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상윤 Mar 10. 2017

대학원일지 2. 마지막 개강

마지막 방학을 되새기며

 개강을 한지는 일주일이나 흘렀지만 오늘에야, 안 좋은 기분으로 여유를 맞이했다. 방학이 지나갔고 드디어 대학원 마지막 학기다. 방학 중엔 여러 일들이 있었던 것도 같은데 막상 지나보고 나니 결과적으로 크게 달라진 것이 아무 것도 없어보인다. 기분 탓인지 아님 역시 방학이라 그런 건지.


 결론부터 먼저 말하자면 연구실에서 교수님과 준비하던 논문을 포기하고 다음 컨퍼런스에 저널을 내기로 했다. 논문은 다음 주 수요일에 마감이 잡혀있던 것에 비해 우리가 기대한 결과가 나오려면 시간이 너무 부족하다. 이 지경이 되고서야 되돌아본 나는 얼마나 안이했는가.


 1월 동안은 현재 작업 중인 프로젝트의 프레임웍에 쓰일 데이터 전송 매커니즘을 새로 구성하는데 오롯이 시간을 쏟았고, 본격적으로 인수인계 된 프로젝트를 들여다보며 논문을 위한 작업에 들어간 것은 2월이 다 되어서였다. 지금 돌아보니 시간 귀한 줄 모르고 있었구나 싶다.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돌아가서 손끝을 튕겨 마빡을 때리면서 딴 생각할 때가 아니라고, 정신 차리라고 말해줄 텐데.


 세상에, 심지어 2월에 들어서면서는 방학 전에 세운 계획을 지켜보겠다며 연구실 내에서 알고리즘 스터디까지 했었다. 감히 졸업 학기 앞둔 석사가 제 앞길 챙기기 급급하진 못할 망정 너무 판을 넓게 벌렸지. 내심 이제 석사로는 위가 없으니 연구실에서 이뤄보지 못한 새로운 분위기를 조성하고 싶은 생각도 있었다. 지금 내가 해두면 후배들이 계속 해주겠지 하는 개인적인 욕심도 있었고. 차라리 그걸 잘 계속 하면서 이어나갔으면 좋았으련만 바빠서 계획만 거창하고 두 세번 진행하다가 파토가 났으니 안타깝기만 하다. 아냐, 오히려 그 때 관둬서 그나마 이 모양인건가? 지나간 시간에 대고 이랬으면, 저랬으면, 가정을 세우는 것만큼 멍청한 짓은 없다지만 너무 아쉽다.


 2월 중반 즈음부턴 치명적인 버그가 있어서 그걸 잡으려 했는데 잡고 나와보니 그제가 되었다. 사실 위에서 다른 일들을 했던 것, 모두 다 필요없고 이것이 작금의 논문 지연 사태를 유발시켰다. 이 프로젝트를 굴러가게 하는 수식을 다 이해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막상 이 버그를 발생시킨 코드를 몇 번이나 봤으면서도 넘겼을 뿐 아니라, 직접 고친 뒤에도 스스로 하루가 넘게 갸우뚱하고 있었으니 내가 지금까지 뭘 이해했다고 여겼는지 모르겠다.


 3월에 이르러서까지 버그를 잡지 못하자 초조함이 쌓여갔다. 와중에 주변으로부터 내가 구성한 코드 중 논리적으로 문제가 없는 부분마저 싸잡아 부정당하는 일을 견뎌내야 했는데, 짜증이 치솟는 동시에 문제가 됐던 부분이 내 손으로 코딩됐던 걸 부정할 순 없으니 불필요하게 따지지 말고 받아들이는 쪽으로 마음 먹었다. 그래서 뭐, 이후에 장난 식으로 걸고 넘어지는 것들도 겉으로야 받아 넘기긴 했지만 간혹 너무 연타가 들어올 땐 욱하는 면이 없잖아 드러나버려서 스스로 결정한대로 지키지 못하는 것 같아 마음에 좀 걸리기도 한다.


 내게 기분 나쁘게 느껴지는 장난을 좀 더 매끄럽게 받아내야겠다는 반성을 하게 된 것이야 물론 한 인간으로써 좋은 진전이긴 하다만, 진정 이 사태를 촉발시킨 계기를 돌이켜보는 것에 더 중점을 둬보자. 그것은 개발에 대한 내 지나친 오만이 아직 잘 모르는 범주의 것까지 집어 삼켜 버린 것 같다. 난 모든 걸 잘 알고 있다고 스스로 과신했기 때문에 눈 뜬 장님이 된 거지. 이 건은 그런 안이한 마음가짐에 마치 경종이 울리는 것처럼 보인다. 그동안 쌓아올린, 주변으로부터의 내 개인의 능력에 대한 평가가 어느 정도 낮아질 여지를 남겼다.


 물론 실제로 남들이 그렇게 생각하는지 아닌지는 모를 일이고, 또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가 우려하는 것은 이를 계기로 앞으로 어떤 사건에 대해 내가 무언가 주장을 펼치면 그에 대한 근거 제시의 정도가 더욱 구체적어야 할 필요가 더 커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일에 정성을 들이는 것은 좋지만 그 과정이 배보다 큰 배꼽마냥 지난하리란 것은 너무 당연하다.


 잘 타고 가던 자전거에서 손잡이를 놓고 패달만 밟는 것 마냥 아슬아슬한 기분 상태를 오가다가, 낮에 문득 창밖을 내다 보고 있으면 새 학기의 기대감으로 가득한 거리가 보인다. 같은 개강이지만 지금의 나와 저 거리의 사람들이 맞은 개강은 다른 것이 분명하다. 내 쪽이 훨씬 기분 별로인 채로 말이다. 어차피 일정도 밀렸고 조급한 상황에서의 진척이 오히려 독이 되니, 다음 걸음을 딛기 전에 나도 잠깐 쉬어야 할 것 같다. 쉬면서 정신 좀 차리면 다시 또 제대로 굴러갈 수 있겠지.



 길게 길게 생각나는대로 쓰고 있었지만 그래, 결국은 다 해내지 못한 것에 대해 스스로에게 보내는 또 다른 반성문이 되버리고 말았다. 이런 식이라면 앞으로의 모든 '대학원일지'를 제목으로 달고 나갈 글들의 성격이 썩 좋지 않을 것 같으니 다음엔 좀 더 즐거운 글이라도 써야겠다. 시간이 너무 늦어져, 오밤중에 어떤 헛소리를 썼을지 한 번쯤은 다시 읽어보고 게재하는 것이 좋겠지만 내일 다시 읽어보려고 마음 먹곤 분명 또 서랍에 쌓이기만 할 것 같으니 일단 게재는 하고 볼까 싶다.

작가의 이전글 대학원일지 1. 실습 조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