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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홍 Nov 06. 2024

하얀 나비

판도라의 상자


큰 태풍이 오기 전 느껴지는 고요함은 서서히 숨통을 조여오듯 마음을 불안하게 한다.

지나가는 바람 한 점도 서슬 퍼런 태풍의 고요 속에서는 멈춰 설 수밖에 없을 것임을 알 것이다.

낮게 깔린 검은 구름, 물을 흠뻑 머금고 있는 공기의 축축함, 평소와 달리 하얀 거품을 남기지 않고 두껍게 일렁이는 파도는 곧 엄청난 파괴력으로 무엇이 다가오고 있다는 전조를 예감케 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삶을 통째로 삼켜버리는 거대한 파도가 덮쳤다.

그것이 오기 전 어떤 두려움을 느꼈지만 무시했다.

살다 보면 이런 날도 있고 저런 날도 있지 않은가, 이번에도 그런 날들 중에 어느 날이라고 생각했다.

잠시 파도에 몸을 맡기고 출렁거리다가 태풍이 지나가면 상처를 복구할 요량이었다. 

그 정도는 몇십 년 자영업을 하던 촉으로 충분히 버틸 수 있는 출렁임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내가 틀렸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두꺼운 파도 속에 숨겨진 거대한 소용돌이는 순식간에 내 삶을 삼켜버렸다. 

정신 차리고 두 눈 똑바로 뜨고 상황을 바라봤지만, 그것들은 마치 나를 보면서 조롱하듯 비웃었다.

'너 따위가 감히! 어디 할 수 있으면 해 보시지!' 

어떤 표현으로 이 상황을 자세히 묘사해 볼까 아무리 찾아도 나의 어휘력으로 어림없는 현실이 그것이었다.

온갖 그럴싸한 단어들을 조합해도 표현할 수 없는 운명의 장난 같았다.


죽음이 두렵지 않을 만큼 나에게는 실로 엄청난 고난이자 시련이었다. 

그 비참한 현실에 나는 몸부림치며 저항했다.

믿지도 않는 온갖 신들을 증오하며 내 안의 분노는 얼음송곳보다 더 날카롭게 내 심장을 찔러댔다.

그 상황에 고스란히 매몰된 채 깊이 더 깊이 빨려 들어갔다. 

깊은 동굴에 숨어서 나와 연결되어 있는 모든 것들을 차단한 채 홀로 긴 사투를 벌였다.

누구에게 하는지 조차 모르는 "왜?"라는 질문을 끝도 없이 반복했다.

"왜, 내가?"

"왜, 뭘 잘못했는데?"

"왜, 이런 상황을 내가 감당해야 되는데?"

"왜?"

분노와 원망에 울다 지쳐 잠이 드는 날은 계절이 바뀌고 해가 바뀌어도 계속되었다.


어느 날 거울 속에서 비쩍 마르고 푸르스름한 기미가 잔뜩 끼어 있는 이상한 여자를 발견했다.

양볼이 움푹 파인 얼굴에 퉁퉁 부어오른 두 눈덩이는 흡사 에바르트 뭉크의 절규 속 인물과 닮아있었다.

어느새 자라난 머리카락에서 은빛새치들이 비닐하우스처럼 반짝거렸다.

처참해진 몰골을 들여다보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지금 내 나이 쉰 하나.

여기서 끝인가…. 이러려고,


내가 그토록 원했던 인생의 마지막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왜 만약을 위해 살지 못했을까?

나는 왜 항상 머물렀던 그 자리에서만 최선을 다했을까?

이런 날이 올 줄 왜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을까?

왜 내 인생은 항상 꽃 밭일 거라고 믿었을까?

이렇게 달리고 달리다가 내가 다다를 곳이 벼랑끝일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을 왜 못했을까?

그 어떤 준비도 없이, 이렇게 가차 없이 길바닥에 내동댕이 쳐질 것 까지야 없지 않았을까….

그것도 꽃같이 젊은 날을 뒤로하고 이제 한껏 여유 부리며 살아가도 모자랄 나이에 운명의 장난처럼 날아든 지금 이 상황을 내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나 다운 것인지  답을 내릴 수 없었다.


쉼 없는 삶이었다. 

또렷한 내 기억에 다섯 살 그때부터 내 삶은 긴장과 불안의 연속이었다.

애씀의 연속이었다. 

나 스스로 나를 다독이며 그 누구에게도 손가락질받지 않으려고 남에게 피해 주지 않는 선에서 내 것 지키며 자존심, 자존감 챙겨가며 나름 멋있는 삶을 만족하게 꾸려가려고 애쓰는 삶을 살았다.

'화양연화'

내 마지막은 '화양연화'였다.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을 살다가는 것이 내 생의 마지막 목표이자 꿈이었다.

누군가 지난 날들 중에 다시 돌아가고 싶은 날을 꼽으라고 해도 나는 단 하루도 되돌아가고 싶은 날이 없었다.

그 하루하루가 나는 최선을 다한 날들이었다.

누가 감히 내가 살아온 날들에 가치를 매길 수 있을까?

그것이 혹 실패였다 하더라도….

구해지지 않는 답을 나는 묻고 또 묻고 있었다.

내 안에 분노는 매시간 쉬지 않고 나를 수렁으로 끌고 내려갔다. 한번 시작하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 감정은 쉽사리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어느 날 나도 모르게 죽을 결심을 하고 준비를 했다. 

생각보다 마음은 무겁지 않았고 어떤 죄의식도 느껴지지 않았다.

단 한마디 어떤 말도 남기지 않은 채 모든 준비를 끝내고 침대에 누웠다.


어렴풋이 내 안의 깊은 어느 한 구석에서 ‘살고 싶다’라는 소리가 메아리처럼 들려왔다.

그냥 ‘살고 싶다’라는 단순한 말이 아닌 어느 깊은 구석에 웅크리고 있던 무언가가 내 피부를 통해 소름 돋게 살아나고 있었다. 그것이 심장을 뭉클하게 움켜쥐고 가슴을 뻑뻑하게 조여왔다.

뜨겁고 진득한 울음이 터져 나왔다. 소리 나지 않는 처절한 몸부림이 내 온몸을 돌며 자극했다.

이 아픈 가슴을 뜯어내고 싶을 만큼 낯선 고통이었다.

엄마의 자궁 속에 있을 때의 모습처럼 몸을 활처럼 웅크리고 방바닥을 빙글빙글 돌며 무거운 숨을 토해내듯 그렇게 울부짖었다.


내가 그토록 살고자 원했던 깊은 내면의 나를 꺼내기란 눈앞에서 저승사자를 만난 것보다 훨씬 떨리고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내 안에서 생생하게 살아 숨 쉬고 있는 기억들을 꺼내며 그날들의 장면들을 마주 본다는 것은 내가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던 과거의 아픈 상처들을 다시 겪어내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됐다.

나의 다섯 살 꼬마부터 시작된 상처들을 과연 내가 마주할 수 있을까? 벌써부터 두려움이 시작됐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눈물이 차곡차곡 쌓이기 시작했다.

이렇게 내 마음 안에서 서로 먼저 억울함과 분노를 토해내려고 아우성치고 있는 소리를 이젠 외면할 수 없게 되었다. 내가 용기 내지 않으면 누구도 이 판도라의 상자를 열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두려움을 차례차례 마주하면서 그 짐들을 내려놓고 진정한 '자유'를 찾겠다고 나는 결심했다.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 입학식날 나는 키가 제일 크다는 이유로 제일 뒷줄에 세워졌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깡마르고 청바지와 굵은 털실로 짜인 도톰한 크림색 스웨터를 입고 있었다.

머리에 헤어핀을 꽂지 않으면 영락없는 사내아이처럼 보이는 그런 외모였다.

게다가 남자아이들보다 우월하게 큰 키를 우리 부모님은 자랑스럽게 여기셨다.

생각해 보면 그 당시 우리 집이 다른 집들보다 부유했던 것 같다.

청바지를 말끔하게 차려입은 아이도 없었을뿐더러 운동화며 책가방이며 어린 내가 봐도 그렇게 보였다.

제일 뒷줄에 서 계셨던 선생님께서 부모님이 어느 쪽에 계시냐고 물으시길래 나는 부모님을 향해 손을 들어 보였다. 순식간에 주변의 학부모님들의 시선이 우리 부모님 쪽으로 쏠렸다.

그 많고 많은 학생들 중에서 뭔가 나도 특별함을 어렴풋이 느끼는 순간이었다.

많은 학생들 틈에 있어보기 전에는 전혀 생각해보지 못했던 뭔가 다른 느낌.


작은 도시 어느 마을의 우리 집.

동네에서는 제일 큰집이었다. 

제일 큰 안채에 우리 가족과 할머니가 살았고 바깥채 두 곳은 세 들어 사는 가족들이 살았다. 

대문에서 한참 뛰어들어가야 나오는 우리 집에는 돼지, 강아지, 닭, 토끼등 다양한 가축들이 함께 살았고 텃밭이라고 하기에는 제법 큰 밭에서는 옥수수며 고구마, 고추, 토마토, 오이 등 각종 열매와 채소들이 가득했다. 그곳은 언제나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고 엄청난 상상력을 키워준 그런 곳이었다.

땅을 조금만 걷어내면 지렁이가 떼 지어 꿈틀거렸고 고추를 만지고 눈을 비비면 눈이 금세 퉁퉁 부어올랐다.

