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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woorain Jul 19. 2024

<페퍽트 데이즈>,당신 인생의 ‘고모레비’는 무엇인가요

고모레비(木漏れ日). ‘나뭇잎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 그리고 그 햇살을 바라보며 느끼는 행복’이라는 뜻의 일본 말. 이 단어를 처음 접한 건, 프랜시스 샌더스의 ‘마음도 번역이 되나요: 다른 나라 말로 옮길 수 없는 세상의 낱말들’이라는 책을 통해서였다. 뉘앙스로만 인식해 온 풍경에 피가 돌고 살이 돋는 기분이 들었다. 행복을 감지하려는 태도가 숨어 있는 단어여서 더 좋았다. 그런 ‘고모레비’의 미학을 음미할 줄 아는 남자를 영화 <퍼펙트 데이즈>를 통해 만났다. 남자의 이름은 히라야마(야쿠쇼 고지). 도쿄 시부야의 공중화장실 청소부다.


창문 너머로 들려오는 비질 소리를 알람 삼아 잠에서 깬 남자.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화초에 물을 준 후, 작업복을 입고 집을 나선다. 자판기에서 캔 커피 하나 뽑아 용달차에 올라타면 출근 준비 끝. 카세트테이프를 뒤적여 선곡한 팝송은 그날 그의 출근길 BGM이 된다. 누군가가 잠시 머물러가는 화장실을 정성스레 닦아내고 나면, 근처 공원 벤치에서 점심을 먹는다. 나무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햇빛을 필름 카메라에 담는 것도 잊지 않는다. 퇴근 후 동네 목욕탕에서 몸을 씻고 나면, 역 근처 식당에서 식사하고 귀가해 책을 읽다 잠이 든다.

그의 일상은 매일 같은 시간에 산책했던 칸트만큼이나 규칙적이다. 예기치 않은 타인의 방문에 리듬이 잠시 바뀌긴 하지만, 이내 본래의 루틴으로 돌아온다. 영화는 우리의 일상과 비슷한, 어쩌면 그다지 영화적이지 않은 히라야마의 하루를 반복해서 보여준다. 기상-출근-일-귀가-식사-잠으로 이어지는 무한 루프의 일상을. 그런데 이상하지. 왜, 히라야마의 삶은 지루하게 느껴지기는커녕 경건해 보이는 걸까. 심지어 왜 퍼펙트하게 다가오는 것일까.


얼핏 보면 그의 하루는 매일의 반복이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르다. 선곡하는 노래가 다르고,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이 다르며, 풍경이 만들어내는 매일의 그림자가 다르다. 카메라에 담아내는 ‘고모레비’ 또한 다르다. 그냥 ‘햇살’이 아니라, ‘그날의 햇살’을 담아내기 때문이다. 어제와는 다른 햇살을. 히라야마는 각각이 다른 햇살들을 기록해 모아두는 습관도 지니고 있다. 이 지점에서 나는 생각했다. 히라야마는 반복되는 삶을 사는 사람이라기보다, 삶에 스며 있는 작은 차이를 발굴하고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에 더 가깝다고. 소소한 경험에서 얻는 가치를 존중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그것이 그를 특별하게 보이게 한 이유일 것이다. 나뭇잎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은 누구에게나 공평하지만, 그것이 주는 즐거움을 알아채는 사람은 얼마 없으므로.

얼마 전, ‘세계 100대 행복학자’로 꼽히는 서은국 교수를 만나 물었었다. “교수님, 행복을 연구하면서 발견한 것 중 가장 놀라웠던 건 무엇인지요.” 그가 답했다. “행복은 ‘강도’가 아니라 ‘빈도’라는 점입니다.” 그는 행복은 강남아파트나, 높은 연봉, 명함에 적힌 그럴듯한 우월감에서 오는 게 아니라고 했다. 아무리 큰 기쁨도 우리 뇌는 금방 ‘적응’해 버리기에 극적인 경험 한 번보다, 소소한 즐거움을 여러 번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며 행복의 스위치를 켜 주는 습관들을 삶 속에 많이 포진해 두는 게 필요하다고 알려줬다.


그렇다면 관건은, 내가 진짜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정확히 인지하는 것일 테다. 다수의 사람이 여기에서 함정에 빠진다. 내 주관보다 타인의 시선에서 좋아 보이는 것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아서다. 히라야마도 한때, 그렇게 살았던 사람 같다. 전사가 나오진 않지만, 영화는 그가 부유한 집에서 자랐으나 행복하지 않았고 특권층의 삶에서 스스로 도망쳐 나온 사람이라는 힌트를 준다. 확실한 건, 지금의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을 일상에 뿌려놓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윌리엄 포크너,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팝송 그리고 고모레비…. 그가 좋아하는 목록들이다. 순간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아가는 히라야마의 태도는, 미래의 행복(이라 믿지만, 사실은 ‘성공’)을 위해 현재를 저당 잡혀 살아가는 우리에게 적잖은 메시지를 던진다. 당신 인생의 ‘고모레비’는 무엇인가요, 라고.


('세계일보'에 쓴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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