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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글 대디로 산다는 것(307)

할머니의 수수부꾸미

by 시우
Koreansing-3350152881-09_53_34-1.png AI로 생성된 이미지입니다




어린 시절 나는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아버지는 지방으로 내려가 일을 하셔서, 어린 나는 할머니에게 맡겨저 부천에 있는(내 기억이 맞다면) 주택 2층 방에서 할머니 품에 안겨 자랐다


집 주변에는 놀이터도, 또래 친구도 거의 없었다 매일 비슷한 하루였지만 가끔 할머니가 내 손을 꼭 잡고 시장에 데려가실 때면 세상이 환하게 열리는 것 같았다


시장은 늘 북적였다 생선 가게에서는 바다내음이 진동했고 신기한 것들이 넘쳐났다 할머니는 다른 건 잘 안 사셨지만 꼭 빨간 수수를 챙기셨다 그 수수를 집으로 가져오면 볕 좋은 옥상에 펼쳐놓고 바삭하게 말리셨다 마른 수수 알갱이를 절구에 넣고 찧을 때면 텅텅 울리는 소리가 집 안에 퍼졌다


그 소리를 들으며 나는 부엌 문턱에 걸터앉아 구경을 했다 할머니의 굵은 팔뚝 근육이 움직이고 절구 속에서 수수 알갱이가 가루로 변해가는 모습이 마치 마술 같았다


할머니는 그것을 해주실 때 ‘수수떡’이라고 부르셨다 하지만 훗날 그것이 ‘수수부꾸미’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원래는 속에 달콤한 팥소를 넣어 만드는 음식이라는 것도 나중에서야 알았다


할머니는 팥 대신 따끈하게 지져낸 부꾸미 위에 노란 황설탕을 수북이 뿌려주셨다 그 노란 설탕이 기름에 살짝 녹아 반짝이던 모습 그리고 한입 베어 물었을 때 입 안에 퍼지던 달콤함과 고소함은 지금도 생생하다


세월이 흐르면서, 할머니는 치매로 많은 기억을 잃어버리셨다 하지만 아주 가끔 기억이 또렷하게 돌아오는 날이면 내 손을 꼭 잡고 말씀하셨다



“우리 손주 수수떡 해줘야 하는데 그거 그렇게 잘 먹었는데.”



그 목소리에는 마치 그 시절 부엌의 온기와 기름 냄새가 스며 있는 듯했다 그 맛이 너무 그리워 얼마 전에 나는 인터넷으로 국내산 100% 수수가루를 샀다



“뭔가 섞여 있으면 반죽이 제대로 안 돼.”



예전에 할머니가 하셨던 말이 떠올랐다 미지근한 물로 가루를 조심스레 풀어가며 반죽을 했다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반죽을 손바닥만 한 크기로 올린다 지글지글 기름이 튀는 소리 고소한 냄새가 부엌에 퍼진다 할머니처럼 큼직하고 얇게 만들고 싶었지만 손재주는 따라가지 못했다 그래도 부꾸미가 노릇하게 익어가는 모습을 보며 혼자 미소를 지었다


잘 익은 부꾸미를 접시에 올리고 설탕을 솔솔 뿌렸다 다시 부꾸미, 그리고 설탕 고소함과 달콤함이 겹겹이 쌓여 갔다


그때 부엌으로 아이가 다가왔다



“아빠, 이게 뭐예요?”


“수수떡 아니, 수수부꾸미야. 아빠 할머니가 해주셨던 건데, 공주도 한번 먹어보라고. 아빠는 진짜 맛있게 먹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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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럭저럭 만들긴했는데.. 공주 입맛에 안맞을 줄이야..



남은 반죽을 다 부쳐 아이와 함께 거실에 앉았다 나는 설탕이 뿌려진 부꾸미를 아이 앞에 놓아주었다 한 입 먹은 아이가 잠시 씹더니 얼굴을 찡그린다



“에… 퉤.”



아무래도 공주의 입맛에는 맞지 않는 모양이다 웃음이 터져 나와


“괜찮아, 아빠가 다 먹을게. 입에 있는 것만 삼켜.”


라고 말했다.


아이는 옆에 앉아 내가 먹는 걸 구경했다 나는 부꾸미를 한입 베어 물고 기름의 고소함과 설탕의 달콤함 속에서 오래전 부엌의 풍경과 할머니의 웃음을 떠올렸다


나름 요리를 한다고 자부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때의 맛은 나지 않는다 아마도 그 맛의 비밀은 레시피가 아니라 할머니의 손길과 마음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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