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겐슈타인, 러셀, 이발사의 역설, 기표와 기의, 소쉬르, 료타르
이 글은 "데이비드 하비 가장 쉽게 이해하기"(가제)라는 원고의 일부입니다. 추후 책으로 출간될 내용이니 인용은 하지 말아주세요. 감사합니다. 그럼 시작합니다.
모더니즘은 모던화라는 특수한 과정에 의해서 만들어진 포스트모던에 대한 미학적 대응으로써 불안정하게 오르락 내리락 하는 개념이다...(중략)... 그렇게 해야 포스트모더니즘이 변함없는 모던화에 대한 하나의 또다른 대응인지, 아니면 이른바 '탈산업' 사회 나아가 '탈자본주의' 사회의 일종을 지향하여 모던화의 본질 그 자체가 급격히 변동한 것을 포스트모더니즘을 반영하거나 그 징조를 보여주는지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하비,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 137).
지난 글에서는 다시 '포스트모더니티'의 철학적 배경에 대해서 조금 더 알아봤어요.
사실 이 글의 내용이 하비의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 내용과 좀 겹쳐요. 왜냐하면 어차피 포스트모더니티 하면, 적어도 철학자 쪽에서는 나와야 할 사람들이 꼭 있거든요. 대충 이런 느낌으로 알아 두세요. 데카르트, 칸트, 헤겔, 마르크스, 막스베버, 하버마스로 이어지는 것이 하나의 '근대 프로젝트'의 흐름이었다면, 니체, 소쉬르, 푸코, 료타르, 장 보들리야르, 라깡, 데리다로 이어지는 흐름이 포스트모더니티로 가는 길이에요. 여기에 '페미니스트'(femisist)를 포함시키기가 조금은 애매한 측면이 있어요.
흔히 포스트모던이라고 하면 이거 하나는 기억하세요. 세상에는 마르크스가 말한 '계급'(class)라는 모순만 있는 것이 아니고, 인종, 계급, 성(gender)이라는 모순이 있어요. 여기서 모순(contradiction)이라는 말도 좀 의미심장한데, 여기서 '모순'은 앞뒤 안 맞는 그런 게 아니고 '문제점'(issue) 혹은 '충돌'(conflict)를 의미해요. 마르크스는 모순이라는 말에 이런 뜻을 덧씌워버림으로써 나중에 진짜 논리적 모순과 변증법적 모순을 헷갈리게 했었죠. 나중에 이 점은 칼 포퍼가 비판합니다.
자연과학자로서 칼 포퍼가 보기에는 '모순'이라는 것은 극복될 수가 없는 것이에요. '이 창은 모든 방패를 뚫습니다.'와 '이 방패는 모든 창을 막습니다'라는 명제가 동시에 성립할 수는 없는 거에요. 역설적이게도 모더니즘의 붕괴와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의 출발을 알리는 '비트겐슈타인'과 마르크스주의 사상을 혹독하게 비판한 칼 포퍼는 대학의 한 강단에서 만나서 삿대질 하면서 싸운 일이 있었어요. 이 경험은 나중에 '비트겐슈타인은 왜?'라는 책으로도 출간됩니다(진짜 좋은 책이에요.)
지난 번에 저는 하비 교수가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건 이런 거다'라고 설명하려고 시도한다고 하면서 글을 마무리지었어요. 그런데 이건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에요. 대표적으로 료타르의 '포스트모던의 조건'이라는 책이 유명해요. 지난 번에 말했던 푸코 역시 포스트모던의 대표주자 같은 사상가이죠. 지난 글에서 제가 '비트겐슈타인'을 철학에서 포스트모던이 출발한 시기라고 말했어요. 비트겐슈타인과 료타르, 그리고 소쉬르는 대체로 한 범주로 묶입니다. 주로 '언어'를 가지고 포스트모던에 접근한 사람들이죠. 그들 스스로가 포스트모더니스트라기보다는 그들의 언어에 대한 집요한 관심이 우리를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안내합니다.
