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작보다 값지고 눈부신 미완의 작업물.
예술가는 완성된 작품으로 평가받지만 정작 예술가를 완성시키는 건 수십 번 고쳐 쓴 습작이다. 뭐든 새롭게 시작하기 좋은 3월, 새로운 출발선 앞에서 막막한 이들에게 영감과 용기를 줄 만한 동시대 창작자들의 습작을 엮었다. 걸작보다 값지고 눈부신 미완의 작업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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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만드는 시간만큼은 성실했다는 거예요. 그것만으로도 가치가 있길 바랐죠. - @dahye_jeong__
말총이라는 희귀 소재로 공예를 하는 정다혜 작가는 빗살무늬 토기를 본뜬 입체 작품 ‘성실의 시간’으로 ‘2022 로에베 재단 공예상’을 받으며 이름을 알렸죠. 최근에는 ‘메종&오브제 파리 2025’ 라이징 탤런트 어워드에서 수상하기도 했어요. 말총의 어떤 점에 매력을 느꼈을까요?
말총은 ‘평면’이 아닌 ‘입체’로 표현되는 게 매력적이에요. 말총은 나무틀에 대고 엮었다가 틀을 빼도 신기하게 스스로 일어서 있거든요. 마침 제가 오랫동안 진로를 정하지 못해 고민하던 때 말총이라는 작은 소재도 저렇게 독립적인데 나라고 못할까 싶었던 거죠. 그래서 제가 처음 만든 작품들을 보면 말총이 어떤 지지대의 도움도 없이 혼자 서 있어요. 그런데 요즘은 제가 솔루나아트 그룹과 함께 일하게 되면서 저뿐 아니라 자연스레 제 작품들도 다른 것들에 의지하기 시작했죠. 요즘 제 작품을 보면 말총끼리 서로 기대 있거나 실 같은 다른 소재에 들려 의지하는 것들도 있죠.
전통 기법인 말총공예를 계승하는 동시에 작가만의 방식으로 현대적으로 작품을 풀어내고 있죠. 작가의 작품세계는 어떤 습작의 과정을 거쳤나요?
말총공예는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전통이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정해진 패턴이 있어요. 저 또한 그 범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채로 저만의 엄격한 기준 아래에서 작업을 이어왔거든요. 그래서 늘 비슷한 도안의 패턴만 작업했고요. 그런데 우연히 관람하게 된 삼국시대의 상형토기 전시에서 거북이나 오리, 토끼를 형상화한 토기들이 신선하게 다가온 거 있죠. 그 옛날 사람들도 상형토기를 재미있게 디자인하며 미를 추구했구나 싶었어요. 그 이후로 저 역시 틀을 깨보자고 마음먹고 헤엄치는 거북이 디자인 패턴을 만들었죠. 돌이켜보면 그게 지금 저란 작가의 스타일을 완성한 첫 습작이었던 것 같아요.
작가가 전달해준 습작을 보니 정말 섬세함이 필요한 작업인 것 같아요. 작업 과정도 궁금해요.
작품의 형태와 크기, 말총 색상, 패턴을 구상한 뒤 스케치를 해요. 말총이 워낙 흔치 않은 재료다 보니 국내에서는 제주의 말 농장에 가거나 악기점을 통해서만 구할 수 있어요. 현악기에 사용되는 활의 주 재료도 말총이거든요. 재료를 구하고 나서는 말총을 엮을 나무틀에 일정한 간격의 선을 그려요. 말총을 바늘에 꿴 다음 선을 따라 고리를 묶으며 패턴을 완성해나가죠.
섬세한 과정만큼 보내준 습작의 종류가 정말 다양하더라고요.
손으로 그린 패턴 스케치도 있고, 디지털로 좀더 정교하게 완성한 패턴 도안도 있고요. 그걸 말총으로 사각블록에 테스트하듯 엮은 실물 도안과 미처 완성되지 못한 중간 단계의 말총 작업물도 있죠. 그리고 작업 일지도 쓰거든요. 원래는 작업 납품량이나 기한을 맞추기 위해 쓰던 것인데 언젠가부터 작업하면서 느낀 제 개인적인 감정을 쓰거나 꿈 내용을 기록하기도 했어요. 다른 전시에서 본 어느 작가의 작업일지가 흥미롭더라고요. 이렇듯 성실하게 작업일지를 써야 거장이 될 수 있나 싶기도 하고. 그렇게 작업일지를 쓰고 습작들을 모으기 시작했는데 거기서 생각지 못했던 아이디어를 얻기도 하고 그것들이 새로운 작품의 출발점이 되기도 해요.
이번 특집은 새로운 시작을 앞두고 막막한 창작자들에게 영감과 용기를 주기 위해 기획됐어요. 작가에게도 그런 시간이 있었나요?
물론이죠. 로에베에 출품할 당시 저는 제 작품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어요. 내가 만드는 것이 과연 예술품으로서 가치가 있을까? 하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죠. 어떨 땐 제 작품에 자신이 있었다가도 어떨 땐 다른 작품에 비해 보잘것없이 느껴졌거든요. 출품작을 작업하는 과정 동안 제가 내린 작업의 의미는 이걸 만드는 시간만큼은 성실했다는 거예요. 모두에게 인정받지 못하더라도 이걸 만든 시간에 거짓된 노력은 조금도 없었으니까요. 그렇게 찾은 의미를 내 작품의 제목으로 붙였어요. 그것만으로도 가치가 있길 바랐죠. 그게 ‘성실의 시간’이에요.
작가의 습작들을 보니 로에베 재단 수상작뿐 아니라 모든 작업 과정이 ‘성실의 시간’으로 느껴지더군요. 그토록 성실한 과정과 작품을 통해 작가는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싶나요?
급변하는 세상 속에서 아직은 몇백 시간씩 앉아 말총을 한 땀 한 땀 땋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요. 저도 언제까지 제가 말총 공예를 할 수 있을지 모르겠거든요. 많은 예술가의 역할을 언젠간 인공지능이 대신할 수도 있는 거잖아요. 이렇게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에 한 사람이라도 시대에 뒤처지는 작업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위로가 되었으면 해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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