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카페에서 사르트르가 건네는 자유의 말

— AI시대, 예측되지 않는 삶을 살기로 했다

by 미몽

"삶은 탄생 이전에 시작되지 않는다. 그러나 죽음 이전에 끝나지도 않는다. 삶은 매 순간 당신이 선택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장 폴 사르트르

[프롤로그]


“이렇게 불확실한 세상에서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 질문 앞에서 한 철학자가 등장한다.


그는 강의실보다 카페를 더 좋아했고, 철학을 논문이 아니라 이야기와 문장으로 전했다. 무엇보다 그는 인간이 스스로 삶을 선택할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강하게 믿었다.


이 책은 바로 그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가 우리에게 남긴 질문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이제 파리의 어느 늦가을 오후, 사람들이 오가던 한 카페의 작은 테이블로 함께 걸어가 보려 한다. 그곳에서 한 사람이 조용히 노트 위에 써 내려가던 문장이, 어떻게 한 시대의 생각을 바꾸는 철학이 되었는지 살펴보기 위해서이다.


철학은 먼 곳에 있지 않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삶을 어떻게 살아갈지 고민하는 바로 그 자리에서 이미 시작되고 있을지도 모른다.

https://youtu.be/yGewpDCpXgY

파리의 카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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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늦가을, 생제르맹 거리의 카페 '레 되 마고(Les Deux Magots)'에는 오늘도 짙은 담배 연기가 자욱하다. 코트 깃을 세운 한 남자가 노트 위에 무언가를 쉼 없이 써 내려간다. 그는 이따금 창밖을 바라보다가,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무언가를 읽어내듯 다시 펜을 집어 든다.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 1905–1980). 그가 카페의 소음과 일상의 풍경 속에서 길어 올린 단 하나의 문장이 전후 유럽의 폐허를 딛고 일어서는 철학적 선언이 될 줄, 그때 그 거리를 걷던 사람들은 알지 못했을 것이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L'existence précède l'essence)."


지금으로부터 80년이 지난 오늘, 이 문장은 오히려 더 선명하게 빛난다. AI가 우리의 취향을 예측하고, 알고리즘이 우리의 다음 행동을 계산하는 이 시대에, 사르트르의 목소리는 과거에서 온 메아리가 아니라 바로 지금 우리에게 건네는 살아있는 물음이기 때문이다.


철학사의 한 페이지 — 사르트르라는 이름


파리의 지성사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이름이 있다. 바로 장 폴 사르트르다. 그는 단순히 한 명의 철학자가 아니라, 20세기 유럽 지성의 방향을 바꾼 인물로 평가된다. 철학자이면서도 소설가였고, 극작가이면서도 사회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행동하는 지식인이었다. 그의 글과 발언은 대학 강의실에만 머물지 않았다. 거리의 정치와 문화, 그리고 사람들의 일상적인 삶의 고민 속으로 깊이 스며들었다.


사르트르는 인간을 이해하는 데 있어 하나의 급진적인 생각을 제시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은 태어날 때 정해진 본질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그는 이를 유명한 문장으로 표현했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인간은 먼저 세상에 던져진 존재로 살아가고, 그 이후 자신의 선택과 행동을 통해 스스로 어떤 사람이 될지를 만들어 간다는 것이다. 이 생각은 전쟁과 혼란 속에서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많은 사람들에게 강한 울림을 주었다.


그의 철학은 학문적인 이론으로만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소설과 희곡, 강연과 신문 기고를 통해 철학을 이야기했다. 대표작 《존재와 무(Being and Nothingness)》에서는 인간 존재의 자유와 책임을 깊이 탐구했고, 소설 《구토(Nausea)》에서는 현대인이 느끼는 존재의 불안과 낯섦을 문학적으로 표현했다. 이처럼 그는 철학을 삶과 분리된 추상적인 학문이 아니라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 자체에 대한 탐구로 이해했다.


사르트르는 또한 지식인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했다. 그는 철학자가 현실로부터 떨어져 중립적인 관찰자로 남는 것을 거부했다. 대신 시대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믿었다. 이러한 태도는 그가 1964년에 수여된 노벨 문학상을 스스로 거절한 사건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어떤 제도나 권위도 자신의 사상과 자유를 규정하도록 두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래서 사르트르를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를 단순한 철학자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끝없이 질문했던 사상가로 바라보는 것이다. 그는 우리에게 쉬운 답을 주지 않았다. 대신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자유롭고, 바로 그 자유 때문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인간의 삶은 비로소 진지해진다고.


먼저 존재하고, 그다음 나를 발명한다


사르트르는 인간을 사물과 근본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바라본다. 종이를 자르는 칼은 '자른다'는 목적, 즉 본질을 가지고 세상에 왔다. 설계도가 먼저 있었고, 그 설계도대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인간은 다르다. 인간은 아무런 설명서도 없이 세상에 던져진다. 왜 태어났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 아무도 먼저 알려주지 않는다.


