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상과학(SF) 장르? 아니다(NO). SF의 탈을 쓴 '봉준호 장르'라고 표현하는 게 더 적절하다. 봉준호 감독의 3번째 영어 영화 <미키17> 이야기다. <미키17> 메인 투자자는 할리우드 대형 스튜디오 워너브러더스다. 워너브러더스가 수혈해준 제작비는 1억1천800만달러, 우리 돈으로 1천700억원에 달한다. 정말 '억' 소리가 난다. 그러나 영화계에서 자본은 늘 양가적이다. 개성을 뽐내던 영화 창작자들이 자본에 갇혀 창의성을 잃은 경우가 어디 한둘인가. 돈을 주는 입장에선 감 놔라 배 놔라 하기 십상. 그러면 영화는 산으로 가버린다. 그 누구의 영화도 아닌 게 돼버린다.
<미키17>은 다르다. 영락없는 봉준호 영화다. 봉준호 전작들과 접점을 이루는 구간도 많다. <설국열차> <기생충>이 머금은 계급론과 시스템의 부조리, <옥자>가 보여준 인간과 비인간의 교감 등 봉 감독이 천착해온 주제들이 넓게 펼쳐진 모양새다. <설국열차>의 세계관에 <기생충>의 문제의식을 녹이고, <옥자>의 감성을 더한 일종의 '짜파구리' 같은 영화랄까. 장르를 뒤섞는 과감한 추진력. 비극 속에서 희극을 건져 올리는 봉준호 특유의 태도도 굳건하다. 심지어 로버트 패틴슨에게서 송강호 연기가 보인다고 하면 믿겠는가. 진짜 그렇다. 그래서 신기한 영화다.
죽는 게 직업인 남자
"잘 죽고, 내일 봐!" 어색하게 들리는 이 말이 미키(로버트 패틴슨)에게는 현실이 된다. 위험한 일에 투입됐다가, 죽으면 다시 프린트(출력)돼 교체되는 익스펜더블(expendable·소모품)이어서다. 프린트될 때, 이전의 기억도 고스란히 이식되는 게 익스펜더블의 운명. 엄밀히 말하면 익스펜더블은 많은 영화에서 다룬 '복제인간'과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언어가 사고를 지배한다고 했던가. 호칭의 차이가 존재감의 차이를 불러온다. (과학 기술이 느껴지는 '복제인간' 대신) 대체 가능한 '소모품'으로 호명되면서, 미키는 하찮은 취급을 당한다. 안쓰럽기 그지없다.
원작은 미국 작가 에드워드 애슈턴의 소설 <미키7>이다. 7이 17로 바뀐 건, 죽어 나가는 미키가 더 많아져서다. 실로 익스펜더블이 된 미키는 방사능에 노출돼 죽고, 바이러스에 감염돼 죽고, 다쳐서 죽고, 유독 가스에 노출돼 죽고, 죽고, 죽고, 또 죽는다. 그리고 그 수만큼 프린트된다.
영화의 배경은 인류가 우주 식민지 원정에 나선 2054년이지만, 미키는 흡사 19세기 노동자 찰리 채플린처럼 일한다. 컨베이어 벨트 앞에서 기계 부품으로 전락한 영화 <모던타임즈>(1936) 속 채플린 말이다. 죽는 게 직업인 탓에, 4대 보험은 꿈도 꿀 수 없다. 연금도 언감생심이다. 초과 근무에 시달리고, 과로에 치인다. 피로한 그의 얼굴에서 우리 시대 저임금 노동자의 그늘이 엿보인다. 실제로 봉준호 감독은 죽음의 횟수를 늘린 것에 대해 "더 다양한 죽음을 통해 죽는 게 일상이 된 노동자를 표현하고 싶었다"고 밝힌 바 있다.
원작에서 역사학자였던 미키가 영화에서는 마카롱 가게를 열었다가 쫄딱 망한 자영업자 흙수저로 탈바꿈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악덕 사채업자에게 쫓기다 인생 코너에 몰린 미키가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건 '지구 탈출'. 그중에서도 가장 비인간적인 익스펜더블 계급이었다. 영화는 돈 때문에 극한으로 내몰리는 노동자를 통해 '위험의 외주화'를 비판하고 풍자한다. 자본주의가 노동자의 삶을 어떻게 착취하는지를 보여준다.