철조망 안으로 긴 막대기를 넣어 암탉의 궁둥이를 툭툭 건드리면 암탉이 뿌연 먼지를 일으키며 푸드덕 날아올랐고 그곳에는 어김없이 달걀 몇 알이 들어있었다.

간식을 먹다가 남기면 엄마의 잔소리가 듣기 싫어서 돼지우리에 가서 돼지와 조용히 협상을 하기도 했다.

비 오는 날 돼지가 비를 맞으며 밥을 먹는 것이 안타까워서 우산을 들고 돼지가 밥을 다 먹을 때까지 서있기도 했다. 마당의 잔디 위에는 항상 넓은 평상이 있었고 여름이면 모깃불을 피워놓고 그곳에서 밥을 먹는 일이 많았다. 

일본에서 유학하셨던 고모님 덕에 냉장고, TV, 밥솥등 그 당시 귀했던 가전제품들이 우리 집에는 있었다.

다이얼식 전화기도 우리 집에 제일 먼저 들어와서 동네사람들의 편의도 제공해 주었었다.

저녁밥을 다 먹고 드라마를 하는 시간이 되면 어느샌가 동네 어르신들이 속속 우리 집으로 와서 평상에 자리 잡고 앉으셨다. 아버지는 마당에서도 잘 보이도록 마루입구까지 TV를 꺼내놓으셨다. 비가 내리거나 눈이 내리는 날에는 한분, 두 분 마루로 들어오시고 어느새 우리 집은 온 동네 사랑방이 되어있었다.

나는 동네어른들이 챙겨 오시는 간식이 좋았고 어떤 분이든 상관없이 무릎에 앉아 간식을 먹다가 그 무릎을 베고 잠이 들기 일쑤였다.


그런 풍요로운 환경에서 먹을 것은 이웃과 나누고 항상 형편이 어려운 집을 먼저 배려하시는 할머니와 부모님을 보며 넉살 좋은 아이로 거침없이 자랐다.


내가 국민학교를 입학했을 당시의 우리나라는 끝과 시작의 교집합 안에 속해있었던 매우 혼란스럽고 긴장이 감도는 그런 사회였다.

일제강점기에서 해방을 맞이했을 무렵은 우리의 조부모님들이 살아온 시대였고,

 6.25 전쟁이 발발할 당시에는 우리의 부모님이 태어나고 살아온 시대였다.

언제까지나 지속될 것만 같았던 암흑 같은 시대는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새마을 운동을 시작으로 대대적인 개발의 속도를 내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밝은 곳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이 시대에 내가 태어났고 이렇게 혼란스러운 각각의 시대를 거쳐온 3대가 한 집에 살고 있는 그런 시대였다.

각 지방에서도 초가집이 허물어지면서 슬레이트 지붕의 어떤 규격에 맞춘 듯 번듯한 집들이 지어졌다.

버스가 지나가고 나면 허옇게 먼지를 뒤집어 씌우던 비포장 도로들이 아스팔트를 깔아 미끈하게 잘 빠진 도로들로 바뀌어갔다.

위생의 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대두되면서 전국에 걸쳐 쥐 잡기 운동이 펼쳐졌고 (어떤 마을에서는 쥐 한 마리당 10원씩 쳐주는 곳도 있었다.) 각 읍, 면사무소에서는 쥐덫이나 쥐약을 무료로 나누어주기도 했다.


농사만 지을 줄 알았던 사람들이 하나 둘 도시로 빠져나가 돈을 벌기 시작했고 집집마다 경제사정들이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다. 어떤 가정은 아버지가 돈을 벌러 해외로 나가게 되면서 생이별을 하는 가정들도 있었고 어떤 가정은 부부가 돈을 벌기 위해 아이들을 할머니집에 맡겨놓고 일 년에 한두 번 찾아오는 그런 가정들도 있었다. 

집에서 부업으로 약간의 반찬값이라도 살림에 보태려고 벌었던 주부들이 일자리가 늘어가면서 점점 하루종일 일을 할 수 있는 근무지를 찾아 나섰다. 

살림살이도 경제사정도 좋아지는 듯했지만 그에 따르는 부작용들도 사회문제로 골칫덩어리가 되었다.

부모가 돈을 벌러 나가 하루종일 아이들만 있는 가정은 나이에 상관없이 큰 아이의 역할이 막중했다.

동생들 밥을 챙겨 먹이는 것은 기본이고 씻기고 재우고 숙제도 함께 봐줘야 하고 위험한 것들로부터 보호도 해줘야 했다. 고아들이 속출했고, 여덟 살이 되면 학교를 들어가야 하는 아이들이 잘 사는 집에 식모나 애보기로 들어가야 하는 안타까운 사정들이 생겨났다. 

아이들을 돈으로 흥정하는 일이 비일비재했지만 누구 하나 아이들을 보호하려고 나서는 어른들은 없는 그런 사회였다. 

저녁이 돼도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 아이들이 길에 넘쳐났고 환경적으로 정서적으로 아이들은 사회의 약자에 불과했던 그런 시대였다.



비밀 하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다섯 살 때의 그날을 생생히 기억한다.

“아저씨가 과자 줄게 그 대신 누구한테도 절대 말하면 안 된다.”라고 했던 그 아저씨라는 사람.

그가 나에게 했던 유사성행위.

나를 보면서 자신의 성기를 노출시켜 이상한 말들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흠칫 놀라며 도망가려는 나를 뒤에서 붙잡고 내 등 뒤로 딱딱한 무엇을 밀착시켜 이상한 신음을 내며 힘껏 끌어안았다. 공포에 떨며 나는 연신 도망치려 안간힘을 썼다.

그때도 그 아저씨가 했던 말 

“이건 너랑 나랑 비밀이야!! 누구한테 말하면 너를 여기 가둬둘 거야!!”

대답도 하지 못하고 나는 연신 고개만 끄덕인 채로 그곳을 빠져나왔다.

나는 그날의 그 순간의 공포를 그대로 가슴속에 문신처럼 새겼다. 

절대 말하면 안 되는 비밀이었다.

요즘 세상 같았으면 있을 수도 없는 일이겠지만 그때는 1970년대 중 후반이었고 나와 그 시절을 함께 보낸 이들 중에는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겪고도 말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합당한 권리조차 이해받지 못하는 그런 시대였다.

어쩌면 다른 사람들은 알아차리지 못할 다섯 살의 기억이 나는 그 엄청난 사건으로 인해 너무도 선명하게 상처로 남아 기억 속에 저장되어 버렸다.

그때부터 나는 시름시름 앓기를 수없이 반복했고 그럴 때마다 입은 굳게 닫혀갔다.


그 작은 아이는 그때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리고, 그 아저씨는 무슨 생각으로 그 아이에게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지르고도 낯짝 두껍게 협박까지 했을까?

그 아이에게 그 마음의 상처가 혹은 문신처럼 새겨진 그 비밀이 두려움이었을까?

무엇으로부터의 두려움이었을까.

감히 다섯 살 꼬마아이에게 되물어볼 수 조차 없는 나의 이기적인 생각들이었다.

가끔 영화에서 이와 비슷한 장면이 나오면 나는 피가 거꾸로 솟는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성폭행을 당한 피해자 어린이를 증인으로 세우고 그 아이에게서 그날의 상황들을 그대로 묘사하게 하는..


그날의 그 상황을 나였으면 어떻게 표현할 수 있었을까.

밀폐된 공간에 동네 아저씨와 단둘이 있고 무서운 힘이 가해지고 공포에 떠는 나에게 수치심을 알게 했던 그 상황을 그때의 나였으면 어떻게 설명했을까.

'엄마, 나 무서워요.. 나 우리 집에 가고 싶어....' 소리 없는 외침이 간절하게 귓가에 들린다.

그때 그 아이가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어른들은 어디 있었을까.

그 아이가 소리 지르면 누군가 달려와서 그 아이를 구해줬을까?

어떤 두려움이 그 아이로 하여금 비밀을 지키게 만들었을까.



비밀 둘.

두 번째 나의 상처와 마주하기까지 또 몇 주가 흘렀다. 

겨우 하나 꺼냈는데 앓아누울 만큼 기운이 없고 이유 없이 아팠다.

마음의 표정들.

글로 표현해 낼 수 없는 이 표정들을 멍하니 들여다봤다.

나의 상처들과 마주하고 싶어 하지 않는 내 마음을 이제 조금 알 것 같았다.

무섭고 아프고 먹먹하지만 감히 그것들을 꺼내서 값싼 동정이나 연민 같은 것으로 둘러대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때의 어린 마음을 감싸 안기에 나는 이미 세상과 타협하는 편한 방법들에 익숙해져 있었고, 

순수하고 귀한 그 어린아이는 이런 나를 밀어내고 있다는 것을 알 뿐이었다.


엄마에 대한 비밀을 지켜야 했다. (이건 내가 그냥 말하지 않은 비밀이었다)

늘 바쁘게 어디를 다녀오시는지 엄마는 아버지가 퇴근하시는 시간에 맞춰 집에 들어오셨다.

나와 동생들이 놀면서 어질러놓은 집안 여기저기를 대충치우시고 저녁밥을 지으셨다.

문제는 집을 치우는 과정에서 나에게 가해지는 언어적, 물리적 폭력이었다.

