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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의민주주의 한계에 대안을 제시하다

국민을 위한 선거는 없다

by 방방이

선거철만 되면 한바탕 요란한 소동이 벌어진다. 정치인들은 저마다 거리로 나와 하루 종일 연신 허리를 굽히며 시민들에게 악수를 건네고, 목소리 높여 자신을 뽑아달라는 구걸을 멈추지 않는다. 온 나라가 선거 플래카드와 전단지로 도배되고, 데시벨 높은 유세차의 소음은 온 국민을 한껏 짜증 나게 만든다.


선거일이 다가올수록 정책 경쟁은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지고, 오직 상대방을 헐뜯는 뉴스만이 모든 이슈를 빨아들인다. 야비한 정치꾼과 시민들 사이에 속고 속이는 선거판, 결국 진흙탕 싸움으로 변질되고 우리는 정치에 혐오감과 피로함을 느끼게 된다.

그래 좋다, 어찌 됐든 그렇게 뽑힌 정치인들이 잘만 하기만 하면 되니까. 하지만 선출된 정치인은 더 이상 시민에게 허리를 굽히지 않는다. 공공선을 추구하기보다 자신의 이권과 당리당략에 따라 소모적인 알력 다툼만 일삼는다. 1%의 엘리트가 99%의 의석을 장악하고 있어 더 이상 국민을 대표하지도 못한다. 자본과 결탁한 언론은 편향적이고 신뢰할 수 없는 정보를 쏟아내면서 위기에 빠진 대의 정치에 부채질만 할 뿐이다.


금권 정치와 특권 정치가 판을 치는 선거, 우리는 과연 이러한 선거 제도 하에서 진정한 민주주의를 구현할 수 있을까? 여기 선거는 결코 민주주의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책이 나왔다. 벨기에 출신의 문화사학자이자 고고학자, 그리고 작가인 다비트 판 레이브라우크(이하 레이)가 쓴 <국민을 위한 선거는 없다>라는 책이다.


우리는 선거를 민주주의로 치환하는 데 여전히 망설임이 없다. 오늘날 불거진 문제는 본질적이라기보다 그저 운영 상의 실수 또는 단순한 결함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긴다. 금권 정치를 타파하고, 미디어 환경을 올바로 조성하기만 하면 언제든 본래의 모습인 민주주의를 구현할 수 있다고 믿는다. 게다가 선거 제도는 근현대를 지나는 동안 민주주의를 지향하고 실현하는 방식으로 발전해 오지 않았는가. 최소한의 독재를 막고 최소한의 민주주의를 실현해 온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레이는 “선거란 애초부터 민주적인 도구로 고안되지도 않았고 이제까지도 줄곧 그래 왔다”라고 하면서 우리를 놀라게 한다. 그리고 느닷없이 '제비뽑기'를 대안으로 제시한다. 제비뽑기라니, 이건 대체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인가.


레이는 제비뽑기와 선거에 대한 완전히 새롭고 놀라운 시각을 제시한다. 역사적으로 제비뽑기는 민주적인 것으로, 선거는 비민주적인 것으로 인식되고 운영되어 왔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제비뽑기는 민주주의적이며, 선거는 과두 정치적이다.”라고 말했으며, 몽테스키외 역시 1784년에 발표한 그의 저서 <법의 정신>에서 “추첨을 통한 투표는 본질적으로 민주주의적이며, 선택을 통한 투표는 본질적으로 귀족적이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루소 또한, “추첨을 통하는 길이 민주주의의 본질에 훨씬 가깝다”라고 주장했으며, 혁명이 진행 중이던 프랑스조차 민주주의는 사회 동요를 유발하는 부정적인 것으로 간주하여 귀족적인 선거 제도를 도입했다고 한다. 심지어 선거(eletion)와 엘리트(elite)의 어원이 같다고 하니 도저히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역사 속에서 제비뽑기가 실질적인 정치 제도로 활용된 사례도 수없이 많다. 민주주의의 성지인 고대 아테네에서 제비뽑기로 국정을 운영하였으며, 르네상스 시대의 베네치아와 피렌체, 그리고 아라곤에서도 제비뽑기로 주요 공직자를 선출했다.


레이는 민주주의를 선거로만 축소함으로써 오히려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선거가 민주주의를 구현할 것이라는 이데아는 애초에 존재하지도, 도달할 수도 없는 것으로 간주한다. 선거는 고작 민주주의를 흉내 낼뿐이라는 것이다.


