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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P: 잭슨 폴락의 No.5]

무작위 속의 의미 찾기

by 권석준 Seok Joon Kwon
No._5,_1948.jpg 그림 1. Jackson Pollock의 No.5 (1948년작) (출처: Wikipedia)


한 때 세계에서 가장 비싼 단일 미술품은 잭슨 폴락 (Paul Jackson Pollock, 1912-1956)의 1948년 작품인 'No.5' 라는 그림이었습니다 (그림 1 참조). 이 작품은 2013년, 무려 15억 6천만 달러 (대략 1,840 억원)에 거래되었다. 겉으로 보면 예술적 감흥이라고는 전혀 찾아 볼 수 없을 것 같은 이 작품이 이렇게 초고가의 가치를 얻게 된 것은 물론 그 작품이 갖는 독특한 예술적 가치가 인정받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저를 포함한비전문가들 입장에서는 '아니, 마네나 모네 작품보다도, 하다 못해 몬드리안이나 칸딘스키 같은 같은 추상화가의 작품과 비교해도, 이런 장난기 섞인 것 같은 추상화가 이렇게까지 값이 비싸질 수 있다는 것인가? 실제로 이 가격으로 구입하는 사람이 있긴 하다는 것인가?' 라는 의문을 한 번 정도는 품게 될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잭슨 폴락은 'No.5'를 비롯하여, 'No.1', 'No.31' 등, 숫자로 타이틀이 매겨진 작품을 '만들 때', 붓으로 터치하기는 커녕, 페인트 붓이나 아예 페인트 통을 그대로 던지거나 흩뿌리거나 휘두르거나 하는 등의 드리핑 (dripping) 방식으로 독특한 작품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붓질이라도 했으면 그 노동력이라도 측정해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폴락의 작업 방식은 사실 거의 랜덤에 맡기는 방식이었으니 더더욱 그의 작품의 값어치가 고공행진을 하는 것이 잘 납득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폴락의 작품은 처음부터 비쌌을까요? 물론 대부분의 예술가가 그러하듯, 잭슨 폴락의 작품이 처음부터 유명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2차 대전 전후, 미국은 전승국이자 자유 진영의 최대 패권국으로서의 입지를 다져 가는 중이었습니다. 그런 미국에게도 아킬레스건이 하나 있었으니, 미국에서 독립적으로 발생한 예술적 영향력은 미국이 가진 최강대국이라는 위상과는 걸맞지 않다는 내외부의 비판들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특히 서유럽권 (특히 프랑스)에서 미국을 일종의 졸부인 양 무시해 왔던 밑바탕에는 이러한 예술적 깊이의 일천함이 항상 내재되어 있었습니다. 사실 미국 입장에서 봤을 때는 건곤일척의 대전에서 같이 피를 흘린 서구권의 날선 비판이 좀 서운하게 느껴졌을 만한 부분이 있을 것입니다. 20세기 중반이라고 해 봐야, 그 시점에서의 미국이라는 나라의 역사는 채 200년도 안 된 신생국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나라와 2천년 이상의 장구한 역사를 관통하며 동일 문명권 안에서 다양한 문화적 역량을 축적해 온 서유럽권 국가들의 예술과 문화적 자산을 동일선상에서 비교하는 것은 불공평하기도 하려니와 무리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존심 강한 미국 입장에서는 최강대국의 위상에 걸맞는 자체적인 예술적 역량과 존재감을 드러 낼 필요가 있었고, 특히 전후 냉전 시대 동안 소련과의 체제 경쟁 속에서 '미국은 문화의 불모지'라는 소련의 프로파간다에 대응하기 위해서라도 미국만의 예술 방식이 탄생할 필요는 있었습니다. 그 결과로 탄생한 것이 50년대를 풍미한 미국식 추상표현주의 (abstract expressionism)라고 합니다. 예술의 특성과는 좀 거리가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왜냐하면 미국 정부 (심지어 CIA가 개입했다는 설도 있습니다..)가 좀 무리하게 이 사조를 주도한 모양새가 없잖았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상황을 빗대어 비유하자면 'K-art' 정도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미국은 이 '사조'를 통해 서유럽의 모더니즘을 한물간 낡은 예술 사조로, 그리고 소련의 구상주의를 정치적 선전을 위한 도구 정도로 격하시키려 했습니다. 특히 두 사조와의 대척점을 만들기 위해서라도, 자유 진영의 수호 영웅이라는 포지션에 걸맞게, 이 추상적 표현주의에는 '완벽하게 자유로운' 이미지가 깃들어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 당시에 그에 딱 맞는 예술가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잭슨 폴락이었습니다.