엄마가 집으로 귀가하는 순간 마당을 들어서면서부터 소리가 들린다.

세숫대야가 나뒹구는 소리, 누군가에게 욕을 하는 듯한 빠른 말투가 나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그 불똥이 나에게 튀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번번이 그 바람은 나를 비켜가지 않았다.

언제 닥칠지 모르는 불안은 점점 커져갔고 특히 동생들과 나를 남겨두고 엄마가 외출하는 날은 불안감이 극도로 커지면서 마당에서 들리는 작은 소리에도 나는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엄마가 외출한 날은 동생들과 항상 셋이서 쪽마루에 나란히 앉아 엄마를 기다렸다.

내가 동화책을 읽어주고 동요도 들려주고 할머니가 해 주셨던 귀신이야기도 해주면서 엄마를 기다리는 시간이 마냥 지루하지는 않았다.


그날은 비가 내리고 동생들이 춥다고 오들오들 떨었다.

나는 동생들이 춥다는 말에 방으로 통하는 아궁이에 불을 지펴보려고 창고에서 장작이랑 마른 보릿단을 꺼내서 불을 붙였다. 그것이 화근이 되었다.

보릿단을 꺼내면서 딸려왔던 가지들을 치우지 못한 탓에 불이 그쪽으로 옮겨 붙어 창고가 불길에 휩싸였다.

내가 물을 길어다 그 불을 어떻게든 꺼보려고 하던 찰나에 엄가가 들어오 시가다 그 광경을 보았다.

엄마는 핸드백이며 입고 있던 옷을 벗어던지고 물을 부지런히 쏟아부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렇게 불을 끄고 있는 모습이 너무나 무서웠다.

옆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두 손 모으고 있던 나는 다음에 벌어질 어떤 일들을 직감했다.

그 당시 당한 매질은 내 뼛속 어딘가 억울한 감정으로 남았을 것이다.

무모하긴 했지만 동생들이 춥다고 해서 따뜻하게 해주고 싶은 마음에 그런 일이 생긴 것인데,

이런 해명조차 할 시간을 주지 않고 그저 매질과 욕설을 하며 나를 죽일 것처럼 노려보던 살기 가득한 엄마의 눈빛을 나는 잊을 수 없었다. 

무조건 잘못했다고 두 손 모아 비는 수밖에 그 상황을 빠져나갈 방법이 없었다.


매 맞은 데가 아프기도 했지만 뭔지 모를 서러움이 북받쳐올라 창고에서 쪼그리고 앉아 조용히 울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엄마의 무서웠던 눈빛과 모진 말들이 나로 하여금 엄마에게 더욱 매달리게 만들었고, 엄마의 따뜻한 말 한마디와 손길이 그리워 나 스스로를 끊임없이 착한 아이로 만들었다.

따뜻하게 안아주지도 않았고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지도 않았지만 엄마가 나를 미워해서 그러는 게 아닐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래도 나를 사랑하고 있을 거라고...

이런 날은 베개를 흥건히 적실만큼 눈물을 흘리며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나는 낮에 동화책에서 봤던 어느 외국의 궁전 같은 집에서 인형들을 갖고 놀고 있었다.

벽난로에서는 마른 장작들이 따닥따닥 소리를 내며 타고 있었고 엄마는 동생을 안고 흔들의자에 앉아서 깜박 졸고 있었다. 머리를 예쁘게 묶은 내가 강아지와 함께 인형극을 하고 있었다.



 비밀 셋.

버스가 출발하기도 전에 엄마는 어디론가 바쁜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엄마가 등 돌려 가는 모습을 보며 이 길로 엄마는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스쳐갔다.

국민학교 1학년이 채 지나가기 전 나는 세 번째 비밀을 가슴에 새겼다.


그날따라 엄마가 나와 함께 장을 보러 가자고 했다. 

버스 타고 나가는 곳이라 나는 신나 있었다. 버스차창밖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간판 읽는 것을 좋아했다.

이상하게 기억력이 좋았던 나는 몇 번 보고는 간판에 붙은 전화번호까지 다 외워버렸다.

그래도 볼 때마다 새로웠고 재미있었다. 

그 당시 차장언니의 “오~~~ 라이” 소리도 나의 호기심을 자극하기 충분했다. 

그리고 시장에 가면 또 하나 좋았던 것은 자꾸 뿌리치는 엄마의 손을 길을 잃을까 봐 무섭다는

핑계로 꼭 잡고 다닐 수 있다는 것이었다.

엄마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내가 절대 길을 잃어버릴 일도 엄마를 놓칠 일도 없는 아이라는 것을…

그 보다 꼬마였을 때도 그렇게 놓쳤던 엄마를 울며불며 찾지 않고 경찰아저씨를 앞장 세워 집을 찾아왔던 이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경찰아저씨가 대단한 꼬맹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고 한다.

그날도 엄마는 나에게 면박을 주었다. 


그런데 그날따라 엄마는 내 손을 심하게 뿌리치지도 않았고 이것저것 장을 많이 봤다. 

마치 오랫동안 장을 안볼사람처럼…..

그리고는 당신은 볼일이 있으니 먼저 들어가 있으라며 나를 혼자 버스에 태우고 차장언니에게 이런저런 당부를 하셨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람들 틈으로 총총히 사라져 가는 엄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또 하나의 비밀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걸 예감했다. 

엄마가 당분간 아니 어쩌면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것 같은….

차장언니는 내가 안전하게 하차할 수 있도록 손을 잡아주었고 장본 것들은 버스정류장 구석으로 내려주었다. 아마 엄마가 이것까지 부탁하신 것 같았다.

버스정류장 벤치에 앉아 달랑거리는 발을 흔들고 있을 무렵 어떻게 알았는지 할머니께서 데리러 오셨다. 

'엄마가 연락하셨나?' 

장본 것들을 들고 집으로 가는 길에 할머니께서 먼저 말을 걸어오셨다.

“엄마는 어디 간다고 했어? 언제 온다고 안 하고 갔어? 어째 어린것만 버스 태워 보내고..”

(어떻게 알고 나오셨지? 엄마가 연락한 게 아닌가? 나는 뭐라고 말해야 하지?)


마지막에 할머니가 하신 혼잣말 때문에 나는 어떤 물음에도 대답하지 못했다.

어린것을 혼자 버스 태워 보냈다는 심기불편한 소리가 끝내 내 입을 다물게 했다.

나는 아무 대답 없이 할머니를 따라갔다.

(비밀) 정말 나는 엄마가 어디로 간다고 했는지, 언제 온다고 했는지, 왜 떠난다고 했는지 듣지 못했다.

그래도 아버지와 할머니는 알고 계셨을 것이다. 굳이 나에게 듣지 않아도….

 시기에 나는 혼란의 연속이었다. 

여덟 살의 아이가 딱히 어떤 마음을 굳게 먹었는지 생각은 나지 않았다.

하지만 너무나 또렷한 기억은 매일매일 하교 후 집으로 가는 길이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이렇게 걸어서 어떤 소용돌이를 빠져나가고 싶다는 생각뿐....


알지 못하는 어른들의 고함소리와 어린 동생들의 울음소리와 뭔가가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들이 내 몸을 긴장하게 만들었다. 

그런 와중에도 나는 동생들을 챙겨 동네 놀이터로 나갔고 해 가져서 할머니가 부르는 소리를 들어서야 집으로 들어갔다.

어느 때는 동네 이 집 저 집에서 저녁밥을 해결하는 날도 있었다. 예전에 동네 사람들이 우리 집에서 식사를 해결할 때처럼 이번엔 우리가 그랬다.


할머니나 아버지가 저녁 늦게 볼일을 마치고 들어오는 날이 잦았다.

어린 나로서는 어떤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만 짐작할 뿐 그 누구도 나에게 알려주는 사람이 없었다.

미쳐 몸을 숨기지 못한 어느 날 여러 명의 어른들이 집으로 찾아와 온갖 살림살이들을 부수기 시작했고 신발을 신은채 방으로 들어온 한 어른이 나에게 엄마는 어디 갔냐고 물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모른다고 말했지만 만약 안다고 해도 그것이 비밀인 이상 나는 지켰을 것이다.

무조건 모른다고 하는 것이 엄마를 지키는 나의 결의 같은 것이었다.


나에게는 지켜야 하는 또 다른 것이 있었다.

그 당시 네 살, 세 살이었던 동생들이었다. 우리 집에 찾아왔던 어른 중에 우리가 보는 앞에서

“이 아이들 세명 팔아서 빚 갚으면 되지 않냐”라고 하는 소리를 들었다.

순간 할머니가 그 사람에게 물건을 집어던졌고 어디서 그런 돼먹지 않은 소리 하냐며 몸싸움을 벌였다. 

그날부터 나는 자다가도 동생들이 잘 있는지 살피는 버릇이 생겼고 왠지 모르게 눈물이 많아졌다.

어른들이 고함을 치기 시작하면 나도 모르게 코끝이 시큰해지면서 눈물이 고이는 것을 억지로 참고 참았다.

그때부터 나는 마음속으로 기도라는 것을 했다.

제발 우리는 떨어지지 않게 해달라고, 만약에 고아원에 가게 되더라도 꼭 같은 고아원으로 보내달라고 울며 울며 기도했었다. 어린 나이였지만 목숨을 걸고라도 지키고 싶은 것에 대한 소중함이 뭔지 알고 있는 듯했다.

