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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통찰

피드백

공격을 받았다면 얼마나 사유하고 반응하는가

by 한상훈

최근에 가장 크게 배운 것을 꼽자면 일정 지능 이하의 사람들에게는 부정적 피드백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배운 점이다. 부정적 피드백이라고 한다면 행동에 대한 문제점 지적, 말에 대한 문제점 지적, 결과물에 대한 부정적 피드백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그러나 부정적 피드백을 감당하는 것은 일정 지능 이상의 사람들만 가능하다는 것을 드디어 배운 것 같다. 수준 미달의 사람들은 피드백을 절대로 이해하지 못하며, 피드백의 주체와 자신을 분리하는 능력이 현저히 떨어진다.


가령 신입 요리사가 요리를 잘못해서 맛없는 음식을 만들었다면 셰프는 요리사에게 부정적 피드백을 전달할 것이다. "맛이 형편없다." "조리 과정을 설명해 봐라." 등의 말을 할 것이다. 물론 인격적 공격이 더해진 부정적 피드백은 감정을 상하게 할 수 있지만 인격적 공격이 없는 요리 자체에 대한 부정적 피드백조차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형편없는 요리사는 아무리 경력이 쌓여도 형편없는 요리사로 남을 수밖에 없다. 그것은 그에게 좋은 스승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저 그가 부정적 피드백을 수용할만한 최소 수준의 지능도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사람을 보는 선명한 지표 중 하나는 스트레스 상황에서 대처하는 능력이다. 스트레스 상황에서 논리적으로 문제를 바라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부정적 피드백은 스트레스 상황 중에서도 매우 낮은 수준의 스트레스라 할 수 있다. 인체에 위협을 가하는 상황도 아니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겪는 부정적 피드백은 주로 인격적인 문제에 대한게 아닌 일처리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루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모순된 내용을 남발하는 것은 논리적 사고를 담당하는 신피질이 응답하는 게 아닌 무의식적 공격성이 발현되는 편도체에서 모든 메시지를 수신해 처리하고 있음을 뜻한다.


즉 아주 작은 수준의 부정적 피드백조차도 공포로 느낄 만큼 연약하거나 그 정도의 논리적 사고력이 없는 사람들은 부정적 피드백과 개인에 대한 직접적 공격의 차이를 인지하지 못한다. 그것이 그들의 안타까운 한계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겉으로 볼 때 사회적으로, 인격적으로, 지능적으로 큰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실제로 스트레스 상황에 놓이면 그때부터 작동되는 방식이 크게 달라진다. 단편적인 예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내심이 극단적으로 낮다. 그 예로 부정적 피드백을 수신하게 된 시점에서 상대방의 입장이나 상대방의 판단 근거에 대해 사유해 보는 시간보다 그것을 즉각적으로 반응하는데 총력을 기울인다. 즉 상대의 메시지에 대해 자신의 감정을 배제하고 10분 조차도 쓰지 못하는 것이다. 인내심이 극단적으로 낮은 것은 이성적 판단 영역으로 가지 못하고 모든 판단을 감정적 판단에만 쓰이도록 작동되는 개개인의 기저와 연결된다.


이러한 이들에게 부정적 피드백을 전달해 문제를 개선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것 같다. 마치 통제가 안 되는 맹견을 길들이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라 할 수 있다.


내가 사람을 평가하는 또 다른 지표는 자기부정의 정도이다. 어떠한 사람도 부정적 피드백을 누구에게나 들을 수 있다. 그러나 현명한 사람들은 자신이 완전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때때로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거나 용서를 구할 수 있다. 그것은 그들이 완벽한 사람이 아닌 이성적이고 현명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이다.


