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밥으로 성장하는 너와 나
요즘 같이 먹고살기 힘든 고물가 시대에 어쩌다 보니 외벌이로 살고 있다. 대출 이자, 관리비, 보험료 등의 고정비만으로도 허덕이는 가계경제지만, 은행에게 영혼을 팔아 자가를 소유하고 있으니 어쨌든 이것은 투자라는 정신 승리로 하루하루를 버틴다. 어찌해도 줄일 수 없는 고정비는 그렇다 치고, 식비로라도 그나마 절약이라는 걸 해봐야겠다.
평소에도 배달 음식이나 외식을 자주 먹지는 않았지만, 이참에 배달과 외식을 과감히 줄였다. 손님을 초대하거나, 아이가 피자나 치킨이 먹고 싶다고 하는 날이면 아주 간혹 가다 배달 음식을 시키지만, 그마저도 이제는 직접 만들어 먹거나 냉동식품으로 대체해서 배달도 거의 끊은 셈이다.
생활비를 절약하자는 명목으로 시작한 식비 절감 프로젝트인데 그 속에는 얻어 가는 배움들이 많았다. 의외로 주방에 서는 즐거움도 뜻밖의 덤이었다. 요리를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았지만, 새로운 식재료를 다루는 건 어쩐지 두려워서 먹는 음식들만 반복해서 먹곤 했던 지난날들에 비해 요리의 스펙트럼이 제법 넓어졌다. 자라나는 아이가 있으니 균형 있는 식사를 만들어줘야 한다는 의무감도 있었고, 그때그때 먹고 싶은 음식들이 생겨날 때마다 해 먹어 볼까 했던 호기심도 한몫했다. 무엇보다 내 요리를 제일 맛있게 먹어주는 가족들은 요리의 가장 큰 원동력이었다.
그래서 이제는 먹고 싶은 음식이 생기면 배달앱을 뒤지기보다 블로그 요리 레시피를 먼저 찾아보는 변화를 맞이했다. 아무리 그래봐야 아직도 요린이 레벨이지만, 그간의 발견이라고 한다면 요리에는 나름의 일정한 패턴이 있다는 것이다. 보통의 요리들은 볶고, 끓이는 과정들의 반복이고, 설탕, 간장, 식초, 고춧가루, 고추장, 된장, 매실청, 참기름 등을 경우의 수처럼 조합하는 행위 같았다. 이것을 거듭하다 보면, '여기에는 이게 들어가겠지?'라는 대강의 추측이 가능해져 뚝딱거리던 요리가 차츰 자연스러워지는 기분도 들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음식의 귀함과 마주했다는 것. 예전에는 냉장고와 냉동실에 시간을 잊은 채 틀어박혀 있다가 버려지는 식재료만 한 무더기였는데, 그들도 살려낼 수 있는 음식이고, 절약할 수 있는 식비의 일부라고 생각하니 버려지는 재료를 최소화해서 요리를 해야겠다는 의식이 생겼다. 그러려면 냉장고를 파먹는 행위를 주기적으로 반복하는 것만이 답이었다. 부모님이나 시부모님이 주시는 식재료들을 최대한 요리에 활용하다 보면 땅에서 나고 자라는 것들에 대한 감사함은 저절로 딸려왔다. 지난봄에는 시부모님이 시골에서 봄나물을 한 무더기 보내주셨는데, 태어나서 본 적도 없는 풀떼기들이 내 손 안에서 지지고 볶아지는 모습은 감동 그 잡채였다.
무엇보다 요리로 이뤄낸 최고의 성과는 집밥의 끝판왕인 김치를 만든 것이다. 백김치를 즐겨 먹기 시작한 아이 덕분에 마트에서 백김치를 종종 사다 먹었는데, 양에 비해 가격이 너무 비싼 것이 아닌가. 설마 이것도 내가 만들 수 있는 음식인 걸까?라는 의문을 가지고 찾아보니, 생각보다 간단하게 김치를 만들 수 있는 레시피를 알려주는 요리 블로그 선생님들이 많았다. 그렇게 만든 나의 첫 김치, 생각보다 맛있어서 깜짝 놀랐다. 이제 더 이상 백김치 사 먹을 일은 없겠다. 가격 절감은 물론이지만, 내 손으로 식재료를 깨끗하게 손질하고, 이상한 거(?) 안 넣고 만드니까 그것 만큼 마음 놓이는 일이 없었다.
내 손으로 내 가족의 밥을 해먹인다는 위대함에 대해 놀랍지만 여태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다. 가족들을 위해 평생 집밥을 만들어왔던 그리고 아직도 집밥을 만들고 있는 우리 엄마를 단 한 번도 그런 시선으로 바라본 적 없던 나는 그동안 가사 노동의 가치를 제멋대로 평가 절하하고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결혼, 출산을 계기로 직장을 그만두고 가정으로 귀속된 여성을 잉여인간으로 취급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도대체 나는 그동안 전업주부를 뭐라고 생각하면서 살아왔던 걸까?
