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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작가 Jun 11. 2023

엄마의 기억은 유통기한이 몇 년인가요?

돌아가신 엄마에게 효도하는 법

회사에서 진행하는 일본 후쿠오카 호텔 추첨 이벤트에 당첨이 되었다. 


아뿔싸, 여권을 이전 집에 두고 나왔다. 

찾으러 가야 하는데 자취를 시작하고 나서 1년 동안 연락 한번 안 드린 아버지를 만나야 한다. 


카톡을 보냈다. 

"아버지, 시간 되시면 한잔 하시죠."


아버지는 트럭일이 늦게 끝나니 8시 반쯤에 당신이 트럭을 주차하는 곳으로 오라고 하셨다.

저녁이라 보이지 않는 어두컴컴한 길을 운전해서 들어가니 여기저기 중장비들이 늘어서 있는 

좁은 골목길에 멈춰서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얼마 안 되어 아버지의 트럭이 보였다. 

트럭에서 내리는 아버지의 짧은 다리가 그날따라 야위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가 내가 운전하는 작은 차에 몸을 욱여넣으셨다. 

조수석에 아버지가 앉으시니 처음 아버지에게 운전을 배웠던 때가 생각이 났다.

그때는 정말 가르치려고 하시는 건지
혼내려고 하는 건지 구분이 안될 정도로 욕을 많이 먹었다. 


아버지의 집에 도착해 좁은 공간에 주차를 능숙하게 하는 내 모습에 아버지는 
"이제 능숙하게 잘하네!" 라며 한 말씀하셨다.


만나기 싫은 새엄마를 제외하고 아버지와 단 둘이 한잔 하려던 나의 계획은 무산되었다. 

풀어야 하는 문제는 풀고 먼저 사과를 구해야 한다는 게 아버지의 주장이었다. 


울며 겨자 먹기로 동의를 하고 아줌마도 합류해 같이 한잔 하기로 하였다. 


나는 그때 당시에 왜 그렇게 갑작스럽게 나갔으며 그날 다퉜던 기억에 대해 언급하는 
아줌마와 다시 설전을 하기 시작했다. 


결국 아버지와 아줌마의 합동공격으로 나는 너덜너덜 해진 상태로 법정에서 패소한
비참한 범죄자가 되어 있었다.

뭐, 어차피 기대도 안 했기에 그쯤하고 넘어가기로 하였다. 항상 이런 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아버지가 어머니 산소의 이용기간이 20년이 다 되어가니
올해 어머니의 기일인 7월 1일쯤에는 화장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그걸 왜 이제 말하냐 따져 묻고 싶었지만 사실 그 내용은
내가 더 잘 알고 있어야 하는 문제였기에 넘어가기로 했다.


주위에 이런 경우를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나는 아버지에게 우선 여쭤보았다. 

"아버지, 제가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요?" 
 "돌아가신 분인데 거창하게 해 드릴 필요 없으니 화장해서 인근 땅이나 강에 뿌려드려도 괜찮다 생각한다."


나는 어떻게 당신의 죽은 전처를 이렇게 처리하라고 할 수 있는지 조금은 화가 나서 물었다. 

"아니 아빠, 근데 그래도 돼요? 그거.. 불법 아니에요? 그리고 그래도 아버지 전 부인인데 

그렇게 하고 싶으세요 정말?"

"네가 그런 걸 내 앞에서 묻는 건 예의가 아니야.
그런 문제는 이제 너네가 알아서 해야지." 


뭐.. 틀린 말은 아니어서 그냥 알겠다고 했지만,
난 도저히 아버지의 그런 말씀이 서운함으로 다가와 머릿속에서 잊히지가 않았다.


다음날 휴일인 6월 6일, 나는 납골당 영업을 하는 업체에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을 말씀드리고

일단은 가장 저렴한 걸로 알려 달라고 여쭤보았다. 


생각보다 묘지 이전이 꽤 번거로운 작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선, 어머니의 묘를 이전하려면 개장신고를 먼저 해야 하는데

개장신고는 해당 지역에 해당하는 읍. 면. 동사무소를 방문하여 직접 신고를 해야 한다. 

 

 개장신고 후 해당 지역에 있는 화장터에 예약을 해야 하는데
이전하기 15일 전부터 예약이 가능하다고 하였다.


대략적인 이전 비용은 이 정도였다. 


개장비용 - 인부들 임금 약 60만 원

화장비용 - 약 45만 원 

납골당 안치 - 약 150만 원 ~ 1000만 원 (1층~10층 층마다 가격이 다름)

대략적인 총금액 : 250만 원 


갑작스럽게 혼자 지출하기에는 조금 부담스러워서 동생에게 반반씩 지불을 제안했다.

 그런데, 동생의 대답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상관없어, 뿌려도 되고 납골당에 모셔도 되고. 형은 어떻게 하고 싶은데?"


상관없다는 단어가 동생을 너무 실망스럽게 만들었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시신을 어떻게 해도 상관없다는 말이.. 너무 잔인하게 들렸다. 

차갑고 냉정했다. 그 순간 그걸 중요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나 자신이 너무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근데 그래도 우리 어머니셨잖아.
나는 그래도 나중에 가족들이랑 같이 뵈러 갈 고시 없으면
이 결정이 후회될 거 같아.

"형이 그렇게 하고 싶으면 그렇게 해야지."

"그래, 고맙다" 


나는 어렸을 때, 손재주가 정말 없었다. 집중력도 너무 없어서 뭘 하나 만들어보려고 하면 

주의가 산만해서 도무지 하나 만들기가 너무 힘들었다. 


한 번은 어버이날에 카네이션을 만드는 시간이었는데, 어쩌다가 겨우 하나를 만들었는데 

너무 못생겨서 어머니에게 드리기가 부끄러웠다. 


그래도 어버이날이니 드려야 한다 생각하고 선물이라고 드렸는데,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남들에 비해 못생긴 카네이션을 나무라셨던 것 같다.


그렇게 싫은 소리를 하시고 나서 나는 그
카네이션이 못 생겨서 버렸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우연히 어머니의 물건을 정리하다가 

고이 간직해 두신 내 카네이션이 고이 보관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눈이 빠지도록 울었던 것 같다. 


어머니를 납골당에 모셔드리기 위해 가격을 알아보자 

납골당도 층마다 가격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층은 150 2층은 250 3층 400 중간층은 450 

내 키에 알맞게 보기 좋은 층은 애석하게도 가장 비싼 층에 속했다. 


나이를 먹고도 이런 비용을 계산하고 있는
나 자신이 너무 초라하고 속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휴일이 끝난 다음날 묘원에 전화를 해보니 다행히 15년 연장이 가능하며 

올해 안에 95만 원만 내면 된다는 얘기를 듣게 되었다.


한바탕 소동을 해결하고 나니 적어도 어머니 묫자리는 지킬 수 있게 되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한편으로 나 혼자 의미 없는 일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 같아 혼란스러웠다.


천주교 신자가 아직도 풍수지리 같은 걸 믿고 있다니..

구시대적이지만 왠지 모르게 어머니 묫자리는 지켜야 될 것 같다는 왠지 모를 사명감 같은 게 

나도 모르게 튀어나왔던 사건이라 매우 인상 깊은 한 주였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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