켄 마일스와 미국 자본주의의 관계에 대하여
영화는 그 자체로 산업화를 상징하는 자동차를 중심으로 미국의 이미지를 덧댄다. 서사에 중심적인 기업, 포드는 컨베이어 벨트를 도입한 최초의 기업으로, 포드의 컨베이어 벨트는 생산체계를 조직화하는 근대화의 표상이 되었다. 컨베이어 벨트는 자동차의 대량생산을 가능케했으며, 전 국민에게 팔려나간 포드 자동차는 결국 근대성을 전파하는 역할을 한 것과 다를 바 없다.
르망 24라는 대회도 의미심장하다. 르망 24의 구조는 3분 30초에 주파할 수 있는 짧은 구간을 24시간 동안 돌게 함으로써 드라이버를 극한으로 내몬다. 자동차가 근대성을 상징한다면, 자동차 안에 탑승한 자는 근대 자본주의에서 살아가는 시민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경주 구조는 자동차 생산구조 컨베이어 벨트와 함께, 24시간이라는 짧은 시간을 주기로 몇십 년을 동일하게 반복하는 근로자의 삶과 닮아있다.
한편 자동차를 미국적 풍경을 배경으로 카메라에 담아내기도 한다. 유럽 대륙에서 볼 수 없는 미국의 광활한 대지의 이미지를 배경으로 활용함으로써, 미국성을 자동차와 자동차 경주의 이미지에 첨가한다. 단적으로 켄이 드라이버로 처음 등장하는 경주 장소도 사막이며, 켄이 마지막으로 테스트 주행을 하는 숏에도 드넓은 사막이 담겨있다. 영화는 자동차를 실마리로 작품 전반에 미국의 근대, 산업 자본주의를 은유한다.
미국 근현대 배경 속에서 인물은 전형성과 보편성을 갖는다. 이윤 극대화는 근대 자본주의의 절대적인 운동법칙이다. 헨리 포드 2세를 비롯한 포드 수뇌부 행동의 가장 큰 배경 역시 이윤이다. 헨리 포드 2세도 르망 24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아버지와의 동일시 등 개인적인 동기 역시 작용하지만, 애당초 진입 목적이 이윤이었다. 셸비와 중간 다리 역할을 하는 마케팅 책임자도 그를 위하는 것 같지만 사실 이윤과 자리보전이라는 경제적인 이익을 우선시하는 인물이다. 결국 포드의 수뇌부는 쉐보레와 같은 다른 기업과의 경쟁에서 승리하여 이윤이라는 끝없고 추상적인 목적을 두고 자본을 쉬지 않고 굴리는 인물들이다.
켄 마일스는 첫 등장부터 기름때를 묻히고 있고 부자로부터 괄시받는 노동계층이다. 진짜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부채에 쪼들리며 자신의 정비소마저 압류되는 모습은 측은하게 느껴진다. (동시에 지나칠 만큼 전형적이다) 그는 자동차를 사랑하지만, 생업과도 관련되어 있다는 점에서 자동차와는 인연을 끊을 수가 없는 인물이다.
한편 셸비는 두 계층의 매개자 역할을 수행한다. 그는 드라이버이기도 했으며, 현재는 한 회사의 책임자이기도 하다. 두 계층의 이해를 중재하기도 하지만, 그는 결정적인 순간에 책임을 켄에게 전가하기도 한다. 왜 그는 단호하게 수뇌부의 제안을 막지 않았을까. 이것은 핵심 장면으로 이어지게 하는 동시에, 켄에게 고민을 떠넘기고 이후에 수뇌부에 화를 내는 위선적인 인물처럼 보이게 한다.
영화를 꿰뚫는 핵심적인 장면은 켄이 자동차 속도를 늦추는 쇼트이다. 이전까지 관객은 켄의 질주에 봉합되어 있었다. 데이토나에서의 짜릿한 역전에 스릴을 느끼며, 자동차 뒤에서 자동차를 따라잡으려는 듯한 카메라 워크, 켄의 옆자리 조수석이나 차 안에서 찍은 듯한 쇼트로 관객은 켄의 속도에 점진적으로 동화되며 익숙해진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순간에 켄은 속도를 늦춘다. 이전과는 달리, 카메라가 더 빠르고 자동차가 더 느려지게 함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이질감을 느끼게 한다.