다행히 그런 나의 마음을 아시는지 아버지는 우리 삼 남매를 온 마음을 다해 당신 품 안으로 끌어안으셨고 행여 우리들에게 상처가 될만한 말들은 듣지 못하게 막아내주셨다.


그 뒤로 외가 식구들은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지만 친가에 삼촌들이나 언니들이 우리를 많이 돌봐주었다.

그렇게 우리는 대궐같이 큰 집을 팔고 끝도 없이 펼쳐져 있던 할머니의 밭들과 땅들이 팔려나 가는 것을 보았고 내가 아홉 살이 되던 겨울에 방 두 칸짜리 사글세 집에서 엄마 없는 한 가족으로 다시 뭉쳐졌다.


아홉 살, 나는 엄마에 대한 나쁜 마음(아마 지금생각해 보면 증오가 아니었을까. 미움보다 더 미운감정)이 생겼고 동생들과도 어쩌면 헤어질지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을 내면 깊숙한 곳에 숨기고 그날들을 살았다.



비밀 넷.

하루하루 근심과 한숨으로 희망 없는 날들을 견디고 계시는 할머니와 아버지를 보면서 나는 단 하루만이라도 근심걱정 없이 웃을 수 있는 날이 없을까 생각했다. 

누가 시키지 않았지만 나는 착한 아이가 되어야 했다.

공부도 열심히 해야 했고 동생들도 챙겨야 했다. 당연히 집안 청소도 해야 했고 비가 내리면 빨랫줄에 걸려있는 빨래도 걷어서 개야 했고 겨울에는 연탄도 갈아야 했다. 

누가 시켜서 한 것은 없었다. 나 스스로 그렇게 해야 된다고 생각했었다.

아니면 내면의 내가 시켰을지도 모르겠다. 언제 또 갑작스러운 불행이 닥쳐서 우리 가족을 뿔뿔이 흩어지게 할 수도 있을 것 같은 막연한 불안이 나를 긴장시켰다.


아홉 살의 나는 '나'를 빼고 '나'로 살아야 했다.

투정도 부릴 수 없고 특히 엄마가 동행하는 학교 행사는 가급적 참석을 안 하고 싶었다. 그때마다 아프다는 핑계를 댈 수밖에 없었다.

매일 출근하시는 아버지와 해도 뜨기 전에 돈 벌러 나가시는 할머니께 학교의 일은 더더욱 말씀드릴 수 없었다. 가끔 아프다는 핑계로 학교를 빠지는 일이 진짜 아파서 그러는 줄 아시는 편이 훨씬 맘이 편했다.

그렇게 집에 우두커니 있는 날에는 많이 울었던 기억이 난다.

엄마가 보고 싶고 뭔가 하고 싶은 말들이 있는데 그 말들은 내뱉지 못하고 속으로 되뇔 때, 

가슴이 두근거리면서 뭔가 울컥하고 쏟아져 나오는 느낌을 자주 받곤 했다.

초등학교 2학년, 그냥 목소리 예쁜 우리 엄마가 보고 싶었다.


나는 독후감 사생 대회나 어린이백일장 같은 행사에 참가하면 늘 입상을 하곤 했다.

특히, 책 읽는 것을 좋아했고 노래도 잘 부르고 혼자 상상하거나 그림 그리는 것도 좋아했다.

점점 고학년으로 올라가면서는 공부도 잘했고 늘 선생님께 칭찬을 받으며 학교생활을 잘해나갔다.

덩달아 아버지와 할머니도 늘 기뻐하셨고 두 분이 웃는 날도 많아지셨다. 비록 형편은 어렵고 엄마의 빈자리도 컸지만 그 안에서도 우리는 행복을 느끼며 살고 있었다. 아버지는 어린 두 아들을 위해 자투리 나무를 구해총이며 칼 같은 남자아이들이 갖고 놀만한 장난감들을 만들어 주셨고 할머니는 내가 어려서부터 가지고 놀던 인형의 옷이며 이불 같은 것들을 손바느질로 조그맣게 만들어 주셨다. 

할머니는 평소에도 우리가 집에서 입는 옷들을 재봉틀을 돌려 만들어 입히셨다.

여름에는 아버지가 출근하시기 전에 커다란 빨간 고무 대야에 물을 한가득 받아놓고 출근하시면 우리는 점심때가 지나서 따뜻하게 데워진 물에서 팬티만 입은 채 물놀이를 하곤 했다. 물놀이하고 나와서 동생들과 나눠먹던 수박 한 조각이 그렇게 달고 맛있을 수 없었다.

아버지와 할머니의 이런 사랑이 없었다면 나는 아마 어떤 꿈도 희망도 없이 살지 않았까.



비밀 다섯.

어느 날 친적집에서 연락이 왔다.

나를 며칠 보내라는 연락이었다. 그 집에 큰 딸은 나보다 한 살 위였지만 우린 친 자매처럼 잘 놀았다.

그날도 언니가 나와 놀겠다고 부른 것이었다. 그 집은 우리 집보다 형편도 괜찮았고 나를 무척 이뻐하셨다.

그날도 여느 때처럼 맛있는 것들로 저녁을 차려주셨고 우리는 동네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그 동네 아이들을 금세 모아서 재미있게 놀았다.

친척 아주머니가 찾으러 나오지 않으셨으면 우린 해가 져서도 집에 들어갈 생각을 안 했을 것이다.

내일 또 만나서 놀자며 아쉬움을 뒤로하고 집으로 들어가는 길에 아이스크림을 손에 들고 신나게 노래를 불렀던 기억이 난다.

집으로 돌아와 목욕을 하고 나니 금세 나른해져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얼마가 지났을까 TV소리와 함께 친척 아주머니의 애원하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이상한 분위기에 자리에서 일어나지는 못하고 눈만 살짝 떠서 TV에서 나오는 불빛을 바라보았다.

뭔가 이상한 실루엣…

순간 나는 너무 놀라 눈을 질끈 감고 이불을 머리 위로 끌어올렸다. 그래도 들리는 말소리는 내 심장을 몹시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아주머니와 아저씨는 서로 알몸인 채로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이어나갔다. 아주머니는 잘못했다고 빌기만 했고 아저씨는 술에 취해 발음도 정확하지 않은 말을 윽박지르듯이 내뱉고 있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폭행..

숨죽여 울기만 하는 아주머니… 무언가로 입을 틀어막은 듯 그 사이로 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마 처음 있는 일은 아닌 듯 보였다. 그리고 두 분이서 하는 이상한 행위들.. 

나는 또다시 가슴이 심하게 두근거리며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소리를 낼 수 없어 이불로 입을 틀어막고 울었다.


날이 밝자마자 나는 아침도 거른 채 집으로 돌아가려고 준비했다. 

어제의 일은 마치 일어나지도 않은 일처럼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시는 두 분이 이상했다. 두 분의 표정은 너무나 평온했고 어제 내가 이 집에 도착했을 때 봤던 분위기와 다를 게 없었다.

점점 더 혼란스러워지는 내 머릿속에는 빨리 여기를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서둘러 인사를 하고 나는 아주머니와 버스정류장으로 나왔다. 

무슨 생각에선지 나는 걷다가 문득 아주머니를 쳐다봤고 애써 외면하던 아주머니가 나를 보며 자신의 손가락으로 잔뜩 오므린 입을 가리켰다. 비밀신호였다.

알고 있었다. 아주머니는 내가 깨어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둘은 설명할 이유도 없이, 설명을 듣고 싶은 이유도 없이 그렇게 아무 말 없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나는 우리를 떠나간 엄마를 떠올렸다. 

무슨 이유였을까…. 내가 모르는, 아니 내가 몰라야 되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이렇게 나는 또 하나의 비밀을 간직하고 그 사람들과 어색한 사이가 되었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 결국 두 분은 이혼하셨고 내 기억에서도 희미해졌다.



나의 아군들.

겨울 방학과 함께 마음에 평화가 찾아왔다.

꾀나 큰 과수원을 갖고 계시는 시골 친척 집에서 방학 동안 다녀가라는 연락이 온 것이다. 

그곳은 생각만 해도 가슴을 설레게 하는 놀거리들과 항상 넉넉하고 풍요로운 무엇이 있었다.

나와 또래는 아니었지만 중학교, 고등학교에 다니는 언니, 오빠들이 있었고 시골 특유의 정감이 정서적 안정을 내어주기도 했다.

외양간에는 여러 마리의 소도 있었고 집 뒤편 에는 돼지축사도 있었다. 마당에는 커다란 개도 몇 마리 있었고 뒷마당을 여기저기 자유롭게 다니며 하루종일 먹이를 찾아다니는 닭들도 있었다. 덕분에 그곳에 가면 계란도 넉넉히 먹을 수 있었다. 과수원이 있어 귤도 넉넉하고 추워지기 전에 짜놓은 꿀도 많았다. 그것들은 우리가 먹고 싶다고만 하면 얼마든지 먹을 수 있었다. 따뜻한 아랫목에 앉아 구운 가래떡을 꿀에 찍어 먹으면 세상 어떤 것이 이것보다 달콤한 게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우리 삼 남매가 덜컹거리는 버스에서도 신나게 노래를 부르며 차멀미도 없이 갈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이번에는 어떤 재미있는 일들이 있을까를 상상하다 보면 어느새 정류장에 우리를 마중 나와 있는 동네 꼬맹이들과 우리 친척언니, 오빠들이 눈에 보인다.