이것이 처음에는 두렵게 느껴질 수 있다. 실제로 사르트르는 그 감각을 '구토(Nausée)'라고 불렀다. 아무런 필연성 없이 존재하는 것들의 낯섦, 나 자신조차 이유를 알 수 없이 여기에 있다는 기묘한 어지러움. 하지만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 텅 빈 자리야말로, 우리가 스스로를 써 내려갈 수 있는 백지라고 말한다. 본질이 미리 정해지지 않았다는 것은 곧, 우리가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인간은 설계된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를 발명하는 예술가다.


자유는 선물이 아니라 형벌이다

사르트르의 철학에서 가장 아름답고도 가장 무거운 문장이 있다.


"인간은 자유롭도록 선고받았다."


자유를 '선고'라고 표현한 것은 그냥 수사가 아니다. 선고란 피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선택하지 않을 자유조차 없다. 선택을 거부하는 것도 하나의 선택이고, 침묵도 하나의 대답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도 무언가를 선택한 결과다.


이 자유에는 필연적으로 책임이 따라온다. 사르트르는 나의 선택이 단지 나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고 말한다. 내가 어떤 삶을 살기로 결심하는 순간, 나는 '인간이란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하나의 모델을 세상에 제시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앙가주망(Engagement), 즉 자신의 삶으로 세계에 참여하는 태도다.


이 지점에서 사르트르는 우리 시대의 가장 편리한 도피처를 정확히 짚어낸다. 바로 '자기 기만(Mauvaise Foi)'이다. '어쩔 수 없었어. 다들 그렇게 하잖아.' '알고리즘이 추천한 거라서.' 'AI가 괜찮다고 했으니까.' 이런 말들은 모두 자유의 무게를 다른 곳에 떠넘기는 시도다. 사르트르는 이것을 인간이 스스로 사물이 되기를 선택하는 행위, 즉 자신의 자유를 스스로 부정하는 방식이라고 보았다.


그렇다고 그가 우리를 차갑게 몰아붙이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자기 기만을 직시하라는 것은, 우리가 그만큼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 나온 말이기 때문이다. 사르트르의 철학은 냉혹하지만, 그 냉혹함의 바닥에는 인간에 대한 깊은 신뢰가 깔려 있다.


지옥은 타인이지만, 구원도 타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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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의 가장 유명한 문장 가운데 하나는 희곡 《닫힌 방》에 등장한다.


"지옥은 바로 타인들이다(L'enfer, c'est les autres)."


이 문장은 흔히 오해받는다. 타인을 피하라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타자의 시선은 나를 불편하게 만들지만, 바로 그 시선을 통해 나는 내가 어떤 존재인지 비로소 대면하게 된다. 타자는 나를 객체로 만드는 동시에, 나로 하여금 주체로 응답하도록 강요한다.


여기서 AI와 인간 타자의 본질적인 차이가 드러난다. 알고리즘은 나를 데이터로 분석하지만, 나를 '판단'하지는 않는다. 나의 선택에 도덕적으로 반응하지 않는다. AI는 내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 그저 다음 추천 목록을 업데이트할 뿐이다. 그것은 결코 나를 불편하게 만들지 않고, 그래서 결코 나를 성장시키지도 않는다.


반면 인간 타자와의 관계는 갈등을 품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의 실망한 눈빛, 친구의 날카로운 한마디, 낯선 이의 예상치 못한 친절 — 이것들이 우리를 흔들고, 우리를 다시 생각하게 하고, 우리를 조금씩 변화시킨다. 지옥이 타인이라면, 구원 역시 타인이다.


사르트르와 시몬 드 보부아르의 관계는 이 역설을 잘 보여준다. 그들은 서로에게 구속되지 않으면서도 서로를 가장 진지하게 대한 사람들이었다. 서로의 원고를 읽고, 비판하고, 함께 논쟁했다. 그 긴장과 마찰 속에서 두 사람은 각자 더 깊은 철학자가 되었다.


알고리즘이 나를 모를 때, 나는 비로소 자유롭다


이제 이 이야기를 오늘로 가져와보자.


스마트폰 화면을 켜는 순간, 알고리즘은 이미 우리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고 있다. 지난주에 본 영상, 지난달에 검색한 단어, 3초 이상 머문 게시물들 — 그 데이터들이 모여 '당신은 이런 사람'이라는 조용한 선고를 내린다. 우리는 그 예측에 점점 맞춰가며 살아간다. 추천된 콘텐츠를 보고, 추천된 물건을 사고, 추천된 경로로 걸어간다.


사르트르라면 이것을 보고 무슨 말을 했을까. 아마도 이렇게 물었을 것이다.


"당신은 당신 데이터의 합입니까, 아니면 그 너머의 무언가입니까?"


알고리즘은 나를 분석하지만, 나를 판단하지는 않는다. 내 선택에 도덕적으로 반응하지도 않는다. AI는 내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 그저 다음 추천 목록을 업데이트할 뿐이다. 그것은 결코 나를 불편하게 만들지 않고, 그래서 결코 나를 성장시키지도 못한다.