잭슨 폴락 역시 처음부터 이렇게 자신의 '자유로운' 작품이 미국이 국가적으로 주도한 시대 정신의 흐름을 타게 될 것이라고, 혹은 그의 전쟁 배우 같은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애초 그는 표현주의 화가였기 때문입니다. 다만 스스로의 표현주의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그는 30년대 후반부터 시작하여 40년대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이른바 'No. 시리즈' 작업을 하면서 그 유명한 드리핑 기법 (dripping)을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붓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흩뿌리기, 던지기 등의 방법만으로 거대한 캔버스에 재현 불가능한 작품을 만들어 내기 시작한 것인데, 당연히 초기에 이런 류의 작품에 대한 평단의 반응은 좋지 않았습니다. 그의 드리핑 기법을 비꼬는 뉘앙스로, 잭슨 폴락은 평단으로부터 'Jack the dripper' 라는 별명을 얻었는데, 이는 사실 '잭 더 리퍼 (Jack the ripper)'라는 희대의 살인마 별명을 본따 만든 멸칭에 가까운 별명이었습니다. 이 별명 속에는 잭슨 폴락의 예술 활동이 예술적 가치를 죽이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비꼼, 그리고 비판의 뉘앙스가 강하게 배어 있었습니다. 별명이야 어찌되었든, 잭슨 폴락은 그의 계속 작업을 해 나갔지만, 평단의 반응은 여전히 좋지 않았기에, 전시회는 커녕, 작품은 잘 팔리지도 않았고, 따라서 당연히 돈을 잘 버는 예술가의 삶과는 거리가 멀어졌습니다.

그랬던 잭슨 폴락의 작품이 유명해지기 시작한 것은 그가 이른바 20세기 예술의 수호자로 불렸던 페기 구겐하임 (Marguerite "Peggy" Guggenheim)을 만나면서부터입니다. 구겐하임은 현대 미술사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사람입이다. 막강한 가문과 재력을 배경 삼아, 뒤샹, 피카소, 달리, 칸딘스키, 몬드리안 등 여러 예술가들의 작품을 닥치는대로 사들이며 현대미술의 다양성과 바탕 형성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후원자가 바로 페기 구겐하임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면 됩니다. 오죽하면 그녀가 2차 대전의 참화를 피해 미국으로 대피시킨 예술품이 없었다면 현대 미술이 제대로 성립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이야기조차 나올 정도입니다. 이 정도로 현대 미술사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던, 그리고 그 스스로도 현대미술 애호가였던 페기 구겐하임에게도 잭슨 폴락의 추상화가 갖는 예술성은 매우 독특했던 것 같습니다. 페기를 만났을 때 잭슨 폴락은 여전히 작품 활동 중이었지만, 생계를 위한 그의 정식 직업명은 미술관 잡부였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습작이 진흙 속의 진주임을 알아 본 페기 구겐하임은 그에게 스튜디오를 얻어 주고 정기적으로 생활비도 후원하면서 그의 예술 활동이 안정적인 궤도로 진입하도록 이끌어 주었죠. 거기에 더해 페기는 폴락에게 자신의 화랑, 심지어는 자택까지 전시 공간으로까지 기꺼이 내어 주었는데, 그 전시회에서는 무려 몬드리안이 폴락의 전시 작품을 호평하기도 했습니다. 구겐하임의 후원, 그리고 몬드리안의 호평이 폴락의 배경이 되어주기 시작하면서 폴락의 작품에 대한 세간의 관심이 증폭되기 시작했습니다.

