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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woorain Nov 21. 2023

<더 마블스> 잘 가세요, 이젠 멀리 안 나갈게요

이젠, 정(情)으로 본다는 말조차 식상하게 느껴질 정도다. 인정하자. 지금의 마블은 우리가 사랑했던 시절의 마블이 아니다. MCU(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페이즈3(2019)까지 이어진 전성기 시절에 마블이 쌓아올린 후광과 그것이 흩뿌린 콩고물 덕분에 이후의 작품들이 그것을 먹으며 연명해 왔지만, 그 효과도 거의 바닥을 드러내는 분위기다. 지난 5월 개봉한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olume 3>가 멋진 안타로 잠시 ‘혹시나’ 하는 기대를 주긴 했으나, 그것은 꺼져가다가 잠시 튕긴 불씨였음을 <더 마블스>가 증명해 버렸다. 그러니까 <더 마블스>는 마블의 후광 효과가 모두 소진됐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타노스에 맞짱 뜰 정도로 막강한 힘을 지닌 ‘캡틴 마블/캐럴 댄버스’(브리 라슨)는 어느 날 초능력을 쓸 때 자신의 위치가 바뀌는 경험을 한다. 친구의 딸이자 빛의 파장을 조작하는 히어로 ‘모니카 램보’(테요나 패리스), 캡틴 마블의 열혈 팬인 ‘미즈 마블/카말라 칸’(이만 벨라니)과 각자의 능력을 사용할 때마다 위치가 바뀌는 기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그 배후에 복수를 꿈꾸는 크리족 리더 ‘다르-벤’(자웨 애쉬튼)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세 사람은 어쩔 수 없이 한배를 타고 모험을 시작한다.     


4611만 달러. <더 마블스>의 북미 오프닝 스코어다. 마블 시리즈 역대 최악의 개봉 성적이기도 하다. 국내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다. 첫 주말 성적 30만4539명(누적 관객 수 44만 명)으로, 개봉만 하면 관객을 무섭게 빨아들이던 전성기와 비교하면 그 위상이 말도 안 되게 쪼그라들었다. 마블의 급변한 신세에 대해 외신은 ‘슈퍼히어로물에 대한 관객의 피로감’을 꼽는다. 맞는 말이다. 그렇다면 물어야 할 질문, 무엇이 관객들에게 피로감을 안겼을까.     

<캡틴 마블> 이후 4년 만에 돌아온 캐럴 댄버스는 혼자가 아니다. <더 마블스>라는 제목이 보여주듯, 모니카 램보와 카말라 칸이 합류해 팀을 이뤘다. 모니카 램보는 마블의 모회사 디즈니의 OTT 플랫폼 디즈니+의 <완다 비전>을 통해, 카말라 칸은 <미즈 마블>로 OTT 시청자와 통성명한 바 있다. 짐작하겠지만, 지난 몇 년간 마블이 고집스럽게 밀고 있는 영화와 OTT의 연계다. 다행히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2022) 때처럼 디즈니+를 보지 않았다고 해서 서사를 이해 못 할 정도는 아니다(<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의 경우 디즈니+ <완다 비전>의 후속편처럼 만들어 놓은 탓에, OTT를 보지 않고서는 도저히 이해 불가능한 흐름으로 가득했었다). 디즈니+ 관람 여부와 무관하게 서사는 어렵지 않게 다가온다는 의미다.

     

그렇다고 이것이 하등 문제가 안 되는 건 아니다. 아니, 여전히 큰 문제다. 영화의 재미라는 게 이야기에서만 피어오르는 게 아니니 말이다. 영화의 관건은 관객의 시선을 끌어갈 캐릭터의 매력인데, <더 마블스>는 두 명의 주요 캐릭터 탄생기를 완전히 삭제(정확하게 말하면 OTT로 대체)하고 간단히 소개하는 것에 그침으로써, 영화로 모니카 램보와 카말라 칸을 처음 접한 관객들이 이 캐릭터들에게 감정을 이입할 기회를 스스로 던져버렸다. 캐릭터에 대한 사전 정보가 없다 보니, 캡틴 마블과 이들 사이에 오가는 감정의 화학 작용도 심드렁하게 다가온다. 쉽게 말하면, 캐릭터가 무매력이란 의미다.     


이 문제는 극 전반에 그림자를 드리우는데, <더 마블스>의 시그니처 액션이라 할 ‘스위칭 액션’(세 주인공이 능력을 발휘할 때마다 서로의 위치가 바뀌는 액션)의 재미마저도 반감시켜 버린다. 캐릭터 퍼스널리티가 어떻고, 어떤 능력을 보유하고 있는가가 제대로 설명되지 않다 보니 서로 다른 액션이 모여 자아내는 케미가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가령 ‘스위칭 액션’으로 엮인 인물들이 아이언맨-스파이더맨-캡틴 아메리카라고 상상해 보자. 마블 영화를 보아온 관객은 세 캐릭터의 특징과 주요 기술, 성격까지도 잘 알고 있기에, 그들의 몸이 바뀔 때마다 일어나는 잔재미와 응용력을 쉽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더 마블스>의 세 히어로는 보유 기술마저 큰 차이 없게 그려지는 탓에, 별다른 특색 없이 몸 바꾸기만 연신 시연하는 느낌을 준다. 그마저도 후반부로 갈수록 산만해져 감흥이 떨어지는 게 또 문제다. 여기엔 수분이 현저히 부족한 액션 아이디어의 결함도 크다.     

