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즈니+의 오리지널 시리즈 <하이퍼나이프> 연출한 감독 김정현의 습작.
예술가는 완성된 작품으로 평가받지만 정작 예술가를 완성시키는 건 수십 번 고쳐 쓴 습작이다. 뭐든 새롭게 시작하기 좋은 3월, 새로운 출발선 앞에서 막막한 이들에게 영감과 용기를 줄 만한 동시대 창작자들의 습작을 엮었다. 걸작보다 값지고 눈부신 미완의 작업물. 이번엔 디즈니+의 오리지널 시리즈 <하이퍼나이프> 연출한 감독 김정현의 습작을 만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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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출가의 역할은 방향을 제시하는 거예요. 그때 충분한 습작 과정이 빛을 발휘하죠.
대본을 영상으로 구현하는 과정에서 본인이 가진 그림을 그려가는 것이 연출자의 일인 것 같아요. 보통 연출을 맡기로 결정한 후엔 어떤 작업부터 시작하나요?
평소에는 책이나 영화, 드라마 등등 접할 수 있는 다양한 종류의 콘텐츠를 보는 편인데, 어떤 작품을 연출하기로 결정된 이후엔 모든 것을 일시 정지시켜요. 그리고 연출할 작품의 대본을 계속해서 읽는 것부터 시작하죠. 어떻게 찍을까? 이런 세세한 고민을 하면서 읽는 건 아니고 말 그대로 무작정 읽어요. 그런데 이런 과정을 거치다 보면 어느 순간 막연했던 그림들이 뚜렷해질 때가 오거든요? 글자로만 존재했던 것들인데 ‘이렇게 찍으면 되겠다’, ‘이런 식으로 배우들이 움직이면 재미있지 않을까?’ 하는 느낌으로요.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것들을 대본 위에 메모하며 점점 구체화시키는 거죠.
그런 작업을 시각화하고 여러 스태프와 공유하기 위한 게 콘티 작업이잖아요. 드라마 콘티 작업은 보통 어떻게 진행되나요?
드라마의 경우, 영화처럼 따로 콘티 작업을 세세하게 진행하지는 않아요. 준비 기간이 비교적 짧기도 하고, 예산 문제도 있고요. 예전에 작품을 연출할 땐 스태프, 배우들과 소통하기 위한 간략한 콘티를 직접 그리기도 했어요. 가장 최근에 작업했던 디즈니+의 오리지널 시리즈 <하이퍼나이프>는 규모가 큰 프로젝트이기도 했고, 메디컬 스릴러 장르 특성상 일상적이지 않은 공간과 상황이 등장하다 보니 명확한 그림을 공유하기 위해 일부 장면에 콘티 작업을 진행했어요. 저, 촬영 감독님, 조명 감독님, 콘티 작가님, 스크립터 이렇게 모여서 의견을 나누면 콘티 작가가 현장에서 간략하게 스케치를 하고, 그걸 가지고 추가 작업을 진행해 최종 콘티가 완성되는 거죠. 그 뒤에 저에게 콘티가 오면 또다시 습작의 시간이 시작돼요. 계속 보다 보면 이렇게 하는 게 더 좋지 않을까, 저렇게 하면 더 좋지 않을까 고민하면서 콘티 위에 저의 코멘트를 덧붙여요. 원래 콘티상 종이가 바닥에 깔려 있는 장면을 하늘에서 종이가 비처럼 내리게 바꾸기도 하고요. 최선의 것을 찾아가려는 작업인 거죠.
드라마의 배경이 되는 장소를 골라내는 것도 쉽지 않은 작업일 것 같아요.
모든 연출자가 그렇겠지만 다른 작품에서 보여지지 않았던 새로운 공간을 발견해서 보여주고 싶은 욕망이 있어요. 일상적인 장소가 배경이 되는 작품은 그래도 난이도가 낮은 편인데, 스릴러나 장르물의 경우 비일상적인 장소들을 보여주어야 하니 더 고민이 되죠. <하이퍼나이프>의 경우 여러 명의 제작부 인원들이 대본을 보고 가장 적합할 것 같은 장소를 찾아 전국을 돌아다녔어요. 그중에 회의를 거쳐 추려진 장소를 직접 눈으로 보고 결정해요. 극 흐름상 흔히 접할 수 없는 다양한 장소들이 등장하는데, 신의 목적에 충실한 장소를 골라내는 작업을 했어요. 특유의 음산한 분위기를 내면서 다른 작품에서 볼 수 없었던 앵글을 담아낼 수 있는 공간으로요.
그럼 개인적으로 가장 치열한 습작을 거친 작품은 무엇인가요?
아무래도 이번에 작업한 <하이퍼나이프>인 것 같아요. 왜 그렇게까지 고민하고 수정했는지 생각해보면, 대본 자체가 기존 드라마의 틀에서 벗어나는 이야기여서 그랬던 것 같아요. 보통 스승과 제자와의 갈등을 다루는 작품의 경우, 두 사람이 어떤 계기로 갈등을 해결하는지를 보여주는데, 저희 작품은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그런 갈등이 끝까지 이어져요. 갈등이 고조되면서 나오는 과격한 장면들을 시청자들이 납득할 수 있게 만들다 보니 고민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또 작품이 불법수술이란 실험적인 소재를 다루는 만큼 장면들을 사실감 있고 입체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장치들을 집요하게 고민했죠.
어떤 장치들을 고민했어요?
저희 작품은 가능한 한 드라마적 허용을 줄이고 사실적으로 재현하려고 했거든요. 병원에서 수술하는 설경구 배우의 역할과 음지에서 불법수술을 하는 박은빈 배우의 캐릭터 대비를 주기 위해 병원에서의 수술 장면은 불을 켜고 촬영했지만, 불법 수술 촬영에는 불을 끄고 촬영했어요. 또한 불법 수술이라고 해도 수술장비나 과정 등 디테일한 부분을 최대한 현실 고증을 거쳤죠. 그런 현실적인 상황을 최대한 반영하려고 하다 보니 고민이 많았어요.
촬영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후반 편집 작업 또한 중요한 과정이잖아요.
개인적으로 연출자는 덜어내는 직업인 것 같이요. 전체 촬영본을 점점 쳐내면서 나중에는 프레임 단위로 고민에 빠지거든요. 배우들의 연기도 편집 과정에서 프레임 단위로 보다 보면 당시 현장에선 보이지 않았던 배우의 의도도 보이고요. 장면을 편집해서 이어보고 또 지워보고, 음악을 입혔다가 또 빼기도 하고 그 과정에서는 작품이 공개되는 플랫폼의 특성도 고려해야 해요. OTT 플랫폼 특성상 편성 시간이 정해져 있지는 않지만, 요즘 시청자는 빠른 호흡을 선호해서 삭제해야 했던 장면도 많고요. 이런 몇 가지 지점들이 저를 무한 습작의 과정에 빠뜨린 것 같아요.(웃음)
연출자에게 습작의 과정은 왜 중요한 걸까요?
창작에는 정답이 없기 때문에 더욱 중요한 것 같아요. 사실 연출자는 카메라를 든다든가 직접 화면 안에 등장한다든가 현장에 물리적으로 개입하지는 않거든요? 물론 전반적인 그림과 보여주고 싶은 방향성의 키를 쥐고 있지만, 배우와 촬영 감독님, 조명 감독님, 음악 감독님을 포함해 스태프분들이 없으면 완성할 수 없죠. 그래서 그들과의 소통이 중요해요. 연출가의 역할은 명확한 방향을 제시하는 거예요. 그때 충분한 습작 과정이 빛을 발휘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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