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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방이 Feb 04. 2024

죽었다, 죽였다, 죽는다.

<이방인>을 읽고

한 남자가 살인을 한다.

이유는 태양에 눈이 부셔서. 그는 어머니 장례식에서 눈물을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장례 절차를 귀찮아한다. 장례 다음 날, 연인과 코미디 영화를 보고 사랑을 나눈다. 그는 바로 소설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이다.

작가 카뮈는 혜성처럼 등장한 신예 작가였다.

그의 나이 겨우 29살. 1942년에 출판된 이방인은 오늘날까지도 논란의 대상이다.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 역시 “뫼르소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라는 말을 남겼다. 뫼르소는 사회성이 떨어지다 못해, 거의 소시오패스에 가깝게 느껴진다. 민음사 이방인의 해설서에는 이런 소시오패스에게 진실의 순교자니 뭐니 하는 과분한 찬사를 남기기도 했다. 그는 정말 순교자일까.

유럽의 2천 년의 역사는 자신들이 만든 신을 죽이는 투쟁 과정에 불과하다.

유럽사에서 ‘왜 사는가’라는 문제에 대한 답은 늘 신이었다. 1942년의 유럽은 수천 년 동안 자신들이 만든 신을 드디어 죽인 시대였다. 한편으로는 과학이 눈부시게 발전하던 시대였다. 과학은 말한다. 우리는 우주의 점의 점의 점일 뿐이라고. 신이 죽고 과학은 사람들의 가슴에 공허함만 안겨주었다.

당시 유럽은 오만의 시대였다.

대상을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합리적으로 사고한다고 여기던 시절이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들을 하등 한 존재로 여겼다. 그게 같은 인간이라 할지라도 피부색에 따라 차등을 두었다. 세상은 늘 진보하고 합리적 이성은 늘 옳은 결정만 한다고 여겼다.

오만이 기만이었음으로 밝혀질 무렵,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나치즘은 역사상 가장 잔혹한 반이성적 집단 광기를 보여주었다. 자신들이 최고라고 여기던 공산주의자들은 스탈린 체제라는 독재를 낳았다. 합리적 선택을 한다고 여겨왔던 인간의 이성은 모래 위에 쌓은 금자탑 같은 것이었다.

영화 고지전을 아는가?

하나의 고지를 두고 북한군과 남한군이 엎치락뒤치락 끝없이 싸우는 영화. 곧 끝날 것만 같은 전쟁은 고지 하나를 두고 3년이라는 시간을 더 지속한다. 영화에서 남한군 배우 신하균이 북한군 배우 정재영에게 묻는다. "그때 왜 싸우는지 안다고 하지 않았어? 그 이유나 들어보자." 그러자 정재영이 답한다. "내래 확실히 알고 있었어. 긴데 너무 오래돼서 잊어버렸어."

삶에는 사실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의미라는 것은 권력자와 위정자들이 만들어 놓은 덫일 뿐이다. 세계는 결코 진보하지 않는다. 세상은 그저 부조리할 뿐이다. 이방인은 그런 분위기 속에서 나왔다. 정의를 외치며 전쟁에 몸을 던졌던 수많은 젊은이들의 죽음을 목도하면서. 세상이 말하는 정의는 개개인에게는 정의가 아니었음을 깨닫는 시대에.

이방인은 당시 부조리한 삶을 철학적 사유로 이미지화한 소설이다.

뫼르소는 그런 맥락 속에서 탄생했다. 가장 적합한 인물로. 뫼르소는 연극처럼 무대에 등장한다. 뫼르소가 왜 그렇게 시니컬하고 세계에 관심이 없는 사람인지에 대한 설명은 없다. 인간은 그저 세계에 던져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뫼르소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많은 사람들이 주인공에 마음을 투영하고 주인공의 생각과 행동에 공감과 이해를 동반하면서 소설을 읽는다. 그래서 우리는 소설 죄와 벌을 읽고 살인자를 이해하고 심지어 그를 동정하게 된다. 악당에게도 서사는 있다. 그런데 뫼르소는? 뫼르소는 서사가 없다. 그저 연극 무대에 던져졌다. 작가는 세상이 말하는 의미와 완벽하게 동떨어진 상징적 인물을 창조한 것이다. 시대의 철학적 사유를 효과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소설은 1부와 2부로 나뉘어 있다.

1부에서 뫼르소는 여전히 사회관계망에서 존재한다. 그러나 2부로 넘어가면 철저하게 이방인이 된다. 1부에서 어머니 장례식을 제외하면 뫼르소가 맺는 인간 군은 정의나 의미 따위 보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사람들이다. 설사 그것이 비도덕적이고 불합리하고, 심지어 불법이라고 할지라도.

이웃집 살라마노라는 영감은 자신이 키우는 개에게 못되게 군다.

레몽은 아랍인 여자친구를 구타한다. 그럼에도 뫼르소는 그들에 대한 적개심이 없다. 심지어 그들에게 조언하고 구타를 도와주기까지 한다. 뫼르소는 어떠한 행위에도 의미가 없디고 생각한다. 여자친구 마리가 사랑하느냐는 질문에 그런 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며 널 사랑하지는 않지만 네가 결혼하자고 하면 그러겠다고 대답한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여기서 독자는 뫼르소의 감정을 따라가기 힘들어진다. 그러나 잊지 말자. 카뮈는 시대의 철학을 설명하기 위해 뫼르소라는 이방인을 탄생시킨 것뿐이라는 사실을. 뫼르소는 인류의 1%. 인간 심리의 작은 부분을 극대화한 것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읽으면 조금 편해진다.

2부로 넘어간다.

