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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포문 (2)

by 싱숭생숭

해결 방안에 대해 찾아보다가,

에피스테믹 겸손이라는 단어를 우연히 알게 되었다.

이에 대해 검색을 하며 찾아낸 하나의 글에서 비슷한 결론을 내린 것을 보고 글을 쓰게 되었으며,

오래 붙잡고만 있었던 생각을 조금은 다른 각도로 비춰보고 싶었다.

그래서 해결 방안에 대해도 곁눈질을 해본다.

다만 서둘러 단정짓지 않겠다는 전제를 달아두려고 한다.

먼저 Antifragile이라는 단어를 논하면 무엇이 먼저 떠오르는가?

나는 군 복무 중에 들었던 르세라핌의 노래, ANTIFRAGILE이 떠오른다.

그 때는 단순히 영어 단어의 뜻을 검색하고,

가볍게 흘러듣기만 했다.

이 안티프래질(antifragile)에 대해 파헤쳐보면,

흔들리고, 깨질 법한 충격과 불확실성 속에서 오히려 더 단단해지는 성질을 뜻한다.

회복보다 한 발 더 나아가,

스트레스 자체를 연료로 삼아 성장하는 태도라고들 한다.

면역계가 작은 노출을 통해 다음 감염에 더 잘 대응하듯,

적절한 강도의 혼란은 삶을 파괴만 하는 게 아니라 체력을 키우는 저항처럼 작동할 수 있다는 비유가 특히 와 닿았다.

운동이 일시적 손상을 전제로 근육을 키우는 원리와 닮아 있지 않을까.

최근에 운동을 통해 근성장이 일어나서 그런지,

마치 근육이 운동 중 미세한 손상을 입은 뒤,

휴식과 회복을 거치며 더 크게 성장하는 원리와 같다.

상처를 입는 순간에는 고통스럽지만,

그 과정 자체가 다시 설 힘을 길러주는 밑거름이 된다는 것이다.

물론 운동을 하지 않는 이들에게는 공감이 안될 수 있기에 다시 한 번 말해보려고 한다.

자신만의 과거 경험을 되살려본다면,

특정 상황에서 위기 감지 능력이 떠올랐던 순간이 있을 것이다.

바늘에 찔려본 경험이 고슴도치의 가시에 찔리면 아플것 같다는 생각.

시험 공부를 위해 밤을 새던 기억,

소주 종류마다의 미묘한 맛의 차이.

사회생활을 위해 스스로의 감정을 숨기는게 최선이라고 여겼던 순간들.

그로 인해 주로 긍정적인 효과를 기대하며 초점을 맞춰왔을 것이다.

하지만 그 내막을 자세히 들여다 본다면,

바늘이 찔린 순간은 아팠을 것이고,

밤을 새던 기억은 컨디션이 좋지 않았을 것이고

취향이 맞지 않는 맛없는 술을 맛 본 기억들과

가면을 쓰고 행동하는,

겉과 속이 다른 스스로에 대한 괴리감까지.

모두들 과거의 경험에 비롯되어 내린 결론들이 저마다 다르지 않을까.

생각해보면 나의 경우도 앞서 말한 것들을 비롯하여

내가 피곤해했던 뉴스의 홍수,

알고리즘의 자극,

타인의 시선에 대한 경계도 전부 없앨 수 없는 파도라는 것이다.

마치 자연재해처럼.

왜 우린 자연재해에는 관대하면서도 스스로에 대해서는 관대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언제든 덮쳐오는 파도를 완벽히 없애려 애쓰기보다,

작은 물살부터 몸을 적시며 흔들림을 견디는 법을 배우는 쪽이 맞는게 아닐까.

불확실성을 기어이 통제하려는 강박 대신,

불확실성 속에서 다시 일어서는 습관.

그게 내가 붙들 수 있는 훈련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도 거대한 파도 속 감정이 소용돌이치고 있는 상황이 아닐까.

여기서 유의하라고 하는 경계선도 하나 있다.

과도한 최적화.

특정 조건에만 맞춰 완벽하게 조정된 구조는,

조건이 조금만 변해도 쉽게 부서진다.