그들도 자주보지 못하는 도시에서 오는 아이들을 기다리며 우리가 풀어놓을 도시풍경과 작지만 몇 가지 챙겨간 선물들을 기대하고 있었을 것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존재들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나는 그곳에 가면 제일 먼저 달려가는 곳이 있다. 큰 오빠들이 지어놓은 아지트가 있다. 그 당시 유명했던 애니메이션 톰소여의 모험에 나오는 허클베리 핀의 오두막집이다.

뒷산으로 가면 커다란 나무 위에 통나무를 엮어서 만든 오두막집이 있다. 그 집은 오빠들이 본인들의 아지트로 몇 개월에 걸쳐서 만들었다. 가끔 동네 오빠, 언니들이 모여 카세트플레이어에서 흘러나오는 그 당시 유행했던 가요를 틀어놓고 춤을 추거나 기타를 치거나 하면서 노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그곳에서 나는 난생처음 비틀스, 스콜피언스, 퀸등이 부르는 팝송이라는 것을 들었다. 뱃속 저 안에서 뭔가 간질간질하고 몽글몽글한 이상한 느낌이 피어났다. 

어떤 걱정거리도 없어 보였고 어떤 비밀도 없이 그냥 노는 것에 집중되어 있는 그들의 표정에서 나도 같이 어울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나는 그곳에서 호기심이 가는 책들을 많이 읽었고 오며 가며 듣던 대중가요도 기타 반주에 맞춰서 많이 배웠다. 어떤 언니가 나에게 이런 말을 했던 기억이 난다.

“너는 어린애가 춤도 잘 추고 노래도 잘 부르고 책도 많이 읽고, 커서 뭐가 돼도 되겠다.”

이런 말을 들으면 도시에서의 나는 완전히 잊어버리고 거기서 잘할 수 있는 최대한의 나의 재능과 끼를 맘껏 부리게 되었다. 누군가 나를 응원해 주고 나의 가치를 인정해 준다는 생각에 조금 우쭐해지는 기분도 느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그곳이 좋았던 게 아닐까….

그곳에서 긴 방학을 보내고 돌아올 때면 아쉬움보다는 다음 방학에 올 때는 내가 꼭 뭔가를 보여줄 것을 더 찾아와야겠다는 희망을 품고 돌아오게 된다.


그때의 언니와 오빠들은 지금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었지만 아직도 나를 만나면 응원하고 지지해 주신다.

“너는 나이가 들어도 꼬맹이 때랑 변한 게 없니? 어쩜 이렇게 그대로 나이 먹을 수가 있냐?”

그분들의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진심이 느껴진다. 표정에서 느껴지고 말의 감정에서도 느껴진다.

어쩌면 그분들은 내가 처음 봤을 때의 그 느낌대로 어떤 저항 없이 세상을 자신들의 것으로 받아들이며 살았을 것 같은 느낌이다. 사십 년이 지난 풍경을 그대로 간직하고 산다는 것이 억지로 되는 일이 아님을 나는 안다. 그 시절에 느꼈던 마음의 울림을 마음속 깊은 곳에 그대로 심어두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감정이 아닐까.  


나의 어린 시절의 추억 중에 무척이나 행복하고 아름다웠던 소중한 단편을 갖게 해 주신 고마운 분들이다. 

이런 가슴 뭉클한 추억에는 비밀이 없다. 그래서 더 코끝이 시큰함을 느낀다. 감사할 따름이다. 

이렇게 따뜻한 마음을 그대로 전달해 줄 수 있는 어른으로 살아준 것에 감사하고 변함없이 나를 지지해 주시는 마음에 감사를 드린다.



비밀 여섯.

초등학교 3학년쯤으로 기억한다.

엄마 없이 지내던 생활이 익숙해질 무렵 우리 집에 새어머니가 오셨다. 

우아해 보이는 외모며 고급스러운 미소, 낮은 톤의 빠르지 않은 말투가 뭐라고 할까 지금 형편의 우리 집과는 사뭇 다른 분 위를 풍기는 그런 분이셨다. 어린 내 눈에도 그렇게 보였다. 한편으로 우리 친엄마였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분위기가 매력적이었다. 

게다가 취미였는지 직업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병풍에 수를 놓는 분이셨다. 우리 집에 들어온 그분이 물건들이 심상치 않아 보였다. 수틀, 바늘쌈지, 공단으로 된 원단들, 그 외에도 수예에 필요한 여러 가지 재료들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혼란하고 복잡한 마음속에 그분의 그 분위기는 뭐랄까 우리와 닿지 않는 곳에서 온 먼 세상사람의 그것이었다.

아버지는 우리에게 동의를 구한다거나 협조를 구한다는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우리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무언의 찬성과 환영을 그분께 적나라하게 보냈다.

주저함 없이 엄마라고 불렀고 어쩌면 동생들은 그분이 친엄마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친엄마와 너무 어려서 해졌고 그 아이들에게 엄마의 이미지는 전혀 없었을 테니까 그저 어디 먼 곳에 다녀온 정도쯤으로 생각하고 있으리라. 

학교에서 돌아온 나는 어김없이 새어머니의 방을 노크하고 문을 열어봤다. (새어머니가 오신 다음날부터 나는 그 방의 문을 부지런히 열어서 확인하는 습관이 생겼다.)

크고 네모난 수틀에 파란색 공단을 끼워놓고 수를 놓고 계시던 새어머니가 나를 향해 들어오라고 손짓하셨다. 허락을 받고 들어가면서도 내 발걸음은 조심스러웠다. 

내 눈에 들어온 것은 눈부시게 우아한 학의 날갯짓이었다. 여러 마리 학들이 무리 지어 날아가는 모습이 고스란히 수놓아져 있었다. 그리고 내가 노크하는 바람에 잠시 멈춰진 바늘은 크고 웅장한 소나무 어딘가에 꽂혀있었다. 넋 놓고 그 풍경을 바라보는 사이 새어머니는 종이가방 하나를 나에게 건네며 꺼내보라고 하셨다. 

그 안에는 작은 수틀과 여러 가지의 원단과 자수실등 여러 가지 들이 들어있었다. 내가 학교 다녀오면 자기 옆에서 같이 수놓으면 좋을 것 같아서 준비했다고 하셨다.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누군가가 나를 위해서 준비했다며 선물처럼 주는 것을 나는 처음 받아보았고 그때의 기분을 언어로 표현할 수 없지만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그렇게 새어머니는 우리에게 기분 좋은 일들이 많이 만들어 주셨고 늘 집안일도, 음식도 짜증 내는 일 없이 즐겁게 하셨다. 하지만 할머니께서는 우리와 다르게 무뚝뚝하게 대하셨고 왠지 모르게 정을 주지 않으려 노력하시는 모습이었다. 그것은 단순히 고부간의 갈등이 아닌 어딘가 말 못 할 사연이 있는 듯한 무게감으로 나에게 느껴졌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마루를 사이에 두고 건너 아버지 방에서 조용조용한 다툼의 소리가 들렸고 아버지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격양되어 있었다. 내용은 전혀 모르지만 제발 나는 두 분이 헤어지는 일이 아니길 마음으로 빌고 또 빌었다. 그날밤은 할머니께서도 밤새 뒤척이셨다.


그리고 며칠 뒤, 학교에서 돌아온 나에게 새어머니는 당신과 함께 시내에 잠시 다녀오 자고 하셨다. 

새어머니와 함께 시내 나가는 것을 무척 즐거워했다. 새어머니는 당신이 자수에 필요한 재료를 사는 곳을 먼저 들러 실을 사고 몇 가지 도안을 사고 나에게 필요한 것들도 종종 사주셨다. 그전에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가게라서 신기하기도 했고 그곳에 가면 내 안에서 간질간질한 아지랑이 같은 것들이 피어나는 느낌이 나를 기분 좋게 했다. 그곳에서는 영원히 살아도 좋을 것 같은 나른한 안정감이 느껴졌었다.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이런 가게가 있었다는 것이 나로 하여금 어떤 호기심을 자극하기도 했다.


당연히 나는 새어머니를 따라나섰고 우리가 도착한 곳이 그곳이 아님을 앞에 걸려있는 간판을 보고 알았다. 산부인과.

얼떨결에 따라 들어간 그곳에서 새어머니는 나를 몇 시간 동안 기다리게 했고 드디어 초췌해진 모습을 드러낸 그분은 조금 전 내가 집에서 보았던 새어머니의 모습이 아니었다. 

나는 순간 어떤 공포를 느꼈고 내 예감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계산을 하고 나온 새어머니는 병원을 나오는 계단에서 내 등을 몇 차례 후려치시며(내가 휘청거릴 정도) 당신의 아이를 이렇게 보내야 하는 이유가 오롯이 너희들 삼 남매 때문이라며 병원문을 열고 나가버리셨다.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그분을 쫓아 나갔으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택시는 내 눈앞에서 빠르게 사라져 갔고 나는 그 택시를 붙잡을 수 없었다. 


붉게 물들어 가는 서쪽 하늘을 바라보며 걸어야 우리 집으로 갈 수 있다.

친엄마를 찾겠다고 나섰던 그 길과 같은 길이었다. 또다시 내 기억은 그 춥고 어두웠던 길로 되돌아갔다.