영화는 미키 17이 임무 수행 중 얼음 동굴에 추락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상부는 미키 17이 행성 원주민이자 괴물인 '크리퍼'들에게 잡아먹혔을 것이라 판단하고 미키18을 프린팅한다. 그러나 인간의 선입견과 달리, 크리퍼들에게는 휴머니즘이 넘친다. 크리퍼들의 도움으로 살아 돌아온 미키 17은 그렇게 미키18과 마주한다. 그런데, 이걸 어쩌나. 이 세계에선 '1+1=2'가 아니다. 그건 처벌, 즉 영구 삭제를 의미한다. 같은 뿌리에서 나온 익스펜더블이 존재하는 '멀티플'은 법적으로 금지돼 있기 때문이다.
18명의 미키는 동일 인물일까 아닐까
둘을 같은 존재로 봐야 할지, 다른 존재로 봐야 할지 미키 17과 미키18은 선택해야 한다. 하나가 죽거나, 공생하거나. 미키의 여자친구인 나샤(나오미 애키)가 '순한맛' 미키 17도, '매운맛' 미키18도 모두 '소중한 나의 미키'라고 주장하면서 상황은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미키 17>은 여기서 중요한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 나샤의 믿음처럼, 수없이 재생되는 미키는 동일 인물일까. 기억이 보존될 뿐 몸은 프린팅된 것이니 다른 인물일까. AI 기술을 활용한 'AI 클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시점에 <미키17>이 던지는 질문이 꽤 묵직하다.
독재자 부부인 '케네스 마셜(마크 러팔로)-그웬(토니 콜레트)'이 등장하는 것도 원작과 달라진 점이다. 우주 식민지 개척의 선봉장이 되고 싶어 하는 탐욕스러운 정치인 마셜에게서 해외 관객들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떠올린다고 한다. 국내 관객들은 아마도 국내 정치 상황을 돌아보지 않을까. 남편 마셜을 쥐락펴락하는 그웬은 특히나 문제적 인물이다. 오해는 말자. 봉준호 감독이 시나리오를 쓴 건 2021년이라고 하니까.
앞서 언급했듯, 봉준호 전작들을 떠올리게 하는 구간이 꽤 많다. 인물들도 그렇다. 돈도 빽도 없는 흙수저 미키는 <설국열차>의 꼬리 칸 탑승자인 커티스(크리스 에번스)와 닮았다. 반지하 삶을 살아온 <기생충>의 기우(최우식)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그들이 추동하는 방향은 다르다. 커티스와 기우는 자기를 둘러싼 시스템의 모순을 느끼고, 그곳에서 적극적으로 탈출하고 싶은 욕망을 지닌 인물들이었다. 반면 미키는 시스템에 순응해온 인물. 소모품 취급을 당하던 미키가 인간성을 회복해 나가는 것이 <미키17>의 핵심 중 하나다.
이때 미키를 변화로 이끄는 건 '사랑'이다. 봉준호 감독 작품에서 '휴먼'끼리의 사랑이 전면에 나온 건 처음이다. '휴먼끼리'임을 굳이 강조한 것은, <옥자>도 미자(인간)와 옥자(동물)의 사랑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이러거나 저러거나, 봉준호의 러브스토리가 흥미롭긴 매한가지다.
봉준호 감독의 작품을 줄 세웠을 때, <미키17>을 상위권에 올려두지는 못할 것 같다. 일단 영화적 감흥이 예상보다 옅다. 영화적 잔상도 빨리 휘발된다. 왜 그럴까. 깊게 파기보다 넓게 판 전략 때문인 것 같다. 가령 영화엔 유의미한 철학적 질문들이 묵직하게 들어서 있지만 그에 대해 충분히 사색할 시간은 주어져 있지 않다. 빠르게 다음 주제의 챕터로 넘어가기에 다소 어수선하게 다가온다.
꼭 필요한가 싶은 신들도 있다. 스티브 연이 연기한 (미키의 친구) 티모의 후반부 분량이 대표적이다. 후반부 티모는 지구에서의 과거를 끌어오는데, 이로 인해 미키 17과 미키18의 이야기 전개가 지체되는 느낌을 준다. 하지만 <미키17>의 극장 관람을 추천하는 것은, 봉준호의 개성이 쉽게 복제하기 힘든 남다른 종류의 재능임을 증명하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로버트 패틴슨의 연기가 진화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근사한 장이기도 하다.
('시사저널'에 쓴 칼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