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이 반복되면 운명이야
"연애 다시는 안해. 평생 혼자 살거야!"
갑작스러운 실연의 아픔을 경험한 나는 연애라는 만남 자체에 거부감을 갖게 되었다. '어차피 결혼할 사람들도 아닌데 이 사람 저사람 만난다고 뭐가 달라져. 결국 끝에는 눈물만 흘릴걸'. 만남은 둘이서 시작했으나 이별의 선고는 내 의지가 아니었던 어느날의 계기로 인해 '연애 불신론자'가 되고 말았다.
그러던 어느날 한 모임에서 지금의 연인을 만나게 되었다. 그를 보자마자 내 이별세포들은 위험 작동신호를 느꼈는지 이렇게 외치고 있었다. "방심하지마!! 연애 금지라고!", "연애=결국 이별의 시작점인거 잊었어? 또 눈물 흘리기 싫으면 얼른 그에게 시선을 관둬!" 하지만 오랜만에 이별세포를 이기고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운 것은 설렘 세포였다.
'아, 망했다.'
직감적으로 느꼈다. 지금 그에게 온 신경이 쏠려있다고.
운명이란 말을 믿지는 않으나 기가 막힌 우연이 인연이 된다면 그것은 운명이 맞다고 생각한다. 다른 말로 우연이 반복된다면 그것은 필연이고, 즉 운명이다. 마치 멀리서부터 떨어진 자석이 조금씩 서로의 인력을 감지하고 서로에게 다가가다 마침내 합체한 것처럼 우리는 만남을 시작했다.
연인을 처음 만난 것은 정확히 1년 전의 가을날이었다. 날씨가 쌀쌀해지면서 바람이 불고 가을 낙엽이 툭툭 떨어지는 언젠가였나. 우리는 학교에서 진행하는 선거 팀을 돕기 위한 자리에 모이게 되었고, 초면이었다. 그날 나는 하루종일 쫄쫄 굶었는지 무지 배가 고픈 상태로 회의에 참석했다. 그것도 지각으로. 회의를 하던 중에 탁자 위에 있는 '꼬북칩 초코맛'이 보였다. 미친듯이 먹고 싶었다. 모르는 사람들끼리 모여 어색어색한 공기가 카페를 뒤덮고 있는 와중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진나듯 요동치는 '꼬르륵'의 울림을 다스리지 못한채 기어코 꼬북칩 봉지를 뜯고야 말았다.
봉지를 촥, 하고 뜯은 뒤 기쁜 마음으로 꼬북칩을 냅다 입에 가져갔다. 그러자 과자 봉지에 쌓여있던 꼬북칩 하나가 스르륵 탁자 위로 떨어졌다. 속으로 '아, 어쩌지.' 하고 있는 와중에 그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떨어진 과자를 입에 넣었다. 아직 어색해서 서로 얼굴도 정면으로 바라보지 못했기에 그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알지도 못한 순간이었다. 그래도 그가 친절한 사람이란 것은 눈치챌 수 있었다. 눈을 흘깃 본 바로 그는 품이 넉넉한 회색 가디건을 입고 있었다. 두 손을 모아 앉아있는 그가 안정적으로 보였다.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눈치없는 나의 배와 손은 계속해서 꼬북칩을 집어내고 삼켰다. 그런 와중에 또 한번 그가 꼬북칩 봉지를 내 앞으로 쓱- 밀어줌으로써 두 번째 배려를 보여주었다. 얼굴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 상태에서 받은 두 번의 배려는 결국 그를 계속해서 힐끔거리며 보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우연히도 우리는 그 카페에서 대각선 방향으로 앉았고, 2차 회식에서도 대각선 방향으로 마주하게 되었다. 회식 시간이 되어서야 통성명을 하였다. 마스크를 벗고 그의 얼굴을 보는데 왜인지 어디서 본 것 같은 익숙함이 신기했다. 그러나 처음 보는 사람인 것은 확실했다.
