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에선 성형외과·피부과가 인기라는데, 콘텐츠 시장으로 가면 사정이 달라진다. 드라마 창작자들이 사랑하는 과는 단연 (생명과 직결되는) '외과'다. 외과 레지던트들의 성장기를 그린 <종합병원>(메디컬 드라마 효시)을 시작으로 흉부외과(<외과의사 봉달희> <뉴하트>), 소아외과(<굿닥터>), 신경외과(<브레인>) 등 다양한 외과 계열 전문의들이 드라마 주인공으로 등장해 생(生)과 사(死)의 기로에 놓인 환자를 살리려 고군분투했다. 권력투쟁의 끝판왕을 보여줬던 <하얀거탑>의 장준혁(김명민)도 천재 외과 교수였다.
2012년 국내 의학 드라마에서 한 번도 다뤄지지 않았던 '외상외과'를 내세운 <골든타임>이 등장했다. 주인공인 응급실 수장 최인혁(이성민)의 목표는 중증외상센터 건립을 통해 환자들의 골든타임을 지키는 것. <골든타임>은 공공의료 시스템 전반의 모순을 고발하며 의학 드라마의 새로운 장을 연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흥미롭게도 <골든타임>이 방영된 2012년은 일명 '이국종법'(중증외상센터 설립을 위한 응급치료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전국에 권역별 외상센터가 만들어질 길이 열린 해이기도 하다(이 법에 따라 권역외상센터가 생겨났다). 이국종법이라는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듯, 그 중심엔 '중증외상센터'의 필요성을 오랜 시간 알려온 아주대 응급의학과 이국종 교수(현재 국군대전병원장)가 있었다. 최인혁 모델이 이국종 교수인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그렇다면 최인혁과 이국종이 그토록 염원했던 '중증외상센터' 설립으로 인해 한국 응급의료는 획기적으로 나아졌을까. 중증외상센터 운영은 차질 없이 이뤄지고 있을까. 1월24일 공개된 넷플릭스 <중증외상센터>에 그 답이 있다.
원작은 네이버 시리즈를 통해 연재된 웹소설 <중증외상센터: 골든 아워>다. '한산이가'라는 필명으로 활동한 원작자는 실제 이비인후과 전문의 이낙준이다. 원작자는 여러 인터뷰에서 웹소설의 출발선에 이국종 교수가 쓴 에세이 <골든아워>가 있었다고 밝힌 바 있다.
외과 의사 배강혁(주지훈)이 한국병원 중증외상센터에 부임하면서 시작되는 드라마엔 실제로 이국종 교수에 의해 알려진 현실이 빼곡히 담겼다. 정부가 중증외상센터 지원 목적으로 할당한 100억원이 병원의 다른 사업에 쓰이고, 배강혁이 환자 구조를 위한 헬기를 띄울 때마다 병원장은 돈이 새어 나간다고 압박을 가한다. 극한의 업무에 지원하는 전공의가 없어 몇 사람의 사명감으로 외상외과가 지탱되는 상황이 펼쳐진다.
그러나 <중증외상센터>는 무겁지 않다. 무겁기는커녕 명랑하고 발랄하다. 고구마 같은 상황을 빠른 속도감과 만화적인 유머에 실어 빠르게 무마해 나간 덕이다. 과장이 심한 순간엔 현실이 또 가벼움을 눌러준다. 리얼리티와 판타지 사이의 밀당이 수준급이랄까. 무엇보다, 캐릭터가 극을 장악하는 힘이 상당하다.
그 중심에 백강혁이 있다. 오프닝에서 오토바이를 몰며 전장의 총알을 피해 가는 백강혁은 외과 의사라기보단 <미션 임파서블>의 이단 헌트(톰 크루즈)에 더 가까워 보인다. 백강혁은 달리는 차 안에서 환자 뇌를 열어 수술하는 신공도 지녔다. 헬리콥터 레펠(밧줄을 타고 내려오는 것)을 하며 나비처럼 착지해 벌처럼 환자에게 다가가는 건 기본. 환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빠르게 찾아내는 판단력도 탁월하다. 겸손 따윈 찾아보기 힘든 '천상천하 유아독존'이지만, 환자를 위해서라면 전쟁터도 마다하지 않는 심지도 지녔다. 환자 입장에선 이런 '의느님'(의사와 하느님의 합성어)이 없을 터. 한마디로 '사기 캐릭터'인 셈이다.