페기 구겐하임과 몬드리안과의 만남이 폴락 유명세가 불타오르게 만든 부싯돌이었다면, 폴락 작품에 대한 클레멘트 그린버그 (Clement Greenberg, 1909-1994)의 연이은 호의적 비평은 폴락 작품의 유명세에 본격적인 부스터가 되어 주었습니다. 20세기 중반, 당대 최고의 예술 비평가 중 한 사람으로서 유명세를 떨친 그린버그는 회화의 예술성을 판단할 때 평면성 (즉, 원근법 따위 무시, 형태에서 유추되는 입체감도 무시)과 재현불가성 (즉, 무질서성, 우연성, 복제 불가능성)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린버그의 기준에서 볼 때, 잭슨 폴락의 작품은 그의 취향과 기준에 딱 맞는 것이었습니다. (더 자세한 것은 그의 육성이 담긴 인터뷰를 참고하시면 좋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IYyVo2XPn1Y)

특히, 그는 폴락의 작품이 추상화가 가져야 할 두 가지 덕목을 만족할 뿐만 아니라, 잭슨 폴락이 그야말로 '아메리칸 예술'의 선봉이라는 평을 하기도 했습니다. ("He is the first painter I know of to have got something positive from the muddiness of color that so profoundly characterizes a great deal of American painting."), 이는 그렇지 않아도 캡틴 아메리카...가 아니고 페인터 아메리카, 아티스트 아메리카의 등장에 목말라 있던 미국 주류 사회와 정부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한 도화선이었습니다. 이를 바로 캐치한 당대의 유명 매체인 라이프지 (LIFE)는 1949년 8월호에, 잭슨 폴락만 다룬 특집 기사를 게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http://www.theslideprojector.com/.../art1/pollockarticle.pdf) 그 기사의 제목은 '그는 미국의 현존 인물 중 가장 위대한 화가인가? (Is he the greatest living painter in the United States?)' 같이 좀 과장된 표현이었는데, 당시 라이프지가 북미 전역에서 떨치던 유명세와 영향력을 감안하면, 이는 잭슨 폴락의 유명세가 우주로 치솟을 수 있게 만들어 준 3단 로켓이 된 셈이었습니다. 덕분에 잭슨 폴락의 유명세와 그의 작품의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기 시작했고, 당시 미국의 거부들이 자신들의 거대한 빌딩 내부를 장식하기에 안성맞춤으로 보인 예술품이었던 잭슨 폴락의 거대한 추상화 작품들을 경쟁적으로 사들이기 시작하면서, 그의 작품의 가격은 그야말로 미칠듯한 수준으로 치솟게 되었습니다.