이상하다는 감정은 우리가 설정한 정상성이라는 기준이 있음을 알려준다. 관객이 설정한 정상성은 이전까지 봉합되어 있던 켄이 질주하는 속도이다. 시속 300km, 7000 rpm을 왔다 갔다 하며 켄은 페라리와 경쟁한다. 그러므로 질주가 익숙해진 관객의 입장에선 느린 속도는 오히려 비정상의 것, 이상한 것이 된다. 속도를 살짝 늦췄을 뿐인데 영화적 체험에서 살짝 벗어나게 만들어, 관객이 서사에 봉합된 부분을 터뜨린다. 이로써 관객은 어느새 자본주의와 근대성에 함몰된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켄의 결정은 기존의 모습과 일관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상함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켄이 처음 드라이버가 된 것도 결국 자신의 행복을 위한 것이었다. 압도적인 1등이 되고 난 뒤 그는 스스로 행복하다고 자위하는 듯한 노래를 부르며 눈물을 흘린다. 그러나 정말 그가 흘린 눈물이 환희의 눈물이며, 그가 진정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켄의 자위적인 행복은 자본주의가 욕망을 질주시키며 끊임없이 새로운 소비와 소유를 통해 행복감을 강요하는 방식과 맞닿아 있다. 이러한 지점에서 판단한다면, 그가 속도를 늦추는 결정은 오히려 그의 처음 모습과 일관성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스스로 비정상성이 되었음에도 그것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켄의 이러한 선택이 결과적으로 일견 수뇌부의 결정에 순응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가 일시적으로나마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었던 상황임을 고려한다면, 켄은 거부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부조리한 근대 자본주의의 운동성을 거부하는 일탈적 행위를 함으로써 혁명가적 인물이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켄의 최후를 단순 사고, 불운에 의한 죽음이 아닌 근대 자본주의가 자신을 거부한 것에 대한 죄를 묻는 일종의 처벌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 그의 죽음은 르망 24 초반에 문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장면에서부터 암시된다. 고장 난 문은 제대로 닫히지 않는 것일 수 있지만, 반대로 제대로 열리지 않는 문일 수 있다. 프레임을 두들겨 문을 고치려는 필 레밍턴(레이 맥키언)의 망치질은 자본주의 운동성에 대한 켄의 빠져나올 수 없는 서약, 영원한 승차를 판사처럼 판정하는 것과 같다. 켄은 근대 자본주의와의 계약을 깼으니 죗값을 치를 수밖에 없으며, 켄의 죽음은 더 이상 필의 말처럼 "운이 나빠 단순히 못 빠져나왔다"라고 단순 치부할 수 없는 것이 된다. 켄은 순교자적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켄의 죽음은 결국 근대성에 대한 저항과 도전을 미국 사회가 용납하지 않은 결과이다. 이윤이라는 절대적 운동법칙을 무시한 개인은 미국 땅에 설 곳이 없다. 그는 근대 자본주의에 포섭되지 않기 때문에 이방인인 동시에 괴물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영웅적이며 순교자이기도 하다. 어쩌면, 트랙 위에서 페라리와 대결하였지만 그가 진정으로 대항한 것은 포드의 근대성, 포디즘일 수 있다.
60년대 중반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였고, 경제의 불확실성은 커져갔다. 켄이 죽은 바로 다음 해, 미국의 67년 경제성장률은 4% p 하락하여 2.5%에 그쳤다. 켄의 결정은 미국 자본주의의 끝없는 욕망의 결과를 직감한 것 아니었을까.(물론 그 이후로도 미국은 성장 중이다)영화에서 가장 중요하고 골머리를 썪인 부품은 엔진이 아닌 브레이크였다는 점에서 근대성에 기반한 질주하는 사회에 대한 반성의 메시지를 영화가 던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