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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소 Mar 13. 2024

관계의 설정, 서로의 선을 넘지 않는 선에서.

대화의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 분위기는 기억되니까.

두 사람의 관계는 연애 초반에 결정된다는 말이 있지만, 내 경우엔 그 말이 맞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관계라는 것이 한 가지 모습은 아니어서 어떤 부분은 초반에 결정된 것이 있고, 같이 지내며 자리 잡은 것도 있다.


강군과 나는 대학에서 만났다. 내가 기억하는 첫 다툼은 학교 앞 밥집이었는데, 밥을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서로가 날카로워졌다.

대화의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별로 중요한 내용이 아니었다는 거겠지.) 그는 내 말투에 기분이 상했고(비아냥 거리는 말투였다고.), 들고 있던 숟가락을 테이블에 던지듯 쿵하고 내려놓았다.

그 소리가 꽤나 컸던 모양이다. 주변 시선이 느껴졌고, 우리 사이엔 잠시 정적이 흘렀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의 나는 화가 나면 말수가 줄어드는 편이었다. 생각이 많아져서 할 말을 골라내는데 시간이 걸렸다. 처를 줘도 상관없는 사람이라면 고민할 이유가 없겠지만, 중요한 사람일수록 랬다. 앞으로의 관계를 위해 이 문제를 잘 해결하고 싶었다. 그렇다고 밥을 앞에 놓고 나눌 이야기는 아니어서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체하며 말했다.


"일단, 먹어."


지금 생각해 보면 조금 웃기기도 하다. 밥이 뭐라고, 그냥 나왔으면 되지 싶은데 그때의 나는 밥을 기어이 다 먹어치웠다. 그 상황에서도 밥을 먹는다는 것이 감정적이지 않은 사람임을 증명하는 거라 생각했던 것 같다. 그건 나만의 증명이었기에, 내가 밥을 다 먹을 동안 그는 몇 숟갈 뜨지 않았다.


가게를 나온 뒤 학교로 돌아간 우리는 조금 차분해져 있었다. 나는 그가 그런 식으로 화를 표현한다면 다신 보지 않겠다고 했고, 그는 자신의 행동을 사과했다. 나도 내 말투를 사과했다. 우리의 첫 다툼은 그렇게 각자의 사과로 마무리되었다.


7년 간 연애를 하다 결혼을 하고 15년을 함께 지냈다. 짧지 않은 시간이니 참 많이 다툴 법도 했지만 강군과 나는 그런 기억을 손에 꼽는다. 첫 다툼을 기억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정말 실망을 하거나 화가 났던 적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다행히 소통은 잘 되는 편이었다. 그냥 넘길 수 없는 문제다 싶으면 어느 때보다 진지하게 대화를 했다. 두 사람 다 한 번도 헤어지자는 말을 꺼낸 적이 없는데, 누군가 그런 말을 했다면 우린 정말 헤어졌을 거다. 세상 시시껄렁한 농담을 주고받기 하지만 중요한 말은 가볍게 나누지 않는다. 연애를 하며 암묵적으로, 가볍게 나누어도 되는 말과 그렇지 않은 말의 카테고리를 정해갔던 것 같다. 각각의 카테고리에 맞는 태도로 대화하기, 그리고 서로의 선을 넘지 않기. 그게 연애 초반에 결정된 우리의 관계다. 굳이 선을 넘지 않아도 각자의 생각과 마음을 표현하는 방법은 충분하니까.


대화는 '내용'보다 '방식'의 문제라고, 사소한 내용이 잘못된 대화 방식을 거치면 더이상 사소하지 않아 졌다. 대신 적절한 방식으로 선만 넘지 않으면 어떤 이야기든 밤새 나눌 수 있었다. 신혼 초에는 여행을 가서 이야기를 나누다 아침을 맞은 적도 있다. 그만큼 서로와 대화하는 시간을 즐겼던 것 같다.(지금은 다만 체력적인 문제가.)


요즘도 우리는 이런저런 이야기 나누길 좋아한다. 대화의 주제는 생각보다 사소하다.

론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어야 하는 순간도 있었다. 집안 경제 구조에 약간의 위기가 닥쳤을 때, 아이에게 웃어넘길 수 없는 문제가 생겼을 때, 시댁과 친정에 관한 문제가 생겼을 때 등등. 하지만 그런 대화는 주로 '문제'가 생겼을 때라, 사소한 대화를 나눈다는 건 별다른 문제가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그 사소함이 좋다. 삶이 충분히 무거우니, 우리 두 사람이 함께하는 시간은 조금 가벼웠으면 좋겠다. 동네 새로 생긴 가게 이야기, 어제 본 TV 이야기, 길을 가다 본 어떤 모르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 그런 이야기들로 깔깔거리는 우리가 좋다. 지나고 나면 너무도 사소해서 내용조차 기억나지 않는 이야기들일 텐데, 신기하게도 그 분위기는 기억되니까.

별거 아닌 이야기를, 별 고민 없이 나누어도, '너무 가벼워 보이는 건 아닌가?'와 같은 후회는 하지 않아도 되는 분위기. 굳이 잘 보이려고 애쓰지 않아도 되는 익숙한 편안함이 있는 분위기. 그 분위기는 지금까지 우리가 차곡차곡 만들어온 관계이기도 하다.


어제 강군은 돌아오는 주말에 무얼 먹을지를 고민하다 잠이 들었다. 먹고사는 일은 아주 중요한 거니까, 오늘은 그 중요한 고민에 동참할 생각이다. 휴일은 무거운 일상을 살아갈 힘을 한껏 충전하는 시간이라고, 음식과 수다, 맥주 한 캔이 있다면 휴일 준비는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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