레이는 선거 불참, 선거 결과의 불안정성, 정당들의 출혈, 행정적 무능력, 심신의 진을 빼는 미디어 스트레스 등을 '민주주의 피로감 증후군'으로 명명하고, 그 원인을 ‘선거를 통한 대의 민주주의’ 탓으로 진단한다.


그에 반해 '제비뽑기'는 확률 상 대표성을 확보하는 데에도 용이하고, 당리당략에 휘둘릴 필요가 없어 숙의 민주주의가 가능하여 진정한 공공선을 추구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무작위로 선출되기 때문에 자본, 언론, 단체 등과 결탁할 가능성도 낮다고 한다.


레이의 말처럼 제비뽑기가 더 민주적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과연 제비뽑기를 현실 정치에 적용할 수 있을까? 제비뽑기로 공직자를 선출하는 것에 대해 시민들이 과연 용인할 것일지가 관건이다.


여기서 레이는 당장 제비뽑기를 도입하자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현실을 고려해, 적용 가능한 분야부터 점진적으로 개선해 나가자고 한다. 예를 들어 국회의원이 상원과 하원으로 나눠진 경우 상원은 선거로 선출하되 하원은 제비뽑기로 선출하자는 것이다.


군대 내 부정선거 내부 고발로 유명한 이지문 교수는 추첨 민주주의를 오랫동안 연구해 왔다. 그 역시 현실을 고려해 점진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한다. 선거 제도처럼 자신들의 밥그릇이 걸린 문제는 국회의원 스스로 결정하기 어려우니, 임시적으로 제비뽑기로 뽑은 시민의회를 구성해서 결정하자고 주장하기도 하고, 국가 단위가 너무 크다면 우선 지방 의회를 시범적으로 운영해 볼 수도 있다는 대안을 제시한다.


실제로 캐나다에서는 제도적으로 추첨 민주주의를 통해 시민 의회를 구성한 사례가 있으며, 그 운영도 매우 성공적이었다고 한다. 비록 우리나라에서는 추첨 민주주의를 그리 활발하게 논의하고 있지는 않지만, 미국과 유럽에서는 학자들을 중심으로 활발한 논의가 진행 중이라고 한다.


인간 사회는 사람들이 믿고 신뢰하는 상상의 사회 관계망 속에서 발전해 왔다. 종교, 자본주의, 그리고 선거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그렇게 형성된 세계를 바꾸는 것은 굉장히 힘든 일이다.


현실적으로 제비뽑기를 당장 우리 사회에 전면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사람들이 종교처럼 신봉하는 신념을 깨는 것도 어렵고, 이미 선거를 통해 이득을 보고 있는 기득권 세력의 철의 관계망을 해체하는 것 또한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 보인다. 이런 정치적 이유들을 들지 않더라도 '제비뽑기'가 성공하려면 사회가 '어느 정도' 성숙해야만 '전문성'과 '책임성'이 확보될 것이다. 그런데 그 '어느 정도'가 대체 어느 정도일지, 그리고 그것을 누가 결정할 수 있을지가 문제다.

그러나 사회가 상상의 사회 관계망 속에서 발전해 왔다는 것은 긍정적인 요소이기도하다. 비록 소수이지만 사람들이 상상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곧 제비뽑기가 우리 사회에 하나의 정치적 형태로 피어날 수 있다는 희망도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 번 고개를 돌리는 것이 어렵지 한 번 보고 두 번 보고 자꾸만 보다 보면, 결국 인간들은 자신들이 바라보는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마련이다.


물론 추첨 민주주의가 절대적이거나 무조건적인 민주주의의 대안은 아닐 것이다. 또한 선거라는 제도를 뒤집고, 갑자기 제비뽑기를 전면 도입하자는 극단적이고 급진적인 주장을 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진지한 고민과 논의는 분명 우리 사회를 더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 가는 견인차 역할을 한다고 믿는다.


최근 우리나라의 토론은 과거와 현재에 머물러 있다는 느낌이 있었는데, 이 책을 통해 오랜만에 신선한 미래를 엿볼 수 있어서, 개인적으로 좋았다. 머지않아 선거 대신 제비뽑기로 임시의원이든 지방의원이든 국회의원이든, 공직자를 선출할 날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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