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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윤 Mar 11. 2024

일기 4. 반갈 키보드

이 세상에 마침 이런 게 있더랍니다

최근에 새 키보드를 하나 샀다. 아, 세간의 인식에서 키보드라고만 하면 대체로 그냥 멀쩡하게 생긴 번들로 따라오는 키보드 형태에서 크게 벗어나질 않으니 '기계식 키보드'를 새로 샀다고 정정하는 쪽이 옳겠다.


키보드에 대한 취미가 어느 선을 넘어가면 그 형태가 극악무도해지는 방향으로 빠르게 발산하는데, 이는 대체로 일반 대중의 상상 속 키보드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는 편이다. 이번에 내가 산 키보드도 그 방향으로 일보 정도 전진한 형태를 띤다.

https://www.keychron.com/collections/75-layout-keyboards

Keychron Q11 이라는 키보드로 75% 레이아웃 키보드인데, 내가 산 모델 외에도 75% 레이아웃에 속한 것들의 생김새를 보면 방향기가 좁은 틈 어디에 어거지로 붙어있는 느낌이거나, Home, End 등의 보조키들도 원래 자기가 있던 곳이 아니라 엄한데 일렬로 놓여있거나 한 것을 볼 수 있다. 원래 개인적으론 이렇게 키를 줄이고 위치를 비정상적인 쪽으로 옮겨가면서까지 만들어놓은 키보드들을 그렇게 좋아하진 않는다. 그럼에도 이 키보드는 꼭 하나 장만해야만 했다. 바로 위 사진에서 볼 수 있듯, 반이 갈라지는 형태이기 때문이다...!


잘 보라. 반이 갈라진단 말이다!


이런 류의 키보드를 스플릿 키보드라곤 하지만 내 입에 착 달라붙진 않는 느낌이라 아쉽다. 반갈죽이라는 말이 언젠가부터 유행이었으니, 반갈 키보드라는 말도 쓰지 않을까 해서 검색을 해봤는데 이미 몇몇 사람들의 손에서 스플릿 키보드와 반갈 키보드라는 말이 섞여 쓰이는 게 보인다. 나도 반갈 키보드에 힘을 좀 보탤 테다. 좀 더 밀어붙여서 말하면 '반갈키' 정도까지 줄여서 말하고 싶은데, 그건 역시 좀 급진적인 느낌이지.


검색을 해보면 근 몇 년 사이로 여러 가지 형태의 제품들이 나오고 있어서 조금씩 그 형태나 구체적인 기능 면의 차이가 있다 보니 내가 딱 원하는 제품을 찾기 위해 그 미세한 차이를 찾아 헤매는 재미도 있는 편이다.


이번에 사들인 키보드는 안타깝게도 무선 기능은 지원하지 않는데, 내가 반갈류를 찾아보고 있던 시점에선 아쉽게도 뭔가 기능상 하나씩 아쉬운 것들만 나와서 무선의 기능을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선이 눈에 거슬리긴 하지만, 그 외엔 모든 부분이 만족스러우니 이 정도에서 타협을 볼 수밖에.


이런 형태의 키보드를 두고 혹자는 팔을 좁게 놓지 않으니 어깨가 말리지 않고, 좀 더 장시간 컴퓨터를 사용하는데 있어 자연스러운 자세로 사용하게 되니 몸이 편해지고, 아프지 않아서 좋다고 한다. 다시 말해 인체공학적이라 좋다는 것이다. 물론 그 때문에 이런 키보드가 탄생한 것이긴 할 테다. 하지만 그 결과 기다랗던 스페이스바가 둘로 쪼개져 나뉘는 기형적 구조가 되었다. 세상 누가 공백을 입력하기 위해 키보드를 한 번은 오른쪽, 한 번은 왼쪽을 누르는 식으로 타이핑을 할까. 어느 한 쪽의 기능을 다른 키가 눌린 듯 동작하도록 대응시켜도 어색한 것은 마찬가지이다. 어차피 하나의 기능을 하는 키가 둘 이상 존재하게 되는 비이성적인 구조이며, 그저 균형미를 위한 소모적인 장치에 불과한 것이다.


그렇다면 본질적으로 이렇게 갈라져버린 스페이스키가 반드시 쓰일 수밖에 없는 사용처란 것이 세상에 있기나 한 것일까? 놀랍게도 그런 게 세상에 존재하고 있다. 마치 이미 짝지어졌던 운명인 것처럼, 세상에 둘 도 없을 존재 이유라 할 법하다. 그것은 바로, DJMAX 8키를 원활히 플레이하기 위해서이다. 오로지 그것만이 이 키보드가 가진 반갈 형태의 의미를 온전히 끄집어 내 사용하는 방법이라 하겠다. (깔깔깔)

8키 유잼

내가 어릴 적부터 즐겨하던 이 게임은 DJMAX라는 것으로, 8개의 주 키와 2개의 보조키를 이용하는 리듬 게임이다. 나는 왼손에 Q, W, E, Space 키를, 오른손에 P, [, ], 우측 Alt 키를 주 입력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새로 들인 키보드의 오른쪽에 놓여있는 두 번째 스페이스바는 누르면 스페이스가 아니라 우측 Alt키가 눌린 듯 동작하도록 고쳐두었다.


내가 원래 게임을 하던 키보드로는 더 이상 빠르게 실력이 늘지 않는 나이에 접어든 탓인지 작디작은 Alt키에 엄지를 똑바로 연타하기가 매우 힘들었다만, 이제는 넘어갈 수 있다. 한계 돌파란 말이다! 크, 이 맛에 돈 주고 새 장비 사는 거지. 이게 바로 30대다. (깔깔깔2)


지금 이 글도 만족감 가득 안고서 반갈 키보드로 쓰고 있는데 새삼 나쁘지 않은 것 같다. 단점이 아예 없냐 하면, B 키가 왼쪽에 있다는 점 하나 있을 수 있겠다. B 키가 왼쪽에 있는 점이 왜 문제인지는 직접 쳐보려 하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영어로 B키를 치려고 하면 자연스럽게 왼손이 간다. 그러나 한글로 B 키는 ㅠ에 대응하는데, 즉, 모음이다. 이 탓에 대개의 사람들은 오른손으로 입력하려 손이 움직일 것이다. 때문에 유독 ㅠ가 달린 글자를 입력하려 할 때면 신경 써서 왼손으로 글자 자체를 쳐내야 한다. 이 정도는 즐겜을 위해서라면 충분히 견딜 수 있다. 아니, 애초에 이 게임을 목적으로 산 것이라, 다른 데서도 쓸 수 있다는 게 오히려 감지덕지인 샘이다.


이런 키보드가 좀 더 보편화되지 못한 것도 조금 아쉬운 점이긴 한데, 회사에서도 사놓고 쓸 만큼 가격이 저렴하진 않기 때문이다. 이 키보드를 충분히 좌우에 벌려놓고 쓰면 그 가운데에 노트를 두고 편하게 아이디어를 끄적이다 타이핑하는 것을 오가는 것이 꽤나 편리할 것 같은데 이걸 회사에 두고 쓰자니 집에서 게임할 때 쓰려던 본래의 목적에서 너무 벗어나서 아쉽다. 출퇴근마다 들고 다니자니 번거롭고 말이다.


검색하다 보니 이런 걸 직접 만들어서 쓰는 사람도 있던데, 나도 정 필요하면 만들어볼까 싶다만 굳이 거기까지 해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드는 걸 보니 내 성격 상 아마 앞으로도 영 시도하긴 어렵지 싶다. 어쩔 수 없지. 지금은 이 장난감에 만족하고 열심히 갖고 놀아야 할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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