늘 같은 해법,

같은 자세,

같은 결로만 반응하는 나의 사고 방식도 사실은 취약할 수 있다.

그래서 나 스스로도 단정짓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잘 돌아가는 듯 보이는 루틴이 오히려 변화에 둔감해지게 만들고,

작은 돌부리에 크게 넘어지게 만든다.

그러니 ‘늘 이랬으니 앞으로도 이렇게’라는 확신이 들 때일수록,

일부러라도 여지를 남기는 게 안전할지 모른다.

느슨함의 여유가 결국 나를 지키는 쿠션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구조의 관점에서도 한 가지 힌트를 얻었다.

중앙집중보다 분산.

하나의 축에 모든 것을 걸면,

그 축이 흔들릴 때 전체가 무너진다.

반대로 작은 단위들이 느슨하게 연결된 구조는 일부가 휘청여도 전체가 버틴다.

내 삶에도 이런 분산을 적용할 수 있지 않을까.

행복의 근거를 한 사람,

한 성취, 한 평가에 몰아넣지 않고,

여러 작은 축으로 나눠 지탱하기로.

그래서 하나가 무너져도 나머지가 나를 붙잡아주는 구조로.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태도 하나.

에피스테믹 겸손,

즉 “내가 모를 수 있다”라는 자각.

예측은 자주 틀리고,

모델은 늘 수정된다.

그러니 나는 나의 확신을 잠정으로 낮추고,

새 증거와 반례에 열어둔다.

‘정답은 없다’라고 말하던 내 결론이,

무책임이 아니라 업데이트 가능성을 열어두는 겸손이 되려면 이 태도가 반드시 필요하다는걸 느꼈다.

그렇다면 실천은 무엇일까.

거창하게 멀리 갈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작은 스트레스에의 노출을 일상에 깔아두는 것.

감정도, 관계도,

정보도 도망치지 말되 몰아붙이지도 않는 선에서,

하루에 10분 낯선 글을 읽고,

주 1회 익숙하지 않은 사람과 대화하고,

한 달에 한 번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주제에 대해 기록하는 행동들.

근육이 미세 손상을 통해 자라듯,

작고 반복적인 흔들림을 내 삶의 리듬으로 들이는 것.

그리고 그 과정의 몸 반응과 마음 반응을 메모한다.

내가 무엇에서 쉽게 무너지고 무엇에서 의외로 버티는지를 관찰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요약하면,

흔들림을 기록하며,

느슨한 분산을 설계하고,

과최적화의 유혹에서 거리를 두고,

태도로서의 겸손 뿐만 아니라 절차로서의 겸손,

즉 의견 충돌 시 우선순위를 정할 수 있는 나만의 체크리스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나 또한 시간이 필요하다.

마치 화려한 불사조가 연상되는 듯한 새가 되기 위해,

우리는 이 방법으로 나를 진짜로 단단하게 만들지,

아니면 또 다른 자기기만에 불과할지 지금은 모른다는 것을.

다만, 서두르지 않겠다.

빠른 결론이 달콤하다는 걸 알지만,

나는 그 달콤함이 얼마나 쉽게 굳어버리는지도 보아왔다.

그러니 오늘은 여기에서 멈춘다.

불확실성을 없애려는 싸움 대신,

불확실성 속에서 다시 일어서는 연습을 택하려고 한다.

끝내 나는 여전히 같은 마음을 붙든다.

확신보다는 최선,

정답보다는 가능성,

그리고 무엇보다 작고 깊은 공감.

이 세 가지를 발판으로,

작은 충격을 조금씩 견디며 내 삶의 리듬을 다시 세워보려고 한다.

안티프래질은 그 리듬을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참고서로 곁에 두겠다.

이후 책을 사서 읽어보고 나만의 철학으로 만들 예정이며,

다른 이들도 자신만의 철학을 세웠으면 한다.

철학에는 정답이 없듯이,

각자의 철학이 존중받으며 다같이 행복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해답은,

아마도 지금보다는 더 천천히,

더 작게, 그리고 덜 단정적으로 도착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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