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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밤 Apr 25. 2024

위화, <허삼관 매혈기>

신기하다. 책의 서문에 "(소설) 쓰기와 읽기는 기억의 문을 두드리는 작업"이라는 글귀가 있지만, 사실 소설 배경인 중국의 60년대는 내 기억의 문을 두드리기엔 너무나 이질적인 배경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 하나도 낯설지가 않고 도리어 어딘가 익숙하다. 굉장히 쉽고 재밌게 읽히는 소설이다.


주인공 '허삼관'은 인생에서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피를 팔며 생계를 꾸려나가는 인물이다. 이 인물이 처음부터 굉장히 헌신적인 인물이었다면 이런 감동을 주진 못 했을 것이다. 그저 소박하고 평범한 '보통 사람'이었던 인물이 점점 자신의 가족을 위해 어떻게 헌신하며 살게 되는지를 보고 있자니, 어느새 마음이 일렁인다. 자신의 핏줄이었던 첫째가 알고 보니 자신의 아들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누구나 그럴 수 있듯이 격정적이고 평범한 분노를 표출하기도 하고, 하룻밤 바람을 피우기도 하며 긴장감을 조성한다.
그러나 그 긴장이 아주 오래 가진 않는다. 어느새 첫째를 자신의 아들로 받아들이고 깊은 부자간의 애정을 나누는 사이로 발전을 한다. 문화대혁명 시기, 아내가 모함에 시달려 굴욕을 당할 때엔 꿋꿋이, 눈물겹게 아내의 보호막이 되어주었으며, 자녀들에게도 엄마의 위상을 세워준다. 부부란 존재는, 어느덧 이렇게 끈적이는 운명의 공동체가 되었던 것이다. 자신의 핏줄이 아닌 아들을 포함하여, 아들 둘이 생사를 오가며 헤맸을 땐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기기까지 하는 모습을 보인다.


허삼관의 아내 허옥란 역시, 젊은 시절 동네에서 소문이 날 정도로 엄청난 미인이었을진 몰라도, 평범하고 소박하게 악착같이 살아온 여느 어머니의 모습과 다르지가 않다. 남성에게 무조건 순종적이거나 혹은 기대려 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통쾌하게 할 말을 다 하기도 하고, 당당히 요구할 것을 제시하는 등의 당찬 모습을 보여준다. 허삼관의 결점(바람)을 알았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형편이 어려워졌을 땐 미련하리만치 허리띠를 졸라매기도 하고,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문간에 나앉아 신세한탄을 하거나, 동네 사람들 불러내어 이런 일이 있었노라고 통사정을 하는 모습도, 어디선가 본 듯한 평범한 주부의 모습이었다.       


중국 문학이 역사적으로 우리와 전통을 공유하는 것이 많아서인지, 아니면 위화 소설가 개별적인 특성인진 몰라도, 소설 곳곳에 드러나는 익살, 해학, 풍자 등의 표현방식이 굉장히 익숙하게 느껴져서 읽는 내내 편안했다. 또 공간과 시대적 배경이 달라도 진득한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던 건, 인간의 보편적인 성정을 다루어서인 것 같다. 소설 속 인물들 모두가 어떤 가식도 보이지 않고, 날것 그대로의 소박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 가식, 허세 따위가 없는 소박한 사람들의 삶을 보고 있는 것이 참 편했다. 대화 장면이 굉장히 많은데, 대화도 참 구수하다. (번역이 참 잘 된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은연중에 소설에서 중국 사회주의를 풍자한 곳들이 보이는데, 이런 표현들이 중국 사회에서 문제는 없었는지 궁금해지기도 했다. 물론 마오쩌둥 이후에 출판된 것이긴 하지만. 문화대혁명 시기 무고한 사람들에 대한 납치 및 폭행뿐 아니라, 배급제의 허점, 노동력 착취 등과 같은 사회주의 자체에 대한 비판이 들어 있는데 중국인들은 이 장면들을 어떻게 읽었을까 궁금해진다.



소설 속 인간 사회는 잔인하기도 하고 따뜻하기도 하다. 문화대혁명 시기 비논리적인 인간들의 행태뿐 아니라, 한 동네 사람들의 작은 결점도 빠르게 소문이 퍼지는 것을 보고 있자면 이것이 인간 사회구나 싶지만 이게 다가 아니다. 누군가 어려운 일을 당하고 있을 때 서로 도와주려고 하는 따뜻한 모습이 더 많이 등장한다. 허삼관이 추운 겨울, 죽어가는 아들을 살리기 위해 상하이로 가는 길에, 울면서 강물을 퍼마실 때도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나와서 따뜻한 차를 대접해 주려고 하거나, 여관에 데려다주거나, 몸을 데워주려고 한다. 하소용이 죽어갈 때나, 허옥란이 문간에서 신세한탄을 할 때나, 허삼관이 울면서 거리를 배회할 때 모두 동네 사람들의 관심과 후한 인심이 있었다. 지금의 우리 사회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항상 네이버 블로그에 독서 일기를 올렸는데, 브런치에도 가끔씩 올려야겠다.


+) 작가의 <한국어판 서문>이 정말 좋다. 이걸 다 옮길 수는 없고 좋다고만 써둔다.

+)
이런 공간에서 작가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때로 아무것도 없는 법이다. 붓을 놀리는 그 순간, 작가는 허구의 인물들 역시 자신의 고유한 목소리를 가진 존재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그 목소리들이 스스로 바람 속의 해답을 찾도록 존중해 줘야 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작가는 자신이 서술하는 세계에 함부로 침입할 수 없다. 오히려 그 세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존재라고 하는 편이 더 적절할 것이다. (p. 11)
→ 바로 전에 읽은 '밀란 쿤데라' 스타일과는 정 반대다.  


+) 책 포스팅이 많아지고 알림 뜨는 게 싫어서 위화 소설도 한 번에 올리려고 했는데 실패.

요즘 대학 시절 수업 들었던 한기형 교수님이 떠올랐다. 작품을 읽은 뒤, 짧게도 길게도 감상을 써보게 하셨는데, 그분은 정교수 발령받기 직전 1일 1독, 1일 1 영화를 하면서 매일 그렇게 글을 쓰셨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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