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27일(화) 맨해튼은 하루종일 우중충
지인 부탁받고 아침 일찍 맨해튼 웨스트 43번가에 있는 샌드위치 집에 갔다. 친자매처럼 지내는 사이라고 매상 올려달라고 부탁한 거다. 샌드위치 가게 주인은 뉴욕에서 20년 이상 살며 맨해튼에서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대한항공 승무원하다가 미국 교포와 결혼해 뉴욕에 눌러앉아 살고 있다. 동생도 맨해튼에서 식당을 하고 있다. 미국 요리학원 CIA를 졸업하고 퓨전 일식집을 운영하고 있다. 보아하니 지인이 동생과 나를 이어주려는 듯하다. 동생은 결혼하지 않았다. 지난 일요일 게이 퍼레이드로 맨해튼이 혼잡했을 때 혼자 동생네 가게에 갔다. 정신없이 바쁜 듯해 조용히 밥만 먹고 나왔다. 새 인연이 버겁다. 혼자라는 게 좋은 건지 익숙해진 건지 아무튼 어디 매이지 않고 돌아다니는 게 좋다. 아직도 철이 들지 않은 건가.
몸에 좋은지 모르겠으나 맛없는 샌드위치를 입에 욱여넣고 서둘러 나왔다. 록펠러센터 전망대 관람 시간이 다가온 거다. 록펠러센터 최고층 전망대를 톱오브락(Top of Rock)이라 한다. 전망대에 오르면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이 정면에 보인다. 남쪽으로는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을 기점으로 좌우로 맨해튼 고층 빌딩들이 줄지어 늘어선다.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 뒤로는 멀리 월스트리트 빌딩들이 서 있다. 월드트레이드센터도 우뚝 솟아 있다. 북쪽으로는 좁고 높게 선 빌딩 숲 사이로 센트럴파크가 펼쳐진다. 초고층 빌딩 숲 너머로 짙은 녹음이 융단처럼 뻗은 게 멋지다. 오전 내내 비가 오락가락하더니 시계가 좋지 않다.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은 먹구름까지 이고 있다. 전망대를 여러 바퀴를 돌며 날이 개이기를 기다렸지만 먹구름은 짙어져 갔다. 포기하고 내려왔다.
센트럴파크로 들어갔다. 오후 1시 메트로폴리탄 도슨트투어 시간까지 공원 안으로 산책했다. 센트럴파크가 익숙해져가고 있다. 지도 없이 여기저기 찾아갈 수 있을 듯하다. 착각이었다. 워낙 넓다 보니 공원 안에서 방향 감각을 잃고 헤매다 구글 지도의 도움을 받고 관람 시간에 맞춰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도착했다. 9년간 뉴욕에서 머물면서 미술을 공부한다는 전문가가 작품 설명하며 무리를 이끌었다. 메트로폴리탄은 관람객으로 북적였다. 우리 일행만 25명이었다. 떼로 움직이다 보니 정신이 없었다. 가이드 설명도 수박 겉핥기 수준이었다. 루브르 박물관에서 에꼴 드 루브르 출신이 4시간 설명하는 것을 듣고 프라도 미술관에서 오디오 설명을 반복해서 들어서인지 이번 가이드 수준은 형편없었다. 실망만 거듭하다 혼자 움직이기로 결심했다.
가이드와 떨어서 고흐 고갱 르누아르 모네 같은 인상파와 세잔 드가 작품 위주로 보고 다녔다. 고흐 작품은 인상파를 흉내 내던 초기 작품들이 대부분이었다. 고갱 작품 몇 점은 훌륭했다. 타히티에서 그린 작품들이 걸려 있었다. 특유의 몽환적 터치가 인상적인 르누아르의 작품은 많았다. 최고의 작품은 세잔의 사과였다. 대상을 여러 각도에서 본 것을 한 화면에 담았는데 훗날 피카소 같은 입체파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작품이 걸려 있었다. 렘브란트가 도박 빚에 재산을 탕진한 뒤 그린 자화상을 비롯해 빛과 어둠, 음영을 기가 막히게 그린 작품들을 볼 수 있어 반가웠다. 더 보고 싶었지만 체력이 다하고 있었다.
아침 7시부터 오후 3시까지 쉬지 않고 걸어서인지 다리가 비명을 질렀다. 메트로폴리탄 벤치에서 한참 쉬다가 숙소까지 걸었다. 맨해튼 지도는 머릿속에 있다고 확신하고 구글 지도 열지 않고 숙소를 향해 걸었다. 메트로폴리탄 중간쯤에 있으니 웨스트 32번가에 숙소까지 걸으면 족히 1시간은 걸릴 듯했다. 거리 곳곳을 구경하며 걸었다. 한참 걸었는데도 낯선 곳만 나왔다. 40분가량 걷고 나서 하는 수 없이 구글 지도를 열었다. 거꾸로 가고 있는 거였다. 남서쪽으로 가야 하는데 남동쪽으로 걷고 있었다. 옛날에는 구글 지도 없이도 방향을 잘 잡았는데. 정보기술 발달이 인간 지능을 감퇴시킨다는 게 맞나 보다. 구글 지도 보고 서쪽으로 방향을 잡고 한참 걸어 숙소에 왔다. 녹초가 되었다. 라면 끓이고 햇반 전자레인지에 돌려 배고픔을 해결하고 침대에 누웠다. 내일은 배 타고 자유의 여신상 본 뒤 브라이스 홉과 저녁 먹고 재즈 공연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