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830
도대체 어느 누가 혼인율이 너무 낮은 세상이라 했는가. 회사만 가면 체감 혼인율 95퍼센트. 심지어 기혼자가 아니라 이제 곧 식을 앞두고 있는 이들의 체감 비율이 그러하다. 매일매일 결혼'식' 이야기를 듣지 않은 것이 없다. 기승전 결혼'식'얘기.
결혼'식'을 하기 위해서는 일단 어마어마한 경쟁률과 웨이팅을 뚫고 식장을 거의 일 년도 전부터 잡아야 하며, 대충 한 빠르면 여섯 달, 짧으면 두세 달 전부터 '웨딩 플래너'를 고용해서 관련된 스튜디오, 메이크업샵, 당일 드레스 들어주는 도우미 등등 예약하는 절차를 거쳐야 하는데, 일단 여러 업체와 미팅 스케줄을 잡는 것이 고역이며, 설사 한 업체를 골랐다 하더라도 일정 잡는 것 또한 전쟁이다. 이것을 직장생활과 병행한다면 그냥 투잡을 뛴다고 말 해도 전혀 과장이 아니다. 이 모든 전쟁 같은 노동 업무 행위를 하지만 오히려 돈을 내야 한다. 물론 시세도 다 알고 있다. 그중에 가장 충격적인 시세는 식 당일의 메이크업과 옷 대여 비용인데, 고작 몇 시간 남짓 위한 그 비용이 조금 입소문 자자한 곳에서 하자면 대기업 다니는 한 사람의 월급값이 우습다. 도대체 나는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얼마나 귀에 딱지가 박히게 결혼 얘기만 들었으면, 단 한 번도 결혼'식' 프로세스에 대해서 알아본 적이 없는, 그러니까 결혼 계획도, 생각도 없는 내가 이 모든 절차를 알고 있다는 것에 냉소가 그냥 지어진다.
이야기는 늘상 비슷하다. 어디 업체를 보러 간다, 미팅 잡는 게 너무 힘들다, 어디 업체는 어떻냐, 거기는 얼마던데 어떻더라, 미팅 갔는데 뭐라 뭐라 하더라, 굽은 몇 센티를 신어야 예쁘냐, 페디큐어도 해야 하냐, 발 보이게 사진 찍냐, 사진 찍을 때 어디가 예쁘더라, 꽃은 얼마인데 할인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더라, 머리는 어떻게 할 거냐, 올림머리를 할 거냐, 몇 시간이 걸리는데 신발은 발이 아프지 않냐 등등 등등 등.. 여태 잘 참아왔는데 오늘은 웬일인지 기꺼이 충전해 온 소셜 에너지와 공감 에너지를 다 소진하여 도저히 더는 듣지 못하겠어서 중간에 슬쩍 자리를 피했는데, 나가서는 내가 '이해심은 없어지고 속만 좁아진 사회성 결여 구제불능 인간'이 되어버린 것은 아닌가 부정적인 자기 성찰만 하다가 돌아왔다.
서로 함께하겠다고, 비바람이 몰아쳐도 함께 잘 헤쳐가보겠다고, 가족 친지 여러분들 우리는 서로가 있으니 너무 걱정 마시고 우리의 앞날을 축복해주시라고 백년해로 백년가약하는 것은 참으로 기특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고 아름다워 마지아니하다. 하지만, '식'에 대한 지나친 관심은 그것을 듣는 청자 입장에서, (음.. 내 입장에서,) 누적되는 피로도가 상당하다. 결혼은 통상적인 기술·가정이나 도덕 교과서에 왕왕 등장했던 '관혼상제' 중의 하나이다. 관례, 혼례, 상례, 제례 중 두 번째, 그러니까 하나의 '의례'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그저 '의례'의 형식일 뿐인 '식'에 혈안이 된 모습은 약간은 병적으로 집착하는 모습처럼 보이는데, 이것은 비유하자면 마치 친인척 한 분이 돌아가셨을 때의 의례 즉, 장례'식'에 지나치게 몰두하는 것과 같은 이상한 모습이다. 어느 분이 이번 장례식에 오실지 궁금해하고, 누구까지 이 이벤트에 초대를 해야 하는지 밤낮으로 고민하며, 조문객을 받을 때 복장은 무엇으로 해야 보기에 좋을지, 근조화환은 어느 업체가 이번 장례식을 잘 표현할 정도로 잘하는지, 장례식 음식을 어떤 업체를 써야 모두 만족하며 후회하지 않을 장례식을 장식할 수 있는가를 고민하는 사람의 모습과 같은 것이다. 고인을 추모하며 마음속에 기리는 시간인 장례의 본질을 흐린 채, '식'을 이루는 부수적인 항목들 자체에만 관심을 가질 사람이 어느 누가 있겠는가. 하지만, '장례'와 동일 범주에 속했지만 '혼례'만은 그 식 자체에 지나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다소 피로해 보이는 것은, 지나친 공대생 실용주의와 독일 살이 실용주의의 시너지가 만들어낸 끔찍한 혼종인 나란 인간의 푸념일 뿐일까.
