자질의 기준을 보여준 인물로 인식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지오토의 후계자는 당대의 수많은 제자들, 추종자들, 소위 지오토주의자들이 아니라 15세기 초에 혜성처럼 등장한 젊은 마사초였다. 그는 원근법과 명암법을 도입하며 르네상스로의 도약을 이끈 화가로 알려져 있다. 평론가들이 그를 지오토의 후계자로 지목한 것은 분명 그림의 유사성 때문은 아니다. 지오토가 죽은 뒤에도 그의 화풍은 가장 완벽한 성화의 표본으로 수 십 년 동안 유럽을 지배했고 지오토주의자들은 복제품처럼 유사한 그림들을 제작했다. 하지만 시대는 변하고 있었고 다가올 시대의 압력도 커져갔다. 화가들에게 지오토는 넘어서야 할 산이면서 동시에 이어받아야 할 전통이었다. 이 수수께끼 같은 문제를 풀어낸 인물이 마사초였고 이후 르네상스까지는 한 걸음이었다.             

                  

- 왼쪽은 지오토의 제자들 중 가장 유명한 Taddeo Gaddi의 그림(왼쪽)이고 오른쪽은 스크로베니 예배당에 그려진 지오토의 작품이다. 구도와 인물 묘사 등 모든 면에서 유사해서 마치 한 작가의 작품처럼 느껴진다.                            

<아카데미아 미술관 3층 전시관>  

- 피렌체 아카데미아 미술관 3층에는 1370~1430년까지의 피렌체 지역의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출구 쪽 계단을 올라가야 찾을 수 있다. ‘지오토주의자들’이라고 이름 붙여도 좋을 만큼 이곳의 그림들은 지오토의 스타일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마사초는 화풍에 있어서 지오토를 극복했고 정신에 있어서 지오토를 계승했다. 스타일을 답습하지 않고 지오토가 갖고 있던 열망, 보이는 대로 그리고 이야기하고 싶었던 바람을 기술적으로 구체화하고 ‘지오토처럼’ 논쟁적인 작품을 내놓아 세상을 놀라게 했다는 점에서 마사초는 지오토의 예술을 부활시킨 진정한 후계자였다. 지오토의 제자들이 알았다면 통곡을 했을 일이다. 다시 말해 지오토가 꿈꾸던 회화가 구현되기 위해선 백 년의 시간과 함께 마사초라는 새로운 세대의 천재가 필요했던 것이다.


(토마소 디 조반니 마사초, 성전세 1426년경, 산타 마리아 델 카르미네 성당)

- 이 벽화는 마치 지오토가 15세기에 환생해서 완성한 그림처럼 보인다. 배경의 자연과 건물의 묘사, 인물의 표정, 돌아서 있는 사내 등 곳곳에서 지오토의 영향을 느낄 수 있다. 마사초가 지오토의 후계자로 불리는 것은 그가 지오토의 미술을 15세기의 방식으로 정확히 재해석했기 때문이다.       

                

(마사초, 낙원에서의 추방 1425, 산타 마리아 델 카르미네 성당)

- 이 최초의 누드화는 아담과 이브의 초라한 몸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아담은 자신의 죄를 가릴 수 없고 고개조차 들 수 없는 죄인이었다. 낙원에서의 추방은 당시의 사회적 기준에서 인간의 알몸이 그려질 수 있는 유일한 주제였던 것이다. 마사초는 성화를 통해 보여줘야 하고 말해야 하는 것에 있어서 타협하지 않았다. 이러한 과감성과 혁신적인 기질은 지오토가 <황금문에서의 만남>에서 보여준 파격을 떠오르게 한다.               

            

(지오토, 황금문에서의 만남 1306, 스크로베니 예배당)

- 마리아의 부모인 요아킴과 안나가 예루살렘의 황금문 앞에서 재회하며 입을 맞추고 있다. 성화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지오토의 방식은 지극히 인간적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당시 기준에서 파격적이었다.      


지오토는 인지도뿐만 아니라 작품의 미적 가치에 있어서도 저평가되어 있다. 많은 전문가들이 그의 작품이 갖는 상징성과 역사적 가치에 대해 칭송하면서도 그것의 미적 가치에 대한 언급은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다. 지오토의 그림은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르네상스 시대의 작품들에 비하면 너무 단순하고 심심하게 느껴진다. 보티첼리의 그림과 지오토의 성 프란체스코 성당 벽화 중 하나를 놓고 비교하면 어느 쪽이 더 세련되고 아름답게 느껴질지는 명확하다. 시각적으로 단번에 느껴지는 기술적 차이가 있다. 시대적 한계는 곧 인간의 한계이기도 하다.