빌런 다르-벤 역시 큰 구멍이다. 크리족의 리더인 다르-벤이 흑화된 데는 나름의 구구절절한 사연이 있다. 그 사연에 깊게 결부돼 있는 게 바로 캡틴 마블. 캡틴 마블은 과거 AI의 지배를 받는 크리족을 해방시킨다는 명목하에, ‘슈프림 인텔리전스’를 파괴한 전력이 있다. 좋은 의도로 행한 일이었지만 인생이 어디 호락호락한가. 좋은 의도가 꼭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건 아닌 것을. 슈프림 인텔리전스 파괴로 관리체계가 무너진 크리족은 내전에 휩싸이고, 이들이 사는 행성은 태양과 물이 소멸한 재앙의 땅이 돼버리고 만다. 크리족 사이에서 캡틴 마블이 악마화된 인물로 받아들여지는 것도 이런 연유에서 기인한다. 그러니까, 다르-벤 입장에선 캡틴 마블이야말로 빌런인 셈이다. <더 마블스>는 이처럼 다르-벤에게 나름의 사연을 부여하고, 캡틴 마블에겐 ‘거대한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는 메시지를 던지며 이야기를 묶는다.     


‘좋은 의도가 언제나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건 아니다’는, 설정은 나쁘지 않다. 문제는 이 영화는 설정만 있을 뿐, 그것을 풀어나가는 아이디어와 디테일이 허술하다는 것이다. 다르-벤은 복수심만 불탈 뿐, 리더로서의 존재감이 거의 없다. 그토록 원하는 무기를 손에 넣고도 사용할 줄 몰라 빌빌대는 모습이라니. 자신이 생각한 정의가 누군가의 삶을 파괴했다는 사실에 힘들어하는 캡틴 마블의 고뇌 또한 얄팍한 선에서 그려지는 탓에 일회성으로 소모되는 인상이 강하다.     


자, 그리고 국내 팬들에겐 초미의 관심사였던 박서준. 박서준의 마블행(行) 관련 소식이 전해진 건 2021년. 영화와 관련된 모든 세부 사항을 기밀로 붙이는 마블의 철통 보안 시스템은 팬들의 상상력만 부추기는 꼴이 되고 말았는데, ‘박서준이 헬렌 조의 아들 아마데우스 조를 연기할 것이다!’ ‘아니다. 주요 빌런을 연기했을 것이다!’ ‘아니다, 캡틴 마블의 연인일 것이다!’ 등의 설이 이리저리 난무했었다. 그리고 공개된 영화 속에서 박서준은? 히어로도 빌런도 아닌, 알라드나 왕국의 ‘프린스 얀’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알라드나는 노래와 춤으로 소통하는 행성이다. 그런 설정에 맞춰, 봉황처럼 생긴(?) 왕관을 쓰고 모습을 드러낸 박서준은 등장과 함께 난데없이 노래를 부르더니 급기야 캡틴 마블과 커플 댄스를 춘다. 그리고? 그리고 그것이 끝이다. 알라드나 행성에 출몰한 적들에게 칼 몇 번 휘두르고, 미즈 마블에게 무기 사용에 대한 조언 하나 짧게 하고는 사라진다. 그러니까, 뭐랄까. 니아 다코스타 감독은 드라마 <이태원 클라쓰>를 보고 반해 박서준을 캐스팅한 것으로 알려지는데, 그 애정이 애석하게도 아시아인 캐릭터를 그리는 가장 안 좋은 쪽으로 풀어져버린 인상이랄까.     


이러거나 저러거나, 박서준에겐 자신의 역량을 충분히 발휘할 기회를 부여받지 못한 작업물이다. 물론 배우 입장에선 경험치를 쌓는 데 의의를 둔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의견에 완전한 동의는 못 하겠다. 어떤 배역을 선택하느냐가 배우의 많은 것을 보여주듯, 어떤 배역을 맡지 않았는가 또한 배우가 걸어나가는 이력엔 중요하니 말이다. 물론 아무리 한국 인기 배우라고 해도, 할리우드에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요구하기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을 것이다. 그리고 몇 년 후 마블의 존재감이 이토록 차갑게 식을 줄, 예지력 있는 닥터 스트레인지가 아니고서야 알았겠나. 여러모로 마블에 합류하는 시기가 안 좋았다.     

<더 마블스>에도 확실한 재미 구간은 존재한다. 고양이 캐릭터 ‘구스’가 등장하는 신들이다. 구스는 캐럴 댄버스가 공군이던 시절 의지하던 웬디 로슨(아네트 베닝) 박사가 키우던 고양이. 무늬만 고양이일 뿐, 실제 정체는 자신보다 큰 물체를 집어삼킬 수 있는 거대한 촉수를 가진 외계 생명체인데 이번엔 새끼 고양이들까지 떼로 등장해 존재감을 흩뿌리고 다닌다.  다만 그것이 안기는 재미와는 별개로, 고양이 등장 신들이 마블보다는 <맨 인 블랙> 느낌에 더 가까워서 살짝 톤이 어긋나는 느낌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무엇보다 캡틴 마블 영화에서 가장 매력적인 게 고양이라면, 이건 좀 생각해볼 문제이기도.     


쿠키 영상엔 마블의 원대한 야심이 드러난다. 21세기폭스를 인수함으로써 ‘엑스맨’ ‘판타스틱4’ 등의 판권을 되찾아온 마블은 ‘엑스맨 vs 어벤져스’의 영화화에 본격 시동을 걸 것으로 보인다. 친정집으로 돌아온 히어로들이 마블에 어떤 자극을 안길까. 문제는, 이제 더 이상 궁금하지가 않다.      


('시사저널'에 쓴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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