사르트르의 철학이 AI 시대에 특별히 빛을 발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알고리즘은 과거의 나를 기반으로 미래를 예측한다. 그 예측은 꽤 정확하다. 하지만 인간의 가장 빛나는 순간은 대부분 그 예측을 벗어났을 때 찾아왔다.


오랫동안 읽지 않던 장르의 책을 집어 든 어느 밤. 늘 다니던 길 대신 낯선 골목으로 접어든 어느 오후. 누구도 추천하지 않았지만 마음이 이끈 선택. 그런 순간들이 모여 우리가 된다. 사르트르식으로 말하자면, 알고리즘의 예측을 배반하는 순간마다 우리는 '나는 내 데이터의 합 그 이상이다'라고 조용히 선언하는 셈이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사르트르는 인간에게 자유를 ‘선물’처럼 건네지 않았다. 그에게 자유는 오히려 어깨에 짊어져야 할 짐에 가까웠다. 왜냐하면 자유는 언제나 선택의 책임을 함께 가져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짐 속에는 동시에 가능성이 들어 있다. 인간에게 미리 정해진 본질이 없다는 것은, 우리의 삶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아직 쓰이지 않은 페이지가 남아 있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지금, AI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는 어떤 말을 건넬까. 그의 철학을 바탕으로 세 가지 메시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불안을 피하지 말고 지나가라는 것이다.


무언가를 선택해야 할 때 우리는 종종 불안을 느낀다. ‘이 선택이 맞을까?’, ‘다른 길이 더 좋은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돈다. 때로는 아무도 대신 결정해 주지 않는 현실이 막막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사르트르에게 이런 불안은 약함의 신호가 아니라 살아 있다는 증거였다. 우리는 선택할 수 있기 때문에 불안을 느낀다. AI는 계산을 할 수는 있지만 불안해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AI는 인간처럼 존재를 걸고 선택하는 경험을 하지 못한다.


불안은 피해야 할 감정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삶을 선택하고 있다는 신호일지도 모른다.


두 번째는, 자기 기만의 언어를 조심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때때로 이런 말을 쉽게 한다. “어차피 AI가 더 잘 알잖아.” “다들 그렇게 하니까.”

이런 말들은 편리하다.


하지만 그 뒤에는 종종 책임을 내려놓고 싶은 마음이 숨어 있다. 사르트르는 이것을 ‘자기 기만’이라고 불렀다. 자유로운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선택할 수 없는 것처럼 스스로를 속이는 태도다. AI가 많은 것을 대신해 주는 시대일수록, 우리는 더 쉽게 생각하는 일을 포기할 수 있다. 그러나 편리함과 무책임은 때때로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그래서 사르트르는 아마 이렇게 말할 것이다.

“결정을 미루지 말라. 선택하지 않는 것도 결국 하나의 선택이다.”


세 번째는, 우리의 선택이 세계를 향한 하나의 발언이라는 사실이다.


우리가 무엇을 사는지, 어떤 정보에 귀를 기울이는지, 무엇에 침묵하고 무엇에 목소리를 내는지. 이 모든 행동은 단순한 개인의 취향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참여이기도 하다. 사르트르는 이를 ‘앙가주망(engagement)’, 즉 삶으로 세계에 참여하는 태도라고 불렀다.


우리는 거대한 역사를 바꾸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의 선택은 분명 세상에 작은 방향을 더한다.


AI가 점점 더 많은 결정을 대신해 주는 시대에, 인간의 삶은 오히려 더 질문을 받는다. “그래서 당신은 어떻게 살 것인가?” 사르트르의 철학은 거창한 답을 강요하지 않는다. 다만 이렇게 말할 뿐이다. 자유는 이미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


이제 남은 것은 그 자유로 어떤 삶을 만들어 갈 것인가라는 질문이다.


[에필로그] 당신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1964년 노벨 문학상을 거부하며 사르트르가 했던 말을 다시 떠올려본다. 상은 사람을 고정시킨다. 그는 끝까지 완성되지 않은 인간으로 남고 싶었다.


이것이 어쩌면 그가 우리에게 주는 가장 따뜻한 말일지도 모른다.


당신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당신의 데이터가 어떤 사람을 가리키고 있든, 당신의 과거가 어떤 패턴을 그리고 있든, 당신의 내일은 아직 쓰여지지 않았다. 알고리즘이 당신의 다음 행동을 예측할 수는 있어도, 당신이 다음에 어떤 사람이 될지는 예측하지 못한다.


본질이 정해지지 않았다는 것은 저주가 아니라 초대다. 스스로를 발명하라는, 매 순간 자신을 새롭게 써 내려가라는 조용한 초대.


파리의 카페에서 담배 연기 속에 이 질문을 처음 던진 남자는 이미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그 질문은 여전히 살아, 오늘 이 순간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오늘 당신의 선택은 알고리즘이 계산한 결과인가, 아니면 당신이 직접 던진 자유의 주사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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