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by 백승권

우울은 어쩌면 행복과 비슷해요.

모두가 말하고 지겹다는 점에서.

가장 죄책감이 덜 느껴지는 상태이기도 하죠.

내가 죄의 일부 또는 자체가 된 것처럼 여겨지니.


생각이 몸을 따라 길을 잃다가

방금 도착한 지점에 대해 설명하려는데

다른 사람들은 이미 각자의 경로 안에서

지나온 곳이기도 하고 저는 끌어안고 숨차게

달려만 오다가 하도 쓰러져서 팔이 까지고

뼈가 보이고 안고 있던 게 스르르

놓아버리게 된 상황까지 오게 된 거죠.

힘이 없어진 게 아닌 팔이 없어졌어요.


저는 이 질문을 오늘 처음 스스로에게 해봤습니다.


앞으로도 써야 한다면

그게 꼭 카피일 필요가 있을까.


카피를 꼭 고집할 필요가 있을까.

카피가 가장 큰 비중이 되어야 할까.

물론 카피는 가장 오래 가장 많이 가장 인정받으며

자본주의 시장에서 상품성이 검증된 능력이긴 하지만


이걸 의심하게 만든 기이한 환경에 대한

비난을 멈추긴 어렵지만 좀 더 생각해 보면

좀 더 레이어가 없는 상황에서 쓰는 일을 모색할 수 있지 않을까.

이건 어쩌면 미래 직업을 구상하기 위한 초안이 될 수도 있는데.

광고든 마케팅이든 카피든 물론

광고가 아닌 것도 마케팅이 아닌 것도 카피가 아닌 것도

크고 넓게 보면 모두 다 해당하지만...

쉽게 말하면 약간 이런 거죠.

유통 과정 없이 다이렉트로 거래하고 싶다고.

그런데 카피라이팅을 업으로 지속하는 데 있어

현재 상태와 같은 유통 과정이 필수여야 한다면

카피 대신 다른 걸 진지하고 모색해야 할 때가

바로 지금이 아닐까 싶은 거죠.


이 질문의 근원과 시작점은 며칠 전이 아니에요.


그때는 조금 달랐죠. 어느 것에 비중을

둘 것이냐의 문제를 고심하며.

관리자로 오를 것이냐. 라이터로 남을 것이냐.


당시 저는 이걸 가지고 스스로를

수달에 걸쳐 굉장히 괴롭혔습니다.

그때 역시 조직 내부의 지위를 넘어

차기 커리어 대한 경로 설정과도 같은 중대함이어서.

주소를 잘못 찍으면 번복하기 어렵다는 문제가 생기죠.

차는 영원히 달릴 수 없고 인생은 금방 끝나기도 하니까.


지금은 고민의 성격으로 보면

그때와 연결된 시즌2라고 할 수 있겠네요.

쓰는 업을 계속 가져가고 가져갈 수 있고 가져가야 하고

거기서 카피라이팅의 비중을 줄인다면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그 업이

카피라이팅만큼 훈련되었는가.

카피라이팅만 한 포트폴리오가 있나.

카피라이팅만 한 시장성이 있나.


아니

없음

몰라


외부 의뢰로 긴 호흡의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길게는 소설부터 짧게는 칼럼까지

스스로 시도한 문학에 대한 도전도 있었고 성과도 있었고

브랜드와 미디어의 의뢰를 통한 단편부터 장기 연재도 있었고

정부부처부터 청소년까지 내외부 온오프라인 강연도 있었고


지속적인 업무 연결성을 지닌 루트가

회사만 한 안정성은 없겠지만

도로와 건물 안에서 하루 12시간을 보내는 삶이

과연 남는 베팅이 될 수 있을까... 를 고민할 때

이게 그저 감정과 스트레스를 간편하게 분리시킬 목적이 아닌

몰입과 퍼포먼스의 효율성 측면에서 바라볼 때

오히려 늘 유사한 소모와 낭비를 지속하며

현재 상태를 유지하는 게

너무 비효율은 아닐까 싶은 거죠.


쉽게 말해서

늘 같은 방식으로 일했다고 해서

정당성을 어떤 의심도 없이 인정해야 하는지.

버티고 견딜만한 가치가

더 높은 대상에게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너무 많은 중요한 부분을 타인의 판단과 결정에

맡기고 게으른 리액션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쉬운 길도 고통스럽지 않은 길도 없지만

내가 선택한 경로

내가 선택한 고통으로 나아가야 하는 게 아닌지

이런 고민이 구체적으로 진도를 나가기 시작한 거죠.


모든 부정적 요소를 그저 디폴트값으로 여기기엔

새로운 판단 기준과 실행이 필요한 시기.


이미 너무 많은 시간이 지나갔고

어쩌면 결정을 이미 내리고

이렇게 쓰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네요.

모르겠다고 쓴 이유는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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