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년 전에 최진석 교수의 <철학산책> 수업을 들었다. 그때는 완전히 이해를 한 것 같지는 않지만, 교수님이 던진 한 문장 한 문장이 돌이켜보면 삶의 이정표가 되었던 말들이었다.
어느 날 수업 끝나고 그 교수님께 질문을 하나 했다.
"과학도가 과학자가 되기까지 혹독한 수련과정을 거친다고 합니다. 이 수련과정에서 내가 이 과학을 진짜 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개념체계 아래서 하고 있는지, 이걸 알아차릴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그때 교수는 이렇게 말했었다.
"그걸 알아차리는 것은 어렵다. 하나의 방법은, 너가 하고 있는 것 자체가 '목적'인지 아니면 무엇인가를 이루는 데 '수단'으로 작용하는 지를 생각해봐야 한다."
이 말을 들었을 때, 그 교수님이 아마 불교의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부처가 말했던 것의 진짜 의미를 말하면서 던졌던 말로 기억한다.
"세계의 진실과 가깝게 만나려면, 자기 눈으로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개념의 세계에 갇힌 자, 학습된 혁명, 이념의 수행자.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 훈련받은 자와, 자기의 눈으로 보는 자는 레벨이 다를 수 밖에 없어요. 그런 통찰과 깨달음은 아주 어렵지만, 도전해야 합니다. 기존의 프레임을 돌파하십시오. 피아니스트와 뮤지션은 다르고, 뮤지션과 아티스트도 달라요"
나는 그때 다니던 학교에서 1년 다니면서 나랑 수학으로 여러가지 토론할 수 있는 사람을 못 찾을거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래서 대학교 2학년부터 서울을 중심으로 대학교 연합 수학동아리를 만들어, 주기적으로 세미나를 하고 식사하는 소셜모임을 만들었다. '새로운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자기가 멍청하다는 것부터 깨달아야 한다.'라는 뜻으로 '멍청한 세미나'라고 이름을 붙였고, 다들 그 세미나에서 3년간 많은 발표를 했다. 그때 나는 처음에는 동역학계, 그 다음에는 가산적 수론 주제를 하나 잡아서 발표하면서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수학을 찾아보려고 노력했었다. 세미나에서 발표했던 친구들도 자기 스타일의 수학을 찾아갔다. 10년이 지난 지금, 그 세미나에서 강연한 사람들중 대다수는 이제 각 분야에서 어느정도 왕성한 연구를 하고 있는 사람이 되었다. 그 세미나가 없었으면, 지금의 나는 없었다.
이렇게 밖을 돌아다니면서 수학을 계속하려고 노력했다. 푸리에 해석학이라는 멋진 수학을 알게 된 이후, 이 수학을 더 진지하게 공부하고 싶은 마음에, Stein&Sharkarchi의 복소해석학, 그리고 실해석학 교과서를 읽으며 연습문제를 내 나름대로 풀려고 노력했다. 쉽진 않았다. 아무래도 어떤 선생이 가르쳐주는 것도 아니고, 이 책이 전 세계에서 수학을 잘한다고 하는 프린스턴 학생을 대상으로 만든 책이었으니, 쉬웠을리가 있나?
그래도 꾸역꾸역 다른 책도 뒤져가며 어느정도는 공부했었는데, 어떤 한 연습문제에서 완벽히 막혀버렸다. 지금도 문제가 기억난다. 무엇을 공부해야할지도 모르겠고, 정의만 봐도 어떻게 풀어야할 지 몰랐었다. 힌트가 있긴 했지만, 이 힌트가 어떤 도움을 주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한번 K 교수님께 메일을 보냈었다. 어떻게 풀어야할 지 감도 못잡겠는데 도와줄 수 있냐고 물어봤다. 그 분의 수업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은 없었지만, 학교 대외적으로도 열정적인 분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 것 때문인지 몇번 가서 수업과 전혀 상관없는 문제들을 질문했었는데, 적극적으로 잘 도와주셨다. 내가 던진 질문들이 쉽지 않은 질문이었는지 항상 1시간동안 같이 고민해준 게 좋았던 기억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별 이상한 것들을 들고가서 질문을 했으니, 얼마나 당황스러웠을까?
그때 K 교수님은 갑작스럽게 학과장을 맡았던 시점이라 너무 바쁜 상황이었다. 그래서 서로 가능한 시간이 저녁 7시라고 해서 그때 연구실에 찾아갔었다.
교수님은 책장에서 몇 가지 책을 꺼내면서 들춰내더니 어떻게든 그 자리에서 풀어줬다. 내가 아직까지 기초체력이 부족하다는 걸 여실히 느낀 순간이었다. 그러면서 교수님은 "이 작용소가 바로 약 특이적분작용소라고 하는거다 (weakly singular integral operator)"라고 말하면서, 이정도 성질이 있으면 괜찮은 성질들이 있지만, $d-\alpha$가 $d$로 바뀌는 순간부터는 특이적분작용소(singular integral operator)가 되기 때문에 특별한 구조가 있지 않고서는 연구하기가 어렵다고 했었다. 이때 다른학교에서 푸리에 해석학을 강의하셨던 교수님이 이런 걸 연구하는구나 싶었었다.
그때 교수님과 이것저것 이야기하다가, 진로 이야기가 오갔다. 그 교수님은 내가 조화해석학을 공부해보고 싶다는 건 2학년때부터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교수님은 내가 대외적으로 수학동아리를 만들며 돌아다녔고, TeX 관련해서 여러 일을 하고 있던 것도 알고 있었다.
한 몇 초의 침묵이 흐른 후, K 교수가 말했다.
"언제까지 야인처럼 살꺼야?"
그 말을 듣고 잠시 머리가 멎었다. 그 말이 왜 나에게 울림을 줬을까? 같이 공부할 사람을 못 찾아서 밖으로 돌아다니던 것을 알아주신 것에 대한 고마움이었을까? 그 말이 왜 나에게 크게 들렸는지를 아직도 잘 설명하진 못하겠다.
K 교수님은 책장에서 책을 하나 꺼내며 "Stein이라는 수학자, 너가 읽고 있던 책을 쓴 사람이 쓴 책이 하나 있다. 특이적분작용소에 대한 책이다. 여기서 마지막에 Stein의 도메인 확장정리가 있다. 나도 증명을 본 적은 없고 사용하기만 했다. 이걸 증명하는 걸 목표로 여름에 같이 세미나를 해보는게 어때?"라고 제안을 했었다.
나는 그 책이 있는건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조화해석학 테크트리를 이미 다른 교수님께 들었으니까. 그렇지만 이 책을 과연 내가 읽을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렇지만 K 교수는 충분히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해보라고 했었다. 하루 있다가 말했는지, 언제 하겠다고 말했는지는 기억이 나진 않는다.
그 전까지 나는 수학을 꽤 진지하게 꼼꼼하게 공부했다고 생각했지만, 그 교수님과의 세미나는 내가 3년간 쌓아온 수학에 대한 시선을 바꾸고 처음부터 다시 기초를 만들던 계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