일반인들 입장에서는 이 추상화가 도대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왜 예술성이 독특하다는 것인지, 왜 그토록 비싼 작품으로 값어치가 매겨지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될 노릇이었지만, 일단 유명한 사람들이 좋아하고, 가치를 높게 쳐 주고, 실제로 시장 가격 마저도 그렇게 형성되니, 속된 말로 표현하자면, '유명하기 때문에 유명한' 것 같은 작품이 된 셈이었습니다. 그의 작품과 더불어, 다소 기인의 풍모를 보이기도 한 잭슨 폴락의 작품 과정이 영상으로 대중에 공개되면서, 그의 작품 스타일에는 '액션 페인팅 (action painting)'이라는 아주 그럴듯한 수식어가 추가되었고, 그러면서 그의 작품에 대한 세간의 관심은 더더욱 증폭되어 갔습니다. 실제로 한국의 천재적인 어떤 코미디언은 잭슨 폴락을 흉내낸 작품을 이용하여 예능 프로에서, 유명한 평론가를 속이기까지도 했으니, 그 생명력은 꽤나 질긴 셈입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잭슨 폴락은 자신의 예술적 위상에 대해 마음 속 한 편에서는 스스로 회의를 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세간의 평은 우주로 뻗어 나가는데, 스스로가 매긴 작품의 값어치는 깊은 골짜기에 머물러 있었던 수준이었을 것입니다. 그 간극은 어마어마했을 것이고, 이는 잭슨 폴락의 정신에 커다란 스트레스 요인이 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잭슨 폴락이 이른바 임포스터 신드롬 (imposter syndrome) 겪고 있었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유명세가 더해지면서 오히려 잭슨 폴락은 예전의 바닥 캔버스에 흩뿌리는 드리핑 기법을 의도적으로 회피하면서도, 오히려 구상 요소들을 이젤에 세운 캔버스에 '붓으로' 다시 추가하는 등, 표현주의 화가로 회귀하는 듯한 모양새를 보였다는 점에서, 이런 내적 갈등이 있었으리라 추측하는 것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잭슨 폴락의 드리핑 추상화를 원했던 대중들은 그가 고리타분한 작품 방식으로 회귀하는 모습을 보이자, 그에 대해 안 좋은 이야기를 쏟아내기 시작했습니다. 잭슨 폴락이 스스로의 작품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 정말 그린버그의 말마따나 평면성의 혁신과 재현불가능성을 위한 철저한 우연성을 노리고 그렇게 작품을 했는지, 아니면 그저 마음가는대로 약과 술에 취해 그렇게 작품을 했는지 아무도 알 수 없으나, 이미 그의 작품은 세상에 공개된 이후, 세간의 호사가들과 평론가들, 작품을 원하는 재력가들, 그리고 미국의 자존심을 세우고 싶어했던 미국 정부에 의해 의미가 한없이 부여되고, 가치가 천정부지로 치솟고, 현대 미술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갑자기 자리매김해버린 현실 속에, 그는 창작자인 자신과 창작품 사이의 건널 수 없는 괴리감을 느끼지 않았을까 추측해봅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내적 갈등과 대중의 지나친 관심과 불만, 그리고 예술가로서의 불안한 마음과 대인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등이 결합하여, 잭슨 폴락은 그 유명세와 부를 미처 다 누리기도 전인 1956년, 44세라는 젊디젊은 나이에 교통사고로 생을 마감하고 만다. 사인은 교통사고지만, 이미 중증 알콜중독자였던 그가 자동차를 운전했다는 것만으로도 폴락의 사인은 거의 자살에 가까운 사고에 의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천재 예술가이자 미국의 정신을 상징하던 예술가로서의 삶의 마감 방식치고는 참으로 불운한 방식이었습니다.

잭슨 폴락이 현대 미술의 역사에서 갖는 고유의 가치가 무엇인지는 지금도 평단에서 많이 논하는 문제입니다. 교과서에서 자주 언급되는 것처럼, 그의 작품은 추상화 중에서도 이젤 없는 캔버스, 붓없는 터치, 재현 불가능한 액션, 고도로 확장된 평면성 같은 여러 요소에서 그 가치를 인정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잭슨 폴락 스스로가 정말 그러한 가치를 진심으로 추구하며 작품 활동을 했는지, 그 스스로가 정말 작품에 대해 아무런 가치를 부여하지 않았는지, 스스로가 생각하는 작품의 예술성이 무엇인지는 안타깝게도 그가 아무런 자서전이나 기록을 남기지 않은 채 요절했기 때문에 그 누구도 확실히 알 수는 없습니다. 결국 작품에 가치를 부여하고 예술성을 논하는 것은 예술가 본인이 아닌, 감상하는 이, 평론하는 이, 해석하는 이의 몫일 뿐입니다. 또한 그 예술성이 그 작품이 갖는 물질적 값어치에 합당한 것인지 여부는 결국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시장가치로 정해질 뿐입니다. 예술가가 특정 작품에 대해 품었던 진의는 예술가 본인 외에는 아무도 알 수 없고, 오로지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이 예술품의 예술성이나 값어치, 그리고 누구도 확신할 수 없는 예술적 의미를 만들어 내는 셈입니다. 어쩌면 그것이 진짜 예술의 속성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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