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 바람소리가 거칠더니 아침에 보니 나뭇잎이 무더기로 떨어져 흩날리고 있다. 낙엽 떨어져 뒹구는 이 아침의 앞뜰처럼 요즈음 내 마음이 으시시 썰렁하고 불안하다. 매사가 두려워지고 정신까지 깜빡깜빡 한다. 그래도 이것은 깊어가는 가을 때문이지 나이 들어 그런 것은 아닐 것이라고 스스로 위안하며 오늘 하루도 또 마음 다져본다.
대전에서 힘들게 투병 치료하고 있는 큰 딸에게서 전화가 왔다.
“S예술고등학교에 합격한 큰 딸(내겐 맏이 외손녀)이 오늘 신입생 교복을 맞추는 날인데 힘이 들어 도저히 같이 갈 수 없어 애 혼자 보내니 그 애 학교부근 스마트 교복 광진점에 데려가 교복 칫수를 재고 저녁차로 다시 내려 보내 달라“라고.
아침에 성당 미사를 참석하고 집으로 왔다. 외손주 터미널 도착 시간이 조금 여유가 있어 책상 앞에 앉아 이것저것 생각을 했다. 대전에 있는 중학교에 다니면서 제 어미가 투병하고 있는 우리 집에서 매일 밤 늦게까지 일 년 동안을 미술학원에 다니면서 불가능 하다고 생각하던 S예술고등학교 시험에 기적같이 합격한 외손주가 교복을 마련하려 혼자 서울에 온다니 참 대견하다.
'그럼 오늘 교복은 외할아버지인 내가 사주고 용돈도 좀 주고 맛있는 저녁까지 사주고 보내야겠구나.'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어 신용카드를 챙기고 책상 서랍에 보관중인 비상금(?)까지 털어서 지갑에 넣고 시간에 맞게 강남고속터미널로 출발했다. 오늘따라 고속버스가 한 시간이나 연착이다. 늦어지면 교복집이 문을 닫을지도 모르는데 동동걸음으로 스마트폰 네이버지도에 따라 지하철을 환승하고 다시 마을버스로 바꿔탄 후 교복집에 도착했다.
예술고등학교라서 그런지 교복이 너무 예쁘다. 대금을 치르려고 지갑을 꺼내려고 하는데 외손주가 재빠르게 말한다.
“할아버지 이 교복은 아버지 카드로 사야해요. 그래야 아버지 회사에서 돈이 나온데요.”
그럼 교복을 안 하니 용돈이나 좀 넉넉하게 주고 저녁이나 비싼 것 사주어야겠다고 생각하며 돌아오는 마을버스를 탔다.
앗불싸...! 어쩌나! 마을버스에서 내려 보니 주머니에 지갑이 없다.
'소매치기를 당했나? 버스에 떨어 트렸나?'
요즘 소매치기는 없다고 하고 버스에 떨어트린 것 같지는 않으니 아마 교복집에서 계산하려고 서둘다가 흘린 것 같았다.
부랴부랴 교복집에 전화를 하니 없다고 한다. 큰일이다 지갑에 있는 돈은 문제가 아니다. 신용카드, 주민등록증 아파트집 출입카드, 도서관출입증, 병원카드 이것저것 없다면 옴싹달싹 못하는 것들이 다 없어지는데 이를 어쩌나, 그래도 다시 교복집에 가서 다시 찾아봐야겠다.
신용카드 분실신고를 하려고 전화를 하는데 시간이 늦었다고 기계음만 나오고 통화가 되지 않는다. 기계음에 따라 이것저것 누르면서 버스를 다시 타고 교복점에 왔다. 없다! 앉아 있던 의자를 들어보고 앞에 있던 탁자를 밀어 보고 아무리 찾아도 없다.
외손주 고속버스 탑승시간을 늦추고 맥없이 고속터미널로 다시 왔다. 가진 것이라고는 경로 무임승차 카드 밖에 없으니 주려던 용돈은 고사하고 저녁 값도 지불할 수가 없다. 분식집에서 외손주가 사위카드로 사온 쫄면을 먹고 있자니 이것 참 체면이 말이 아니다. 체면이 쫄면처럼 쫄아 불고 쫄면의 면발도 잘 끊어지지 않는다.
집으로 오는 지하철에서 '내가 요즘 왜 이러나... 벌써 치매가 오나...?' 다짐인지 자책인지 중얼거리며 핸드폰에 메모를 했다.
“내일은 휴일이니 주민등록증 분실신고는 월요일로 미루고 아파트 관리 사무실은 오전근무이니 일찍 가서 출입증 추가 발급을 받고 집 앞 구립도서관에 가서 출입증 재발급을 받고 병원카드는 없어도 크게 불편하지 않으니 포기하고 신용카드는 재발급 카드 올 때까지 안 쓰면 된다.”
지하철 창 밖에 비치는 내 모습이 참 안쓰럽고 창피하여 그냥 눈을 감았다.
집으로 와서 옷을 갈아입고 답답하고 찜찜한 마음으로 책상 서랍을 열었다.
“아 이게 뭐야! 잃어버린 지갑이 왜 여기 있는 거야!”
비상금 넣어두었던 서랍 속에 비상금은 없고 대신 그렇게 찾던 지갑이 얌전히 놓여 있는 것이 아닌가...! 긴장이 풀리고 맥이 빠졌다.
이놈의 정신머리! 외손주 준다고 비상금 챙겨 지갑에 넣고는 그 지갑 주머니에 넣지 않고 다시 비상금이 있던 서랍 속에 넣어 놓고는 철썩 같이 외손주 용돈까지 챙겼다고 설쳐댔구나.
“아 정신 차려야 한다.”
아직은 내가 정신줄 놓으면 안되는데. 목숨 걸고 투병하는 큰 딸애가 오늘 “그놈 외손주 대학 입학 할 때까지 만이라도 살려 달라”고 기도하며 투병하고 있는데. 딸과 같이 아파하고 투병하며 큰딸 완치시키려면 내가 10년은 건강해야 하는데 그것만이라도 이루어 주시라고 매일매일 기도 하고 있는데. 간절한 마음으로 또 다시 기도해야겠다.
“주님 제발 도와주세요.”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