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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기 센서에 빨간불이 들어왔다

생활용품 계수하기

by 서지현

정수기 센서에 빨간불이 들어왔다. 새 필터로 교체한 게 겨우 한 달 전이다. 브리타정수기 필터의 평균 수명이 두 달 남짓이라는데 한번도 그 기대치에 미처 본 적이 없다. 우리가 집에서 음식을 해 먹느라 사용하는 물의 양을 생각하면 수긍이 간다. 남은 필터라곤 고작 네 개 뿐이니, 막판 두어 달은 정수물 수급을 심각하게 고민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언제부턴가 집안 생필품을 보면서 남은 수량을 계수하는 습성이 생겼다. 네 군데 화장실에 하나씩 비치해 두고 쓰는 롤 화장지의 재고는 괜찮은지, 세탁 세제는 크게 모자라거나 남아돌지 않을지, 건조한 계절이 지나고 로션 사용이 줄면 결국 많은 양을 폐기하고 가게 되진 않을지, 하는 식의 따져보기다.






지금 쓰고 있는 욕실 제품은 이전 세입자가 고스란히 두고 간 것들이다. 귀국을 앞두고 대형마트에서 멀티팩 제품을 산 것인지 미개봉 제품을 포함한 샴푸, 린스, 바디워시가 넉넉히 남아 있다. 한국에서 가져온 것들과 여행지 호텔에서 챙겨 온 어메니티를 잘 활용하면 별도로 욕실 용품을 구입하지 않아도 될지 모르겠다. 그렇게 된다면 왠지 수지맞는 장사 같다.




주방 양념을 사들이는 데에는 욕심이 좀 과했다. 워낙 요리에 진심이다 보니 시도해 보고 싶은 이색 양념이 많았다. 이를테면 파프리카, 마늘, 생강 파우더 같은 것들. 허브 향신료만 해도 향과 풍미가 다채로운 것들이 많아 종류대로 사모았다. 과연 요리에 요리를 거듭하다 보면 이 많은 양념통을 비울 수 있을까? 남은 양념에 따라 하고 싶은 요리를 하기보다 해야 할 음식에 열을 내게 될 날이 올 지도 모르겠다. 양념 비우기에 성공해 꼭 맘에 드는 양념 몇 가지를 사들고 한국에 가야지. 그렇게 야무진 꿈도 꾸어 본다.






삶은 언제나 살림을 동반한다. 미국에 와서도 여전히 나 자신과 가족의 삶을 돌보고 살리느라 살림을 산다. 다만 미국에서의 살림은 마감 기한이 분명한 시한부 살림이다. 살림을 얼마나 능숙하게 잘 해느냐 보다 중요한 건 마감기한을 준수하는 일. 1년간 네 가족 복닥이며 사느라 풀어헤친 크고 작은 살림살이를 미련도 후회도 없이 깔끔하게 걷어낼 수 있어야 한다.




그 기저에는 늘 긴장과 압박이 있다. 시시로 물건의 들고남에 신경이 쓰인다. 잠깐의 방심으로 일을 그르칠 수 있을 테니까. 간혹 게임을 하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주어진 시간 안에 칸칸의 빈칸에 꼭 들어맞는 모양의 블록을 끼워 맞추기 위해 손과 머리를 부지런히 놀려야 하는 테트리스 게임 같달까. 집안의 각종 생활 용품을 기한 내에 딱 맞게 소진하면 좋겠다는 간절한 바람. 스릴과 짜릿함은 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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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께 드리는 글>


집안 생활 용품을 계수하다 보니 '앞으로 <미국 시한부 살림> 매거진에 몇 편의 글을 더 써낼 수 있을까'가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이번만큼 순전히 '쓰는 즐거움'을 위해 썼던 글이 있었을까 싶네요. 출판을 염두에 둔다거나 구독자수를 늘리겠다는 작은 욕심 없이 그저 미국 생활을 즐기는 방편의 하나로 작은 이야기들을 꾸려왔거든요. 그 '즐거움'을 위한 명목에는 저의 변변찮은 미국생활을 궁금해하시는 지인 독자분들께 '저 이렇게 살고 있어요' 하는, 근황을 알리기 위한 목적도 상당 부분 포함돼 있었어요.



덧붙여 작은 속내를 드러내자면, 꾸준히 칼을 벼리고 싶다는 작가로서의 바람이 있었습니다. 크고 작은 도전과 새로운 경험들, 시야를 넓히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한 시기지요. 그러나 그 이상으로 '쓰는 사람'으로서의 정체가 희미해지지 않길 바랐습니다. 그러고 보니 저는 잘 살고 있었던 거네요. 글을 통해 미국땅 정착 과정에서 겪은 어려움을 호소하기도, 볼멘소리를 늘어놓기도 했지만 어떤 식으로든 일상 이야기의 줄기를 이어나가고 있으니까요.



미국 시한부 살림을 마감하는 날까지 저의 이야기를 꾸준히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앞으로의 이야기, 많이 사랑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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