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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싱지원 May 27. 2021

몇 번의 가면 바꿔쓰기

기쁘지만 기쁘지 않은 입사 2주년을 맞아

 달간 죽어있던 동기 단톡방이 살아났다. 벌써 입사한  2년이 됐다, 그간 고생 많았고 축하한다는 자축이 몇차례 이어졌다. 2년은 내게 남다른 의미다.  번의 이직을 했지만 지금껏 2년을 채운 회사가 없었다.  변덕이나 부족한 끈기 탓이 아니었다.  좋게  좋은 곳으로 점프할 기회가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만약  운이 내게 허락되지 않았다면 2년은 꿈도   근속 연수였다. 그래서 기뻤느냐, 딱히 그렇지도 않았다.   

   

방송 업계. 특히 아나운서 업계에서 전설적으로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3년 전쯤 지인에게 건너들은 이야기다. 모 방송국에서 일하는 아나운서가 계약직으로 입사했는데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진행해 이겼다는 것. 들은 바에 따르면, 입사 후 3개월 간의 수습기간이 있었는데, 회사는 이 기간을 고려하지 않고 해당 아나운서를 2년 넘게 사용했다. 이에 아나운서는 3개월도 일한 기간이 맞고, 2년 넘게 본인을 사용했으니 법적으로 정규직으로 전환돼야 마땅하다는 논지를 펼친 것으로 전해졌다. 결국 법원이 아나운서의 손을 들어줬다. 내가 이야기를 들은 당시를 기준으로 그가 3년 넘게 회사를 다니고 있었는데, 지금도 근무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업계에서 일종의 영웅담처럼 전해진 이야기다.    


현행법상 비정규직 근로자가 2년을 근무하면 사업주는 정규직으로 전환해야 한다. 2년이라는 시간 동안 비정규직 노동자의 직업적 안정성을 보장해주자는 취지로 2007년 7월부터 시행됐다. 그러나 법의 취지가 무색하게, 현실에서는 2년이 되면 계약해지가 당연시됐다. 드라마 <미생>의 주인공 장그래가 실적을 내고도 고졸과 2년의 벽을 넘지 못한 것처럼 수많은 청년들이 벽 앞에서 좌절하고 있다. 아마도 대기업 정기 공채나 공무원 시험에 매달리는 청년들이 많은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추측해본다. 일반 기업 취직은 고려하지 않았던 나는 2년 동안 회사에 소속돼 복지를 누리기보다 건당 페이를 받는 프리랜서 계약이 근속 측면에서는 더 낫지 않겠냐는 얘기를 동료들과 심심찮게 나누기도 했다.     


어제 뉴스에서 지난 3월 말 일어난 고성의 한 조선업체의 산재 사망사고를 보도했다. 끼임, 추락 같은 후진국형 사고의 원인이 바로 다단계 하청 구조에 있다는 게 기사의 골자였다. 또 며칠 전에는 경상대병원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단식 농성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전했다. 종종, 뉴스를 마치고 집에 가는 길에 어쩐지 마음 한구석이 편치 않다. 늘 끊임없이 사회의 어두운 면과 구린 구석을 수면 위로 드러내고 있는데 정작 그 소식이 사람들에게 전달되기까지의 과정이 그다지 공정하다거나 바람직하지는 않은 것 같아서다.     


한 프로그램이 만들어지기 위해 투입되는 스태프들의 구성을 보면 과장 조금 보태서 절반 정도가 비정규직이다. 작가, 오디오맨, FD, 외주 촬영감독. 그 밖에도 스튜디오에는 없지만 관용 차량을 운전하는 운전기사, 직원들 출근 전에 깨끗한 환경을 만드는 청소노동자, 1층 로비를 지키는 시큐리티. 언급하지 않았지만 그림자 노동을 하는 분들이 더 많이 계실지도 모르겠다.    


얼마 전 출근하는 회사 엘리베이터에서 2층을 담당하시는 청소노동자를 만났다. 안 그래도 조금 낯설다 생각했는데, 새로 왔다며, 앞으로 잘 부탁한다는 인사를 내게 건네셨다. 그전에 계시던 분은 어디 가셨냐고 여쭸더니, 계약 기간이 끝나 퇴사를 하셨단다. 계약 기간에 대해 잘은 모르지만, 만약 2년이라면 비슷한 때 나와 함께 입사를 하셨겠지. 잠깐 생각이 스쳤다.


2년. 짧은 시간이었지만 벌써 몇 차례, 사람을 새로 맞이하고 또 떠나보냈다. 방송에서는 늘 비정규직의 열악한 노동환경에 대해 목소리를 내며 사람들의 연대를 촉구하고 함께 분노하면서, 같이 일하는 동료들이 바뀌는 것에는 무색한 게 큰 조직의 일개 구성원으로서는 당연한 일인가 싶다가, 그게 당연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 생각이 꼬리를 문다. 그러다 다시 방송할 시간이 되어 투사로 돌변했다가, 찜찜한 마음을 안고 집으로 향한다. 2년 동안 가면을 몇 번 바꿔 썼는지 모르겠다. 기쁘지만 기쁘지 않은 입사 2주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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