결혼은 선택이라는 의견이 이제는 진리의 명제처럼 박혀버린 현대사회이다. 하지만 '결혼'을 당연하게 하지 않는 문화가 되면서 이는 아이러니하게 어떤 사치 품목의 재화와 서비스 시장으로 변화한 것 같다. 누구나 하는 것이 아니니까 특별해졌고, 그 간헐성과 특별성은 '완벽주의' 현대인 심리와 시너지를 발휘해 누구보다 아름답게, 누구보다 행복해 보이게, 그 누구보다 완벽하고 결점 없는 그런 결혼식을 위해 혈안이 된 풍경을 생성했다. 우리들의 심리를, 보다 좁게는 한국인의 정확하게 파고들어 어떤 냄새를 맡고 즉각 결혼 시장이라는 성공적인 세계를 연 메이커들에게 감탄할 따름이다.
이해는 할 수 있다. 일생일대의 이벤트를 진행한다는 데에서 오는 설렘, 새로운 시작에 대한 기대가 있을 것이며 거기에서 오는 기대감과 긴장감, 그리고 준비하는 과정에서 오는 고충 같은 것을 같은 함께 나누고 싶은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러니까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과 폭발적인 유대감을 형성하고, 그 세계에 대한 '공감'으로 위로를 받고 격려가 될 것이다. 공감의 힘은 너무도 크니까. 하지만, 한쪽의 강한 유대는 다른 한쪽의 소외를 만든다. 수적으로 열세하기까지 하다면 소외는 더 강세한다. 사실 내 쪽이 원하는 것도 결국에는 '공감'인 것이다. 사실은 나도 '공감'을 받고 싶은 것이다. 공감의 힘은 너무도 크니까. 솔직한 나의 생각과 의견을 말하고 이해받고 싶은데, 도저히 이해받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서 말 꺼낼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데에서 오는 소외감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의견과 생각 ㅡ 이를테면, '나는 현재 한국에서의 전형적인 '식'을 하는 것이 굉장히 돈과 에너지가 많이 드는 행위라고 생각해요. 돈도 없고, 무엇보다 부모님이 이제는 직장을 다 관두셔서 축의금 회수에도 별 관심 두지는 못해요. 그냥 백년가약 하고싶은 사람이라면, 같이 살다가 애가 생기면 그대로 키우고싶어요. 형식절차 없이. 결국 본질이 중요한것같아서요. 맞아요. 혼외출산 인거겠죠. 시대를 앞서나간 생각이라고 생각하실수도 있죠. 그냥, 말하고싶은건, 그대들이 하는 그 형식을 원하지는 않는 것 같아요. 그래서 공감 받지못해서 조금 슬퍼요. 아무튼 제가 볼땐 돈과 에너지가 너무 들어가는데, 그럼에도 전형적인 흐름대로 해 나가면서 불만이 없이 성실히 임하는 그대들의 태도가 제일 너무 부러워요. 예전부터 저는 왜인지 뭔가 좀 꼬아서 보면서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지 자신이 이해가 안 갈 때가 많거든요. 지금 이렇게 말하는 것도 뭐 그것의 연장선이라고 할 수 있죠. 이것이 팔자 이런 걸까요?'와 같이 솔직한 마음이라 여론과는 결이 완전히 달라서 공감은커녕 아웃싸이더 되는 지름길이 되는 견해 ㅡ 을 말했다가는, 평판에 문제가 생겨 여생에 크나큰 타격을 입을 것을 직감적으로 알기에 그저 입을 다물고 있다는 슬픔, 답답함, '공감'을 구걸할 수 없을 것 같다는 그 '소외감'.
아니다. 사실은 사실이 아니다. 내가 진심으로 축복하는 결혼식, 심지어 사회도 축가도 도맡아 하는 결혼식들을 생각하면 혼인에 대한 축복이 있을 뿐, 결혼'식'에 대한 거부감은 없다. 그렇다. 상대방이 누구냐에 따라서나의 반응이 다른 것이다. 진리의 케바케인 것이다. '소외감'은 그냥 내가 지금 회사여서, 회사이기 때문에 그냥 필연적으로 드는 것 일수도 있겠다, 하는 결론.
소외감은 그렇다 치고, 결혼정보회사 광고 옆에 이혼 상담 변호 광고가 나란히 붙어있는 것을 보니, 끊임없이 새로운 고객을 창출하는 이것은 대단한 창조경제가 아닐 수 없다. 지나치게 똑똑한 시장 메이커들에게 감탄이 절로 나오는 그런 그림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