낯선 사람들의 횡포에 지쳐갈 때쯤 나는 어떻게든 엄마만 찾으면 이 모든 일이 해결될 거라는 생각에 한 겨울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외가댁을 걸어서 찾아갔다. 그때는 내가 여덟 살이었다. 버스를 타고 다니며 외워두었던 간판들과 길을 머릿속으로 그리며 오직 엄마만 찾으면 될 거라는 생각에 찾아갔던 외가댁이었다.

하지만 힘겹게 찾아간 나에게 돌아온 것은 외할머니의 냉대와 차가운 눈초리뿐이었다. 엄마의 차가웠던 눈빛과 너무나 많이 닮아있어서 아무 말도 못 하고 돌아 나왔다.

분명 외할아버지 목소리가 안에서 들렸지만 외할아버지도 외할머니를 이기지 못하셨던 것 같았다.

그렇게 나는 어두운 길을 다시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추운 겨울바람이 눈물이 흐르는 양 볼을 스치며 칼에 베이는 듯한 통증을 실어주었다.


그 길을 지금 새어머니를 붙잡을 새도 없이 떠나보내고 혼자 걷고 있었다. 

이번엔 두 뺨이 아니라 가슴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왜 나는 항상 가슴 아픈 순간을 제일 먼저 마주해야 할까?

가슴 아픈 순간이 나를 슬프게 하는 것보다 그 슬픔이 고스란히 기억으로 남는 것이 나를 더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기억하고 싶지 않지만 문득문득 떠오르는 가슴 아렸던 순간들.

  

집으로 돌아가면 할머니는 오늘 있었던 일들을 내게 물어올 것이고 나는 또 입을 다물지 않았을까…

사실을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사실을 말한다는 것은 어쩌면 그 아이에게 다시는 느끼고 싶지 않은 통증과 마주하는 일이 아니었을까….

어른들은 왜 이렇게 잔인하기만 한 걸까.



비밀 일곱.

며칠 뒤 그날도 어김없이 학교에서 돌아온 후 새어머니 방을 확인했다. 늘 하던 대로..

'하~~~' 힘없이 쳐지는 날숨 속에 어떤 분노가 차올랐다. 

완벽하게 치워진 새어머니의 흔적들…..

나도 모르게 바닥으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혹시라도…

그랬다. 혹시라도 저기 새어머니 물건들이 있으면 다시 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가 있었다.

열 살의 아이는 새어머니의 흔적들이 깨끗이 치워진 방에서 소리 죽여 울었다. 그리고 분노했다.

상실, 배신, 절망 이러한 단어들을 떠올리진 못했겠지만 그때 그 아이의 마음은 이 어디쯤이라 짐작해 본다. 비단 이것은 새어머니만을 겨냥한 감정은 아니었을 것이다.


내가 온 마음을 다해 지키고 싶었던 가족이라는 울타리는 또다시 무너졌다.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아무런 설명도 해명도 없이 이렇게 쉽게 무너질 수 있는 것이었나.

왜 나는 행복이라는 것을 가지면 안 되는 아이일까. 왜 나는 하루도 마음 편히 친구들과 놀이터에서 뛰놀고 

동생들과 장난치면서  그렇게 보내면 안 되는 아이일까.


할머니께 굳이 묻지 않았다. 왜 새어머니 물건들이 없느냐고.

너희들 때문이라는 새어머니의 마지막 말이 끝내 내 가슴에 얹혔다.

이별을 참고 견디며 견고해져야 하는 내 마음은 누구를 위한 것이고 어디를 향해야 하는 것인지 그 무렵 나는 내 마음과 갈등을 빚고 있었다.




비밀 여덟.

가슴에 하나씩 비밀이 새겨질 때마다 나는 이유 없는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사방의 벽들이 점점 좁혀오고 새까만 무중력의 힘이 나를 빨아들이는 현기증 같은 증상을 겪고 나면 머리를 망치로 두들기는 통증을 남겼다. 바닥에 누울 수도 앉아있을 수도 없이 고통스러웠다.  

진득한 땀을 흘리며 악몽을 꾸는 날이 많아졌고 점점 친구들과도 관계를 멀리하면서 나는 스스로 외톨이가 되어갔다. 말 수가 줄어들고 가끔씩 허공을 바라보는 멍한 상태를 자주 보였다. 

극심한 통증이 찾아오면 학교를 쉴 수밖에 없었다. 그런 날들이 반복적으로 꽤 자주 일어났다. 

이런 날은 오롯이 혼자 집에 남아서 하루종일 울다 지쳐 잠드는 게 전부였다.


어느 날부터인가 나는 그 통증들이 공포스럽게 느껴졌었다. 

사방의 벽들이 점점 나에게로 좁혀오는 그 압박은 죽을 만큼 공포스러웠다. 그런 공포를 느끼다 기절하는 경험도 수차례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할머니께서 청심환을 먹여서 깨우기도 여러 번 했고 어떤 날은 병원에서 눈을 뜨기도 했다.

2년 전 내가 공황장애 진단을 받았을 때와 증상이 비슷했다. 1980년대 그 당시 병원에서는 그저 원인불명의 스트레스 장애로 진단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 날이 반복되면서 나는 내 안에 분노가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소리를 질러서 내 안에 있는 커다란 덩어리를 꺼내고 싶어졌다. 그런 기분이 반복되던 어느 날부턴가 나는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아파서 학교에 못 가는 날이면 어김없이 소리를 질렀다. 

울음을 그치고 소리 지르기를 시작하면 머리가 띵해지면서 기절하기를 반복했다. 그러면서 어딘가 모르게 속이 후련해지는 기분을 느끼곤 했다. 다만 목이 따끔거리면서 아프고 한바탕 응원가를 쏟아냈을 때처럼 목이 쉬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증상들은 하루, 이틀이 지나면 금방 회복됐기 때문에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다가 문제가 생겼다.

그날도 있는 힘껏 소리 지르면서 내가 내 머리를 감싸고 방 안 이리저리 뒹굴고 있는데 갑자기 귀에서 엄청난 압력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마 비행기를 탔을 때 고막 끝까지 밀려 들어오는 그런 압력이었던 것 같다. 금방이라도 고막을 뚫어 버릴 듯한 엄청난 통증과 함께 밀려오는 압력이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눈도 뜨지 못할 만큼의 통증에 나는 다시 기절한 것 같다. 얼마가 지났을까 머리의 통증도 사라지고 세상이 고요하다 못해 나 혼자 바다 깊은 곳에 숨어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눈을 떴다. 마치 진공상태에 있는 그런 기분이었다.

너무나 평온한 그 느낌은 지금까지 내가 느껴보지 못했던 안락함을 주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평온은 나의 왼쪽 귀의 청력을 잃고 나서 얻은 보상 같은 것이었다.

열 살의 아이가 스스로 자해를 통해 고통에서 빠져나오려고 발버둥 친 흔적으로 나는 왼쪽귀의 청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그리고 소리 지르는 것을 멈췄다.

왼쪽귀가 이상해졌다고 나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아니 그런 과정을 겪게 된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한동안 진공상태에 갇혀있는 왼쪽귀의 치료시기를 이때 놓친 것 같기도 했다.

왼쪽 귀가 잘못됐다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잘 된 일이라고 나를 위로했다. 무언가를 말하기도 듣기에도 나는 너무 쇄약 해져 있었다.


그리고, 그때쯤 어른들에 대한 불신과 증오가 내 마음을 굳게 걸어 잠그게 하고 있었다.



비밀 아홉.

이런 고통의 시간을 보내는 사이 나도 모르게 도벽이 생겼다.

학교를 자주 빠지다 보니 친구들은 서서히 나를 잊어갔고 등교를 해도 학교생활에 전혀 흥미가 없었다. 

그런던 중에 우연히 보게 된 친구의 예쁜 학용품이 내 눈길을 끌었다. 학용품이 부족해서는 전혀 아니었다. 

단지 그 예쁜 학용품 때문에 그 친구 주변으로 다른 친구들이 모여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순간 나는 그것이 갖고 싶었고 친구가 안보는 사이 그것을 훔쳤다. 그 당시에는 죄책감이랄까 그런 마음은 들지 않았던 것 같다. 그냥 아무 망설임 없이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드는 것에 집중을 했던 것이다.

연필 한 자루, 지우개, 수첩, 그러다가 필통을 통째로 훔치는 날에 그것이 들통 나 버렸다. 소문은 순식간에 퍼졌고 아버지가 학교에 다녀가시고 그날 아버지는 내 종아리를 많이 때리셨다. 

하지만 나를 때리는 아버지가 너무 미웠을 뿐 그때도 죄책감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이미 매 맞는 것에는 익숙한 터라 그것이 나에게 주는 어떤 공포스러운 감정은 없었다. 그저 이 시간이 빨리 끝나서 아버지와 내가 대면해 있는 상태를 피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건성으로 잘못했다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는 선에서 그 상황은 끝이 났다.

하지만 그 뒤로도 나는 여러 차례 아버지께 종아리를 맞았고 그때마다 아버지는 이유를 묻는 대신 나의 행동이 얼마나 나쁜 행동이며 상대 아이가 받았을 충격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이어가셨다.

그 아버지 말씀 중에 상대아이가 받았을 충격에 대해서 나는 잠시 생각이라는 것을 하게 되었다. 

