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완 Apr 08. 2023

예수가 부활하지 않은 기독교

저는 생활 지침으로서의 기독교를 믿습니다.

기독교 신학에 한 쪽 발목을 담그고 있을 뿐이지만, 예수의 부활을 믿어야만 기독교인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는 동의하기 힘듭니다. 기독교는 광범위한 종교입니다. 수 많은 교파가 있고, 해석이 있습니다. 그 중 무엇이 '정통'인지 가려내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정치학자들이 단 하나의 진정한 사회주의나 보수주의를 찾는 데에 실패한 것처럼, 정통 기독교를 찾는 일도 성공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게 쉬웠다면, 교회 일치 운동(에큐메니즘)은 진작에 성공해서 모든 주요 교파가 하나의 기독교로 통합되었을 것입니다.


기독교가 가장 깊이 뿌리내린 유럽에서는, 종교개혁 이전부터 초자연적 요소를 배제하는 신학이 발전했습니다. 흔히 말하는 '이성 안에 있는 신앙'을 추구한 사람들이 나타난 것입니다. 이런 기독교 신학을 자연신학, 자연종교라고 부릅니다. 데이비드 흄과 토마스 홉스, 토마스 제퍼슨이 자연종교를 다룬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당시에 자연종교는 바티칸으로부터 무신론이라며 비난받았지만, 자연종교에 대한 논의 자체는 꽤 오래 이어졌습니다.


"머릿속에서 상상하거나 공개적으로 인정된 이야기를 듣고 상상한, 보이지 않는 힘에 대한 '두려움'은 종교라고 부르고, 공개적으로 인정되지 않은 경우에는 미신이라 부른다."¹


물론, 이런 자연주의적 종교관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기독교 역사의 주류였습니다. 흔히 '신앙주의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신의 존재나 예수가 일으킨 기적이 비합리적이라는 사실을 직시합니다. 애초에 신앙은 합리성으로 평가받을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가 즐겨 말하는 것처럼, 이성은 출발점이 필요합니다. 그 출발점은 이성으로 증명할 수 없는 것일 수 밖에 없습니다. 신앙주의자는 바로 이점에 주목합니다.² 신앙주의자에 따르면, 우리는 증명할 수 없는 것을 전제로 생각할 수 밖에 없고, 그 궁극적인 전제가 될 수 있는 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신앙을 증명할 수 없다는 점은 문제될 것이 전혀 없습니다. 모든 것을 증명할 수 없기 때문에 신앙이 필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주장을 펼친 대표적인 사상가가 팡세의 저자, 블레즈 파스칼입니다.


"(라퓨마판) 224. 심정은 이성이 모르는 자신의 논리를 가지고 있다."³


신앙주의자는 예수의 부활을 이성의 잣대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이런 주장에는 치명적인 결점이 있습니다. 이성적으로 예수의 부활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면, 다른 신화나 종교가 주장하는 초자연적 현상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테나가 아테나이에 올리브 나무를 심어준 일도, 라그나로크가 일어나서 세상이 한 번 멸망한 일도 이성적으로 검증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세상에 존재하는 수 많은 종교 중에서 무엇이 옳은지 판단할 방법이 없습니다. 이성이라는 도구를 거부한다면, 정명석의 교회가 아니라 성 김대건 안드레아의 교회가 옳다고 주장할 방법이 마땅치 않습니다.


애초에, '종교'라는 개념은 초자연적인 존재와 현상에 대한 믿음을 포함하고 있지 않습니다. 흔히 초자연적인 것에 대힌 믿음이 종교라고 불리기는 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닙니다. 단적으로, 초기 불교는 굉장히 세속적이고 회의주의적이지만 엄연히 종교로 분류됩니다. '종교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하나의 정답은 없습니다. 모두가 하나의 개념에 완전히 합의한 사례는 없습니다. 모든 단어의 개념은 맥락에 의존합니다. 종교라는 개념도 대화가 이뤄지는 그 자리에서 편리하게 정의될 수 있을 뿐입니다.