그러나 예술은 단지 기술의 문제가 아니며 어떤 예술가들은 그런 한계를 탁월한 재능과 지성으로 돌파해버린다. 나는 지오토가 남긴 가장 탁월한 그림들, 스크로베니 예배당의 <비탄>이나 <유다의 키스>, <옥좌 위의 성모> 등의 작품은 같은 주제를 그린 어느 시대의 어떤 작품보다도 위대하다고 생각한다. 미술사적 가치는 논외로 하고서도 말이다. 시대의 한계를 넘어서 가치를 발하는 위대한 작품들은, 셰익스피어의 대본처럼, 특별한 재능에 의해 단 한 번만 이루어지는 재현되지도 복제되지도 않는 사건이다. 그럴 때 그 작품은 등수를 논할 수 있는 선을 넘어서 단독의 지위를 갖는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조각상과 렘브란트의 야경꾼 중 무엇이 더 뛰어나다고 말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이러한 기적은 시대 상황(이념)과 물질적 토대, 예술가의 끈질긴 노력, 그리고 재능이 분석할 수 없는 방식으로 결합하여 일어난다. 지오토는 적어도 그런 수준의 작품을 세상에 남긴 작가다.                            


(지오토, 비탄 Lamentation 1304~1306, 스크로베니 예배당)

- 비탄은 지오토의 그림 중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 삼십 대 후반, 화가로서 원숙기에 접어든 지오토의 역량을 볼 수 있다. 돌아앉은 인물, 천사의 움직임, 인물의 감정 표현 등 지오토 특유의 기법과 섬세하게 고려된 구도, 인물의 배치가 어우러져 감상자는 실제 그 순간의 장소에 있는 듯 격렬한 정서적 울림을 느끼게 된다.


지오토는 회화가 나아갈 길을 제시하고 이후 예술가의 기준이 된 천재였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같은 거장을 비롯해서 당대에 그림을 그리려는 누구라도 파도바의 스크로베니 예배당에 가보지 않을 수 없었다. 필수 견학 코스였다. 현대의 우리 역시, 과장이 아니라, 지오토를 거치지 않고 르네상스나 서양 회화에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이제 조금은 지오토라는 화가에 대한 호기심이 생기지 않는가?


지오토 투어를 만들겠다고 용기를 낸 데에는 그의 작품이 전시된 각 지역과 장소의 특별함도 한 몫 했다. 가톨릭의 성지 아시시, 르네상스의 도시 피렌체, 그리고 파도바로 이어지는 단출하지만 풍요로운 여정. 지오토 예술의 정수인 스크로베니 예배당은 서양회화사에서 가장 중요한 유적지 중 하나일 것이다. 이렇게 이탈리아 중부의 세 도시를 여행하는 것으로 위대한 중세 화가의 주요 작품들을 모두 감상할 수 있다.               


(파도바 스크로베니 예배당, Scrovegni Chapel)

- 스크로베니 예배당은 건축가이기도 했던 지오토가 직접 설계한, 오직 그의 벽화만을 그리기 위해 제작된 공간이다. 미술사에서 한 화가가 이런 규모의 단일한 공간에 자신의 예술세계를 펼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경우는 없었다. 미술사가들은 스크로베니 예배당의 예술적 가치를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성당 벽화에 비견되는 것으로 평가한다.     


투어를 기획하고 이렇게 글을 쓰는 건 여행을 통해 지오토의 열렬한 팬이 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그의 그림을 보며 행복했던 것처럼 더 많은 사람이 그런 기회를 가졌으면 좋겠다. 이탈리아 여행 계획을 세울 때 파도바라는 도시의 작은 예배당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고, 로마에서의 일정 중 하루는 아시시에 가볼 마음이 생긴다면, 그곳에서 지오토의 작품이나 흔적을 접할 때 그냥 지나치지 않고 조금이나마 관심을 갖게 된다면 그것으로 내 임무는 다한 셈이다. 우리가 고전이라 부르는 작품들이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 것은 소수의 열광적인 지지자들이 끊임없이 그것에 대해 떠들기 때문이다. 이번은 내가 화자였다. 나보다 더 시끄럽게 이 중세 화가에 대해 떠들어댈 누군가를 만나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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