그날 이후로 집에 가는데 자꾸 그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회식에서 서로 주고 받은 대화, 나도 모르게 시선이 가는 그의 얼굴, 그런 나를 바라보는 그의 미묘한 표정. 모든 것이 마치 몰래카메라같은 인상을 주었고 무언가 너무나도 현실적이면서 비현실적이란 느낌을 받았다. '에이, 별 거 아니야. 그 사람한테 괜히 빠지지마. 잘 알지도 못하면서.. 잊어!' 라는 생각을 자체적으로 반복했으나 시간이 지나갈수록 이별세포의 효력이 떨어지는 것을 체감했다. 어느 순간 죽어있다고 생각했던 설렘 세포와 연애 세포들이 자리를 박차고 온 감정을 후비고 다녔다.
서로에 대한 확신 또는 불확실성이란 양면의 카드를 가지고 우린 적지 않은 기간동안 거리를 두고 살았다. 연락을 계속해서 지속한 것도 아니었고, 연락을 한다고 해도 하루종일 이어가는 것도 결코 아니었다. 다만 그와 내가 갖는 느낌이 공통적으로 '오묘하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처음 만난 이후로 3개월이 지난 어느날에, 어쩌다보니 얼렁뚱땅 만날 약속을 잡았다. 그것도 둘만이서!
미용실을 간 지 백만년이 지났다고 느낄 즈음이었다. 그를 만나기로 한 당일날에 나는 머리를 싹둑 잘랐고, 처음 만났을 때 보여줬던 중장발의 모습과 달리 깔끔한 단발을 치고 드디어 대면하게 되었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것인데도 왜인지 오랜만같지 않았다. 따로 만날 일이 전혀 없을 것 같은 사람들끼리 한겨울에 대뜸 파스타와 스테이크를 먹으러 간다니. 웃기는 동시에 설레고 가슴 뛰는 일이었다. 만나기 직전에 살짝 깊은 대화를 나눴던 지라 '소통이 잘 된다'는 느낌은 받았었다. 그런데 만나고 보니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이야기 삼매경에 빠져버렸다. 먹은 음식의 맛이 잘 기억이 안 날정도로.
그 또한 나를 처음 만난 날에 '오묘하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계속 오묘한 느낌이 지속되는 와중에 나와 했던 몇 번의 연락에서 '호감'을 발견했고, 그는 그걸 계기로 끝까지 그 호감과 오묘함의 연결고리를 찾았다. 그당시 이곳 브런치의 내 계정에 방문해서 나의 글을 읽어보았다고 했다. 장녀와 장남인 것, 이별에서 얻은 교훈과 생각, 삶에 대한 가치판단 등 많은 것에서 본인과 통하는 점이 많아 그는 확신했다고.
정보사회가 좋은 것이 이런거구나, 느꼈다. 직접 만나지 않아도 내가 써놓은 역사를 남이 읽고 이를 통해 나라는 존재를 더 빨리, 깊이 이해할 수 있구나. 그런 것이 사랑의 영역에서도 적용될 수 있구나.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기에 누군가에게 읽혔을 때 비로소 글쓰기의 가치를 찾는 사람이다. 그런데 내가 좋아하는 그가 나의 글을 읽고 확신했다니. 그보다 더한 기쁨과 설렘이 있을까.
우여곡절 끝에 우리는 서로의 손을 잡았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타이밍에, 누구도 확신할 수 없었던 순간에 우리는 결국 제 경로를 잘 찾아 얼굴을 맞댈 수 있었다. '너'랑 '나'였던 관계가 '우리'가 된다는 것은 참으로 기쁜 일이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가 되고, 힘이 되고, 활력이 되는 관계. 그 사람으로 인해 하루를 더 잘 살아나갈 용기가 생기는 변화. 이런 것들이 우리의 확신을 더욱 강화해주었고 서로에 대한 감정의 온도를 더 높여주었다.
하지만 내가 놓치고 있는 것이 있었다. 모든 관계에는 갈등이 있고, 갈등은 필연적이라는 것. 전공에서도 배웠던 기초적인 '관계'에 대한 개념이다. 처음 만남을 갖게 된 시점에서 연인은 이렇게 말했다. "매번 좋을 수만은 없지만, 잘 이겨나가면 될거야"라고.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조금의 두려움이 스멀스멀 올라왔던 기억이 생생하다. '어떡하지. 난 지금까지 연인이랑 한번도 갈등을 해결해본 적이 없는 미성숙한 연애를 해왔는데. 지금 연인이랑 갈등이 생기면 잘 헤쳐나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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