원작자 이낙준은 백강혁을 초인으로 설정한 이유에 대해 한 라디오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우리나라 중증외상센터가 의사 개인의 희생을 바탕으로 굴러가고 있기 때문에, 마블 영화에 나오는 히어로급이 아니면 버틸 수 없는 시스템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그러니까 <중증외상센터>는 <골든타임> 이후 10년 동안 대한민국 중증외상 의료 현실이 나아졌는가에 대한 '암울한' 대답이다. 이처럼 답 없는 사회에 히어로 같은 의사라도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염원이 담긴 드라마이기도 하다.
<중증외상센터>에는 환자를 살려도 칭찬은커녕, 병원 적자 주범으로 몰려 눈총을 받는 중증외상센터의 아이러니한 상황도 진득하게 담겼다. 병원이 각 과 의사를 모아놓고 수익을 브리핑하며 경쟁을 부추기는 장면을 보자. 병원 수익률 1위 장례식장, 2위 주차장, 3위 식당. 신경외과가 식당과 비슷한 수준의 수익을 올리며 4위에 올라섰다는 기록이 발표되자 병원장의 특급 칭찬이 쏟아진다. 반면 집계 기간 한 달 만에 적자 4억1252만원을 기록하며 최하위에 등극한 외상학과엔 쓴소리가 날아든다. 코믹한 터치로 그려지긴 하지만, 죽음이 숫자로 치부되는 상황이 뼈아프다. 사람 생명을 다루는 병원에 각 과를 평가하는 기준이 '수익성'이라는 사실이 서글프다.
배우 앙상블도 좋다. 항문외과를 선택하려다 백강혁의 의술에 반해 외상외과로 진로를 바꾼 펠로 양재원(추영우)은 여러 난관을 거치면서 의사로서의 도리를 알아 나간다. 백강혁이 완성형 인물이라면, 양재원은 성장형 캐릭터. 제자이자 동료로서 백강혁의 손발이 돼주는 양재원 캐릭터는 추영우를 만나 더욱 따뜻해졌다. 누군가의 애인이거나, 러브라인을 위한 캐릭터가 아니라, 그 자체로 1인분의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 내는 천장미 간호사 역의 하영도 인상적이다. 항문외과 과장 한유림을 사랑스럽게 연기한 윤경호도 빼놓으면 섭섭할 것이다. 적인 줄 알았던 누군가가 '우리 편'이 되어가는 과정을 코믹하면서도 낭만적으로 그려내며 감초 이상의 역할을 해낸다.
그러나 누가 뭐래도 <중증외상센터>는 주지훈의 드라마다. 주지훈의 날카로운 외모와 그 특유의 유들유들한 기질 두 가지가 최적의 상태에서 발화되어 만화적인 백강혁을 너무 붕 뜨지 않게 하는 안전핀 역할을 해낸다. 선배 연기자들에게 사랑받는 것으로 유명한 주지훈이 후배들을 이끄는 모습에선 '주지훈 개인의 성장'이 보이기도 한다.
드라마를 보다 보면 연출이 주지훈에 대한 이해도가 높다는 인상이 드는 지점도 여럿 발견된다. 아닌 게 아니라, 메가폰을 잡은 이는 <좋은 친구들>(2014)로 주지훈과 호흡을 맞춘 이도윤 감독이다. 연출 제안을 감독에게 먼저 건넨 이는 주지훈인 것으로 알려졌다. 여러모로 <중증외상센터>는 두 사람의 오랜 인연이 낳은 '좋은 결실' 같다. "널 믿는 날 믿어!" 극 중 백강혁이 양재원에게 건낸 이 대사는 주지훈-이도윤 감독 두 사람 관계에도 적용 가능한 말이 아닐까. 이제, 그 믿음이 시즌2로 이어질 일만 남은 것 같다.
('시사저널'에 쓴 칼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