"종교가 거의 대부분 초자연적인 존재나 신적인 존재와 연관되어 있지만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다. 불교의 종파 중에서 유신론적인 성격을 띄지 않는 종파들에서는 초자연적인 영역에 대한 개념이 나타나지 않으며, 도교나 힌두교, 이슬람교에서는 그러한 개념이 매우 다른 방식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해준다."⁴


기독교라는 이름을 독점하려는 사람들이 있지만, 언어의 역사에서 독점은 허락된 적 없습니다. 원래 '사회주의'는 정치 사상이 아니라 인간의 사회성이 도덕의 기반이라는 생각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사적소유제를 지지하는 사상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고, 나중에는 제한 없는 사적소유제를 비판하는 사상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습니다.⁵ 현대에는 흔히 마르크스주의를 가리키는 말로 통하지만, 사회주의 전통에는 마르크스와 무관한 것도 많습니다. 이 중에서 무엇이 '진짜', '정통' 사회주의일까요? 누가 사회주의라는 말을 독점할 수 있을까요?


물론, 단어의 의미는 사회적으로 결정되기 때문에, 나 혼자만의 사회주의, 나 혼자만의 기독교를 주장하는 일은 무의미합니다. 언어는 소통하는 상대가 있다는 걸 전제하는 사회적인 활동입니다. 한 사람이 자의적으로 단어의 의미를 규정하는 건 무의미합니다. 단어의 의미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현재 주로 통하는 의미를 이야기하거나,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통했던 의미를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런 점을 고려하더라도, 예수의 부활을 믿어야만 기독교인이 될 수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현대에는 예수의 부활을 진지하게 다루지 않는 신학도 널리 통용되고 있고, 과거에도 예수의 윤리를 따르되 예수의 기적을 믿지 않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기독교는 고정불변하는 종교가 아니라 지역과 정치 상황에 따라 교리를 제정하고 수정해 온, 유연한 종교였습니다. 애초에 가장 오래된 종파인 그리스 정교회와 로마 가톨릭은 고대에 정치적으로 교리를 설정하면서 탄생한 교회였고, 이후에 나타난 영국의 성공회, 독일의 루터교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현대 상황에 어울리게 예수의 부활을 교리로 인정하지 않는 기독교가 있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시간과 지역에 따라 매우 다른 교리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 역사가 너무 깊고 다양해서, 외부인이 보기에는 어느 하나를 함부로 정통이라고 부르기 어려운 지경입니다. 이성적 판단을 거치지 않고 예수의 부활을 믿어야만 기독교인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은 세속주의와 과학지상주의가 판치는 현대에 받아들여지기 어려울 것입니다. 종교가 반드시 초자연 현상에 대한 믿음을 의미하지는 않고, 기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적을 밀어내더라도, 기독교는 기독교로 남을 것입니다.


저는 예수를 존경하지만 예수의 재림을 믿지는 않습니다. 제가 참고하는 기독교는 역사를 움직인 동력이자 광범위하게 자리 잡은 생활 지침입니다. 유일신이 있다거나 각종 기적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주장이 아닙니다. 신의 존재와 기적에 대해서, 저는 판단을 보류하고 있습니다. 초자연적인 일이 일어날 수 없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일어났다고 믿을 이유가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상관 없습니다. 초자연적인 주장을 믿을 수 없더라도, 기독교는 살펴볼 가치가 있는 문화 양식입니다.


"많은 이에게 그리스도교 신앙은 일련의 진술을 문자 그대로 절대적인 진리라고 믿는 것이 되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과연 그런 것일까? 그것이 성서의 하느님과 예수가 우리에게 바라는 바일까? 과연 그것이 우리를 구원해줄까? 그렇지 않다면 문자주의의 사로잡힌 상태에서 벗어나야 하는 건 아닐까?"⁶


주석.


1. 토마스 홉스, 리바이어던, 최공웅, 최진원 옮김, 동서문화사, 2009, 65p.


2. 마이클 피터슨 등, 종교의 철학적 의미, 하종호 옮김, 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2008, 96p.


3. 블레즈 파스칼, 팡세 [전자도서], 이환 옮김, 민음사, 2012.


4. 마이클 피터슨 등, 종교의 철학적 의미, 하종호 옮김, 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2008, 19p.


5. 김영한 등, 서양의 지적 운동, 지식산업사, 1994, 120p.


6. 마커스 보그, 그리스도교 신앙을 말하다, 김태현 옮김, 비아, 2013, 54p.

작가의 이전글 권리는 공짜가 아닙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