그 아이가 받았을 충격이 내가 알고 있는 배신감이라면.....

그 말이 사실 친구의 학용품을 훔치는 것을 그만두는 계기가 되었다. 그 친구에게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사과의 말을 나는 편지로 써서 전해주었다. 다행히 그 친구는 내 진심을 받아주었고 그 친구와는 지금까지도 가장 친한 친구로 남게 되었다. 다행히 나의 도벽은 잠시의 해프닝으로 끝이 났다.


그런 일이 있은 후부터 나는 아버지와 함께 있는 시간이 불편해지면서 가능하면 아버지 눈에 띄지 않으고 

피해 다녔다. 아버지가 퇴근하시기 전에 일찍 잠을 자버리던가 주말에는 친구와 약속을 핑계로 집에 있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버지가 묻는 말에도 대충 건성으로 대답하는 일이 잦아졌고 할머니가 정성스레 싸주시는 도시락도 반찬이 형편없다며 불평불만은 끝없이 늘어놓았다.


이렇게 몇 개월이 지나던 어느 날 나는 또 한 번 충격을 경험하게 되었다.

어느 날 그 친구가 다른 친구와 군것질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장난칠 생각으로 살금살금 다가가고 있었다.

뒤에서 가만히 들어보니 내 얘기 같아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들어봤다.

대강 내용은 우리 친엄마가 다른 남자랑 바람을 피워 집이랑 다 팔고 도망가버려서 지금은 계모랑 같이 살고 있다는.. 그런 내용을 자기 엄마한테 들었다는 것이다. 워낙 동네가 좁으니 그 친구 엄마는 자세히 알 수도 있을 만한 사건이었다.

하지만 나는 처음 듣는 말들이었고 그게 진실이라면....

'그래서 우리 엄마는 지금 어디 있는데?'

그 친구에게 되려 내가 묻고 싶었다. 


또다시 가슴속에 뜨거운 것이 새겨졌고 며칠 동안 소리 없이 통증을 견뎌야 했다. 

이번엔 오른쪽 귀마저 안 들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간절히 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때 그 친구의 말은 사실이 아니었다. 그 친구의 엄마가 사과까지 하는 소동이 벌어졌고 할머니께서 통쾌하게 이 소문을 진압하셨다.



어른들의 비밀.


열두 살이 되기 한 달 전. 

친엄마는 무작정 이모들을 앞세워 다시 우리와 함께 살겠다고 의사를 전달하신 것 같았다. 

우리들은 모르는 어른들만의 사연이 있는 듯 엄마는 이모들과 함께 할머니와 싸우기만 하셨고 아버지도 때로 언성을 높이면서 이 집에서 나가라고 하셨다. 


그즈음 우리는 셋방 살이를 벗어나 큰 단독 주택으로 이사를 앞두고 있던 때였다. 

그동안 할머니와 아버지께서 열심히 돈을 모으고 약간의 대출로 주택을 마련할 수 있었다. 

방이 다섯 개나 되고 마당도 꽤 넓은 양 옥 집이었다. 마당의 절반을 차지하는 텃밭을 할머니께서 마음에 들어 하셨다. 거기에 조그맣게 비닐하우스를 만들어 그곳은 아버지의 취미를 책임질 공간을 만들기로 했다. 

아버지는 난초들을 키우고 가꾸는 것을 좋아하셨고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식물들을 키우면서 거기서 꽃이 피어나는 것을 보시는 것이 아버지의 취미셨다.


우리 가족은 새로 이사 가는 집에서 또 다른 희망을 꿈꾸고 있었다. 

친엄마가 집으로 돌아오는 것에 대해 사전에 합의가 있었던 없었던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어린 나에게 감당할 수 없는 비밀을 만들어 주고 무책임하게 떠났던 엄마였다. 

그런데 지금 와서는 아직 아이들이 어린데 계속 떼어놓고 살 수 없다는 식의 말만 할머니께 되풀이하고 있었다. 이모들도 같이 거들었다. 

지금부터 아이들은 엄마가 필요한 시기이고 아무리 할머니와 아버지가 잘해주신다고 해도 엄마 손길만큼은 못 할 것이라는 게 이모들의 주장이다. 

'그럼 나는?' '그때는 나도 여덟 살이었는데..'

진심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이모들의 억지 주장이 우리 가족 누구에게도 신뢰를 주지 못했다.


물론 동생들은 지금부터 엄마가 당연히 필요한 시기인 것은 맞는 말이다. 아버지와 할머니도 모를 리 없다.

하지만 두 분은 그 정도까지 각오하지 않으셨을까?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엄마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두 분이 물러나지 않으실 거라고 나는 믿었다. 

친가 친척들도 사실 반기는 눈치였다. 당연히 그분들은 할머니와 아버지가 우리 삼 남매 키우는 것이 못내 안타까웠을 것이고 누가 뭐라 해도 친엄마보다 잘해주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셨을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 가족의 일이고 특히 아버지의 허락이 떨어져야 가능한 일이었기에 아버지는 양보하지 않으셨다.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 의견들로 아버지보다 더 연세 많으신 어른들의 중재가 있었다.

결국 엄마는 우리와 함께 다시 잘 살아보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미 이혼이 돼있는 상태였고 다시 혼인신고를 해야 하는 상황이 생겼다.


이번에도 나의 존재는 빛을 내지 못했다. 그렇게 울며불며 할머니께 사정했는데 어떻게 이렇게 결정이 나 버렸을까. 누구를 위해서 엄마의 자리가 필요했을까. 그냥 이제 초등학교에 입학해야 하는 동생들을 위해 필요한 자리였을까? 

나는 또다시 불안이 밀려들었다.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몰랐다.

'혹시 엄마가 사과라도 하면 받아들여야 하나? 그 사과로 지난 나의 설움이 눈 녹듯 사라질까?'




비밀 열.

혹시가 역시가 되었다.

내가 엄마에게 사과받는 것은 둘째치고 내가 왜 사과해야 되냐며 오히려 당당하게 나오셨다.

나는 엄마에게 울며 말했다.

"엄마 내가 불쌍하지 않아요?"

"네가 왜 불쌍한데? 그동안 할머니랑 아버지가 알아서 잘해주셨을 건데 네가 어디가 불쌍해?"

"하~~~"

그 뒤로 나는 엄마와 그 어떤 소통도 하지 않았다.

몸으로 느껴지는 통증도 감당하기 힘들었고 엄마가 돌아오고 난 뒤에 다시 생긴 불안은 매일매일 내 몸을 휘감고 놓아주지 않았다. 눈도 마주치지 않고 냉정한 태도로 일관하는 큰 딸을 엄마는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을까..

하지만 엄마가 보란 듯이 대놓고 하는 말들이 나를 더욱 분노하게 만들었다. 

"너희 할머니 때문에! 너희 아버지 때문에! 너 때문에! " 그리고 끝에 한마디 더 붙이셨다.

"저걸 왜 낳아 가지고..."

그렇게 분노를 터트릴 때는 다시 나가라고 소리 지르고 싶은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해할 수 없었다. 할머니와 아버지 앞에서는 터트리지 못하는 분노를 왜 나한테 터트리는 건지..

엄마는 아마 내가 죽기를 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나에게 다시 매질을 시작한 엄마는 아무 이유도 설명도 없이 그냥 매질만 하셨다.


다시 나는 온몸으로 통증을 느끼며 속으로 눈물을 흘리는 날을 견뎌내고 있었다. 

이렇게 골병이 들어가고 있는 나를 그 누구도 알아보지 못했다.

그 무렵 오직 나는 친구도 없이 (엄마는 친구 만나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책 읽는 것으로 내 마음을 달래고 있었다.

그 시절 만난 [데미안]은 유일한 내 친구였다. 

그때 그가 만들어낸 싱클레어를 나도 만들었으면 그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게 조금은 쉬웠을까?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나의 방황은 더욱 심해져 갔다. 그 덕분에 나의 사춘기는 낭만적이지 않았

처음으로 나의 왼쪽 귀가 안 들리는 것에 감사할 만큼 엄마의 폭언은 날로 심해져 갔고 그럴수록 나는 병원을 전전하는 신세가 되었다. 

심장이 발작처럼 두근거리고 심지어 고관절이 접히지 않는 이상증세까지 보였다. 

나는 살아있는 시체나 다름없이 병원에서 주사 맞고 어떤 병명으로 처방받는지도 모르는 약을 한 보따리씩 타다 방구석에 쌓아놨다.

공부도 하기 싫었고 친구들과 교류도 당연히 없었다. 자연스럽게 나는 왕따가 되었고 온갖 구설에 시달리며 학교를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아무 말없이 표정 없이 그저 새벽에 눈 떠서 아픈 몸을 이끌고 만원 버스에 시달리며 학교에 갔다가 끝나면 바로 집으로 내달리는 그런 시간들을 나는 버텨내고 있을 뿐이었다.

소풍도 체육대회도 심지어 수학여행도 가지 않는 아이. 당연히 친구들은 내가 귀신처럼 보였을 것이다. 

친구들 사이에서 그런 소문이 심심찮게 돌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딱히 저항하고 싶지 않았다. 