반면 자기주장을 철회하거나 사과를 하지 못한다는 것은, 해본 경험이 적다는 것은, 그 사람이 완전해서 실수도 없고 사과할 일도 안 만드는 훌륭한 사람이기 때문이 아닌 그저 멍청하고 고집 쌘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 인간은 자신의 행동을 교정하고 반성하는 데 큰 에너지가 들고, 그 과정이 꽤나 고통스럽기 때문에 많은 이들은 자신의 과오를 돌이켜보거나 기록하거나 사과의 말을 쓰는데 신경을 쓰기보다는 상대방에게 죄책감을 전가하거나 분노를 즉각적으로 표출하는데 급급하다.


나는 종종 나에게 사과하는 사람들이 죄송하다는 말을 1초도 안돼서 작성한다면 그것의 진의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사과라는 것은 애초에 상대방에게 아주 선명한 실수, 가령 뜨거운 물을 쏟았다던지 하는 정도가 아니라면 1초 만에 즉각적으로, 허례허식으로 나올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사과에는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는 의미가 있기에 쉽게, 사유 없이 나오는 사과는 사실상 사과가 아닌 면피에 가깝다 볼 수 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면피성 사과를 입에 달고 다니는 사람은 절대로 성공할 수 없다. 애초에 면피성 사과를 하는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고, 그러한 습관은 사람을 가볍게 만들고, 주장의 힘을 상실하게 만든다. 진정한 사과는 사유와 배려가 모두 담겨야 하기 때문에 쉽게 준비될 수 없으며 만들어지는데 시간이 소요된다.


문제는 면피성 사과를 주입식으로 배운 이들은 나이를 먹어서도 면피성 사과를 기계적으로 한다. 그러한 이유로 이들은 반성도 하지 않고, 사과를 듣는 이도 사과받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며, 결과적으로 사과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곤 잘못을 저지른 사람의 죄책감을 줄여주는 효과만 있다. 즉 이기적인 사과라 할 수 있다.


이들이 지능이 떨어지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사과의 목적이 상대방을 위한 게 아닌 이기적 목적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사과는 자신에게 아무런 도움이 될 수 없고, 그렇기에 이러한 사과를 남발하면서 사는 사람은 그것에 걸맞은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인다.


자기부정은 현명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쉽지 않은 일이다. 현명한 사람들은 과오를 다시 범하지 않기 위해 반성할 수 있고, 퇴고해 볼 수 있고, 반추해 볼 수 있다. 이것은 즉각적 뇌의 반사로 대부분 반사적으로 부정적 피드백에 대해 편도체 반응을 보이지만 편도체 반응은 훈련으로 극복 가능하다.


마치 권투 선수들이 주먹이 날아오는 것을 보고도 눈을 감지 않는 훈련을 하는 것과 같다. 살면서 부정적 피드백은 내가 잘못을 했던 안 했던, 심지어 억울한 상황에서도 마주하게 된다. 교통사고를 당했음에도 상대방이 나를 모욕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고, 치료를 잘못한 의사가 환자 욕을 할 수도 있다. 가해자가 피해자를 모욕하는 경우는 어떠한가. 살면서 부정적 피드백은 피할 수 있다고 피하는 게 아닌 인간으로 살면서 필연적으로 마주하는 상황이다.


중요한 것은 그것에 대응하는 반응이다. 매번 모든 피드백에 대해 사유하는 것은 힘들지만 종종 그들의 피드백 속에 내 삶에 중요한 가르침이 되는 피드백은 섞여 있을 것이다. 그 과정은 자신을 부정하는 시간을 요구한다. 자신이 기존에 가진 생각의 틀을 부셔야 하고, 나쁜 놈이라 생각했던 사람을 용서해야 하고, 내가 잘못한 것도 있었구나 하는 반성도 해야 한다.


반성이 없는 인간은 결코 인격적으로 성숙할 수 없다. 모두가 불완전하기 때문에 부족한 점은 생길 수밖에 없으며 주변의 반응으로부터 거북이 등껍질에 숨은 것처럼 기어들어가 살기만 한다면 자신의 심각한 결함을 죽을 때까지 고치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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