결혼 전, 메뚜기처럼 잦은 이직을 반복하며 홍보대행사를 전전했다. 새벽까지 야근하는 건 부지기수였고, 직장 다니면서 흘린 눈물만 아마 한 바가지 될 거다. 모든 직장 생활이 다 그러할 테지만, 일일이 설명하기 힘든 정말 별의별 일이 다 있었다. 딱히 이렇게 살고 싶지는 않았는데, 배운 게 그것밖에 없었고, 할 줄 아는 게 그것밖에 없어서 이도 저도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내 인생인데 내 맘대로 좀 살면 안 되겠냐며 도망치듯 회사를 뛰쳐나왔다. 나는 나를 실패자라고 여겼다. 남들 다 잘하는 직장생활, 못 견뎌서 조직으로부터 튕겨져 나온 나는 자연스럽게 전업주부가 됐고, 전업맘이 됐다.
아이는 어느덧 5살이 되어 거센 파도 같던 육아가 조금은 잔잔해지자 여유라는 것이 생긴 것인지 유치원과 놀이터를 오고 가며 마주치는 또래 아이들의 육아를 관찰하고, 또 전업맘이 된 나의 육아를 돌아본다. 그리고 엄마의 손으로 직접 아이를 키우는 것에 대한 의미를 다시금 생각한다.
출근시간과 맞물린 아이의 등원길을 재촉하지 않고, 아이가 배고파하는 아침이면 조금 든든하게 아침밥을 먹이고, 그래 까짓 거 유치원 조금 늦으면 어때! 하고 천천히 등원하기도 한다. 길가에 핀 꽃이나 산책 중인 강아지, 나무에 붙은 매미를 구경하며 도착한 유치원 앞에서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고 이따 만나자며 즐거운 작별인사를 나눈다. 그리고 하원길에 다시 만난 아이와 어떤 하루를 보냈냐며 안부를 묻고, 날씨가 좋은 날은 놀이터에서 못다 한 놀이를 이어가다가 집으로 돌아온다.
아이를 유치원에 보낸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같은 유치원에 다니는 엄마로부터 “애가 밝고 성격이 좋아서 둘째인 줄 알았어요! 엄마가 잘 키우시나 보다! “라는 말을 들었다. 당황스러웠다. 낯간지러운 칭찬이어서가 아니라, 나는 내가 애를 잘 키운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고, 한 번도 나를 좋은 엄마라고 여겨본 적이 없었다.
나의 육아에는 어쩐지 빈 구멍이 하나 존재하는 듯했다. 엄마라는 직업이 적성에 안 맞는데, 어쩔 수 없이 엄마가 됐고, 심지어 전업맘이 되어버린 건 일 욕심 많던 나의 20대 시절에는 꿈도 꿀 수 없던 형태였어서 내 삶이 내 것 같지 않은 기분도 들었다. 어쨌든 엄마를 시작한 이상 잘하고 싶고, 소위 말하는 ‘좋은 엄마’가 되고 싶은데 자꾸 어긋나는 것 같다. 매일같이 이대로 괜찮을까 의심하고 불신하면서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육아의 늪에서 허우적거렸다. 텅 빈 구멍의 정체가 도대체 무엇인지 답답해하며 때때로 아이에게 괜한 화를 내고, 스스로를 자책하는 날들이 쌓여갔다.
아무래도 내가 복에 겨웠나 보다. 대뜸 생각했다. 아이와 집에서 보내는 별일 없는 잔잔한 일상들이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이고 감사할 일 투성이인데 외면하며 살았나 보다. 아이에게 유치원 가면 엄마랑 헤어지는데 슬프지는 않냐고 묻자, “안 슬퍼! 친구들도 있고, 엄마가 이따 다시 오잖아!”라고 세상 씩씩하게 말하는 아이가 정답이었다. 내 울타리에 머물고 있는 아이는 나로부터 안정감을 느끼고 있고, 덕분에 밝고 사랑스럽게 자라나고 있다. 그러니까 자의든 타의든 이 아이를 내 손으로 키우기로 결심한 건 반드시 옳은 결정이었다. 아이의 하원 전 일찌감치 저녁밥을 만들던 어느 날, 이런 나도 어쩌면 괜찮은 엄마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한 아이의 엄마가 된 나의 30대는 더 이상 직장생활의 실패물이 아니다. 나를 쏙 빼닮은 작은 인간을 키우고 우리 집을 보살피는 일을 선택했을 뿐이다. 물론 현실은 녹록지 않으니까 나중에 아이에게 물려줄 대단한 재산 같은 건 없겠지. 그리고 경제 사정이 넉넉한 여느 가정보다 더 좋은 것들을 해줄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는 너에게 내 정성과 사랑이 담긴 집밥을 매일같이 차려줄 수 있다. 우리 엄마의 집밥이 나를 자라게 해줬 듯, 나의 집밥도 네 몸과 마음의 자양분이 될 거라고 믿으면서. 엄마가 만든 밥이 제일 맛있다고 말해주는 너는 나의 최대 아웃풋이고, 나는 너로 인해 오늘도 주방에서 성장하고 배워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