우리 엄마가 무당이라는 둥 우리 집에 신당이 있어서 내가 귀신을 몰고 다닌다는 둥…

그 어떤 소문에도 나는 아니라고 반박하지 않았다. 그러기에 나는 너무 무기력했고 이미 나의 의견과 감정 따위에 나 조차도 외면하고 있을 때였다. 어차피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시체처럼 살았다고 하면 표현이 맞을 것 같다.

그야말로 나의 중학교 시절은 내 온 생애를 통 틀어 지워버리고 싶은 시간이다.

내 속에 이상한 자아가 끊임없이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 무렵 우리의 가정환경도 그 다지 좋지 않았다. 

매일 다투시는 부모님과 아버지가 안 계시는 시간에 더 심해지는 엄마의 언어폭력은 그칠 줄 을 몰랐다.

급기야 할머니께서 분가를 선언하셨고 다시 한번 우리 집에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다. 

딱히 누구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아도 아버지는 아시는 듯했다. 할머니께서 분가하시면 나도 따라나서겠다고 맞서면서 우리 집의 한랭기류는 물러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급기야 서울 사시는 고모가 (아버지의 유일한 여동생이다) 내려오셨다.

대형병원에서 근무하시는 고모가 어렵게 휴가를 내어 며칠 우리 집에 머무르시면서 할머니와 나를 다독이셨다. 고모는 늘 그러셨다. 집안에 무슨 일이 생기면 고모는 항상 양보하고 최선을 다해 상황을 이성적으로 마무리하시는 그런 분이셨다. 나는 그런 고모를 늘 존경해 왔다.

유일하게 내가 삐딱하지 않은 말 투로 대하는 사람도 고모와 고모부 두 분 밖에 안 계셨다.

그렇게 완강하신 할머니도 고모의 출연으로 금세 마음이 풀리시곤 하셨다. 

하지만 이번에는 할머니도 물러서지 않으셨다. 엄마가 대놓고 할머니께 분가하시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할머니가 그 섭섭함을 숨길 수가 없으셨던 것이었다. 

엄마가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을 나도 차마 듣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되려 엄마한테 다시 나가라고 소리 지르며 그동안 참아왔던 말들을 쉼 없이 쏟아냈다. 

소리 지르다가 나는 다시 쓰러졌고 눈을 떴을 때는 병원이었다.

그 뒤로 나는 원치 않는 별명이 하나 더 생겨났다. 성질 더러운 년!

아마 너는 네 성질에 못 이겨서 죽을 것이라며 엄마의 나를 향한 악담이 퍼부어지기 시작했다.


그날의 일은 기어코 할머니가 고모를 따라 서울로 가시는 것으로 마무리가 되었다. 

그나마 내 편으로 나를 지켜주시던 할머니 마저 안 계시는 집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나갈까 너무나 막막했다.

왜 엄마의 한마디 한마디는 빈자리가 없을 법도 한 내 가슴에 정확하게 와서 꽂히는지 너무도 선명하게 남아있는 자국으로 지워지지가 않았다. 

그동안에 온몸으로 받아왔던 충격들은 마치 블록 쌓기를 한 듯 견고하게 쌓여있어서 이젠 웬만한 충격으로는 무너지지도 않을 듯 보였다. 

나는 그 블록을 허물어 트릴 수 있는 비밀의 열쇠를 알고 있었는데 엄마는 그걸 모르고 계셨을 것이다.

그냥 나에게 한마디만 하면 되는 거였는데.

'그동안 너 고생시켜서 정말 미안하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엄마품에 따뜻하게 안겨본 기억이 없다. 물론 갓난아기였을 때는 엄마가 안아주셨겠지만 그건 내가 기억해내지 못하니 내 기억에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블록들은 내가 성인이 되어서도 허물어지지 않았다.


나는 이제 존재하지 않아도 되는 가치 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사춘기감정에 실어 문을 걸어 잠갔다.

두 번 다시 나에게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애쓰지 않기로 했다.

두 번 다시 사람들을 향해 환하게 웃어주기 않기로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을 쓰는 동안 이유 없이 많이 아팠다.

한 장 한 장 페이지가 넘어갈 때마다 그때의 기억들이 떠올라 미리 써놓았던 것들을 찢어버리기도 수차례 했다. 그 사이 다시 찾아온 우울증 때문에 중간에 자살시도도 했다. (그때 저를 발견해 주신 목사님과 사모님께 다시 감사드립니다).

이런저런 우여곡절을 겪으며 이 글을 완성하는 데 일 년이 걸렸다.


“내가 살아온 세월, 말로 하면 밤을 새워도 모자라고 책으로 써도 열 권은 족히 될 거다”라고 하셨던 선배님들의 말씀이 생각났다. 

어쩌면 내 사연은 길바닥에 아무렇게나 뒹구는 낙엽처럼 흔하디 흔한 이야기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도 굳이 이런 사연들을 구구절절이 써 내려간 이유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고 싶어서였다.

돌아보니 너무나 보잘것없는 인생이었고 속은 곪아 터진 상처 많은 인생이었다. 

비록 쉰 해를 살아낸 내 삶 중에 불과 몇 페이지에 불과한 상처들로 그간 살아온 내 삶 전체를 판단할 수는 없지만 내 인생에 중심이 되어야 했던 '내'가 불과 몇 페이지의 상처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두려움, 공포, 상실, 외로움, 사랑의 부재가 나의 내면을 끝내 어른으로 성장하지 못하게 발목을 잡고 있었다.


이 책 속의 내용들은 그동안 어느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는 나의 비밀이었다. 

그 안에 어른으로부터 상처받은 다섯 살 꼬맹이가 들어있다. 

언젠가 그 꼬맹이의 상처가 나의 연애사 불쑥 끼어들었을 때, 덜컥 내려앉은 이상한 감정이 있었다. 

마음은 사랑을 원하고 있었지만 내 피부의 감각들은 그 사랑을 외면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했다. 


조용히 비밀로 덮어 벼렸던 감정들이 온갖 이상한 무슨무슨 증후군들로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나는 그 증후군들조차 감추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는 스스로 나를 용서하지 못하고 있었다.

스스로 귀를 닫고, 

스스로 마음을 닫고, 

스스로 자책하면서 결국 스스로 가면을 쓰고 세상으로 나가기를 선택했다.


그 꼬맹이는,

누구 하나 자신의 존재를 알아봐 주지 않아도 원망하지 않았을 것이다. 

누구 하나 따뜻한 손을 내밀어 주지 않았어도 그 아이는 차가운 손을 감추고 살았을 것이다.

자기를 무시하는 사람들 앞에서도 그 아이는 해맑게 웃으며 살았을 것이다.

극심한 외로움과 캄캄한 어둠 속에서도 그 아이는 소리 지르지 못했을 것이다.

칼로 심장을 도려내는 듯한 통증이 몰려와도 그 아이는 그저 숨죽여 울며 참았을 것이다.

그 아이는 홀로 외롭게 사투를 벌이며 지난 시간들이 잊혀지기를 바라왔을 것이다.


아이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자신이 지켜내야 하는 가족을 향한 사랑이 무엇인지,

그 사랑을 지키기 위해 아이는 자신을 학대하며 고통을 참아왔던 것이다.

스스로 장애를 만들면서 고통을 대신했을 것이다.

자기를 버린 부모가 자신의 존재를 알아봐 주기를 바라며 많은 시간 인내하며 기다렸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아이는 모든 존재들을 사랑했을 것이다.



하얀 나비


'그냥 살아요'

'잘 살아요'  (영화, Me Before You 대사 중)


두어 달 치 받아놓고 먹지 않은 신경안정제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영화 말미에 주인공 윌이 사랑하는 여자

루이자에게 유언으로 보낸 편지에서 저런 대사가 나왔다.

괜스레 눈물이 흘렀다. 내 마음을 들킨 것 같은 죄책감도 들었다.


기세등등하게 활활 타오르던 장작이 조용히 사그라들면서 재가 되는 것처럼 이 세상에 다녀간 흔적도 없이 

땅속으로 꺼져버리고 싶은 위태롭고 나약한 순간이 있다.

한 달 아니 몇 달을 세상과 단절하고 죽은 듯이 살고 있는 그런 순간이 있다.

세상 사람들 앞에서 발가벗겨진 채로 서서 굴욕과 수치를 당하는 기분일 때가 있다.

더 이상 떨어질 곳 없는 세상의 제일 바닥까지 내몰려서 벌레만도 못한 취급을 당할 때가 있다.

모든 사람들이 떠나가고 내가 가진 것들이 더 이상은 내 것이 아닐 때, 그래서 죽고 싶었던 그때.

그때 나는 깨달았다. 

'저 모든 이유가 내가 살아야 하는 이유'라는 것을......

번데기에서 나비가 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시간을 기다려야 하듯이 가만히 웅크린 채로 고통의 시간을 견뎌내면 황홀하게 아름다운 나비의 날갯짓을 볼 수 있는 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는 것을....


자연이, 흘러가는 시간을 거스르지 않듯이 인간의 흘러가는 시간도 거스를 수 없다.

먼 우주에서 바라보면 인간의 삶은 찰나의 시간처럼 보이겠지만 우리는 그 찰나의 시간이 영원할 것처럼

최선을 다해서, 죽을힘을 다해서 살고 있다. 이유도 모르는 채 그저 열심히....


나는 이제 그 찰나의 순간을 사랑 가득한 삶으로 살아보려고 한다.

부와 명예가 없어도 그저 인간으로서의 '나'로 살아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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