무대는 태양이 강렬한 지중해에서 어두침침한 재판장으로 바뀌어 있다. 뫼르소의 심리는 단 한순간도 변하지 않는다. 1부나 2부에서나 똑같은 뫼르소이다. 재판을 연극에 비유하면 주인공은 피고이다. 관객은 배심원과 청중이다. 그러나 우리의 주인공 뫼르소는 연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관객이 된다. 연기를 하는 건 검사와 배심원과 청중이다.

당시 알제리는 프랑스의 식민지였다.

일제강점기를 상상해 보라. 칼을 든 한국인을 일본인이 죽였다면. 재판장은 일본인이다. 배심원도 일본인이다. “칼을 들고 저를 위협했어요. 저도 모르게 그만. 그건 정당방위였어요.” 하고 말만 했어도 잘하면 풀려났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뫼르소는 끝까지 솔직함만을 고수한다. 결코 연기하지 않는다.

”왜 죽였죠?“

“햇빛에 눈이 부셔서요.”

뫼르소는 소설에 등장한 이래 단 한 번도 연기하지 않았다.

심지어 사형을 목전에 두고서도. 목사가 찾아와 하나님께 회개하면 살 수도 있다는 말에 오히려 화를 낸다. 하나님은 없다며. 뫼르소는 재판장에 있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관찰한다. 마치 관객이 된 것처럼. 연기하는 쪽은 오히려 검사와 그의 연기에 흔들리는 배심원과 청중들이다. 이 재판장을 나가면 다시 일상을 살아갈 사람들. 뫼르소의 사형에 어떤 관심도 의미도 없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연기에 취해 뫼르소를 심판한다.

재판은 살인을 한 뫼르소를 심판하지 않는다.

어머니 장례식장에서 눈물 흘리지 않은 뫼르소를 평가하고 심판한다. 장례식장에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는 사이코패스이며 사회의 악이기 때문에! 검사는 열변을 토한다. 뫼르소는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죄인이 된 것이 아니라 이미 죄인이기 때문에 죄인이 된 것이라고 한다. 그는 자신의 이론을 사람들에게 설득하기 위해 연기한다. 청중은 같은 방향으로 부채질을 하며 뫼르소는 잠재적 살인마라는 실체 없는 주장을 의미로 받아들인다.

종교의 탄생. 마녀를 사냥하라.

뫼르소는 사형선고를 받는다. 어찌 보면 뫼르소가 사형을 선고받은 이유는 ‘살인’ 자체가 아니다. 재판장에서 당연히 해야 할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두가 기대하는 말을.

우리는 여기서 삶의 무시무시함을 느끼게 된다.

바로 사르트르가 언급한 ‘타인은 지옥’이라는 말. 독자는 질문한다. 나의 삶은 나의 것인가. 오롯이 내 생각으로 내 삶을 살아가는가. 어쩌면 우리는 늘 타인의 시선에 따라 행동하고 말하고 살아가는 것은 아닌가.

무서운 진리의 무게가 갑자기 독자의 가슴을 짓누른다.

뫼르소는 위선이 아닌 그저 진실을 선택했을 뿐이다. 재판장에서 그저 ‘칼의 위협 때문’이라고만 말하면 사형을 면할 수 있었다. 그는 끝내 ‘그저 태양 때문에’라고 밀한다.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며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던 열사들이 추구했던 진실과 비교하면 뫼르소의 진실은 어떠한가. 같은가, 다른가? 하찮은가, 위대한가?

카뮈는 세상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뫼르소’라는 극단적인 인물을 전면에 내세웠다. 일부러 독자로 하여금 고개를 갸웃하게 만들만한 인물로. 카뮈는 뫼르소가 아닌 재판장 사람들을 보여주고 싶어 했다. 가장 합리적이라 여겨지는 재판장에서. 그것도 살인이라는 분명한 죄를 지은 주인공을 대상으로. 재판에 이르는 과정을.

그리고 재판장은 세계로 확장된다.

인류의 선택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를. 많은 사람들이 지지하던 전쟁의 의미는 무엇이었는지를. 인간은 합리적 존재가 맞는지를.

우리는 모두 속았다.

재판은 부조리하다. 세상 역시 부조리하다. 검사의 연극에 한 방향으로 부채질하는 청중처럼. 아돌프 히틀러의 연설에 현혹된 독일인들처럼.

부조리한 세상에 대한 뫼르소의 태도는 어떠한가.

저항했는가. 순응했는가. 죽음을 앞에 둔 뫼르소는 삶을 후회하는가. 별것 아닌 것으로 보이는 진실을 고수한 대가는 죽음이다. 분명 세상은 부조리 한 것이다. 뫼르소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삶의 의미를 찾고 있었다. 세계의 부조리는 개인의 허무주의로 이어진다.

이방인을 세 문장으로 요약하면 “죽었다, 죽였다, 죽는다“이다.

가장 담담한 어조의 죽음들이다. 인간의 삶과 죽음의 테마만큼 강렬한 것은 없다. 그러나 뫼르소에게 죽음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모친의 죽음에도, 자신이 직접 살인하는 죽음에도, 심지어 자기 자신에 대한 죽음마저도.

그렇다면 삶은?

뫼르소에게 삶은 어떤 의미인가. 뫼르소가 수감된 감옥 창문으로 스미는 한줄기 빛처럼, 우리는 이방인 말미에 한줄기 해답을 발견한다. 그 모호하고 알쏭달쏭 한 햇빛은 상상의 지중해로 달려가고 싶은 욕망을 낳는다. 심장이 가슴을 친다.

이방인을 읽는 며칠 카뮈의 철학에 빠져 이런저런 깊은 사유를 품을 수 있어 행복했다. 삶은 던져진 것이다. 그다음은? 우리 각자의 몫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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