뜬금 없이 인용하자면,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에서 하비 교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1848년 이후 오직 하나의 재현양식만 가능하다는 생각이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계몽사상의 범주적 확실성이 갈수록 거센 도전을 받더니 급기야 다각화된 재현체계에 그 자리를 물려주고 말았다."(하비, 49) 이 두문장이 포스트모더니즘의 잉태(?), 혹은 맹아를 보여줘요.
그런데 여기서 '재현양식'(mode of representation)을 이해 못하면 이 문장이 통째로 이해 안 되죠. 재현이란 개념은 이 글을 참고하세요. 계몽주의 사상은 인간의 이성의 확실성에 대한 믿음이 극도로 올라간 시대에 꽃피웠어요. 하나의 개념이 하나의 사상(event)를 지칭할 수 있고, 그 고리를 연결하면 온 우주를 이해할 수 있는 틀이 만들어질 것 같다는 믿음도 있었어요. 데카르트, 칸트, 헤겔, 특히 헤겔은 관념론의 철학을 끝까지 밀어붙인 철학자이죠.
여기서 하나 주의할 점은 철학이 뭘로 이뤄졌냐, 하는 것이었어요. '언어에 대한 의심'은 근대로 가는 하나의 길이었어요. 잘 들어보세요. 철학을 뭘로 하죠? 언어로 합니다. 그렇다면 '언어'라는 도구가 완전히 잘못된 것이라면? 비트겐슈타인은 바로 이 점에 주목합니다. 그의 천재성이 십분 발휘된 저작 <논리철학논고>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세상은 사물의 총체가 아니라 사실의 총체이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요?
예를 들어, '사과'라는 단어를 떠올려 보죠. 우리는 둥그렇고 맛있는 어떤 '물체'에요. 우리는 사과가 언어를 가리킨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어떤 특정한 사과가 과연 직접 사과라는 단어를 가리킬까요? 사과 중에서는 어떤 빨간 사과, 초록 사과, 약간 누르스름한 사과가 있어요. 이것들은 그냥 '사과'라는 단어로 바뀌어버리죠.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는 사과라는 개념(concept)를 사용하기 위하여 사과라는 것을 한 번 요약(abstract)하는 것이에요. 어쩌면 우리는 '사과'라는 사물을 보고 있지만, 구체적 하나의 '사과'를 지칭해내진 못해요.
신기하지 않나요? 사과라는 말을 쓰기 위해서는 '사과'라는 녀석을 한 번 요약해야 한다구요(어떤 번역본에서는 요약을 '추상'이라고 쓰기도 합니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이 사과라는 말이 특정 물체를 지칭하는 것으로 쓰여요. 그렇게 해도 별 차이가 없거든요. 그런데 철학에서 쓰는 말은 '물질', '현상', '정신', '소외' 등 어느 하나 그냥 가리킬 수 있는 것이 없어요. 이것들은 사람들이 느끼는 어떤 감정이거나, 어떤 특수한 상황이 나타내는 성질을 요약한 것이에요. 철학적 개념은 추상을 피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눕니다.
1.일상생활 언어: 현실: (단어, '사과'라는 단어) -- 가리키다(represent) --> (물체, 특정 물체)
2. 철학의 언어: (단어, '사과'라는 단어) -- 요약하다(abstract) --> (물체, 특정 물체) --> 가리키다(represent) --> (아이디어, idea)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은 일상생활에서 언어는 충분히 제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철학이 논리를 통해서 뭔가를 설명하려 하려면 동어반복(tautalogy)에 빠진다는 거에요. 비트겐슈타인은 말합니다. 논리로 해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결론은 '비가 오거나 비가 오지 않거나 둘 중 하나이다.' 우리는 이 말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말이 우리 지식에서 뭔가 새로운 정보를 주지는 못해요.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적 언어가 논리적 일관성을 얻는데 실패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철학적 문제란 문법적 오류에 불과하다고 선언해버리기에 이릅니다. 과감하쥬?
여기에는 특별한 문제가 하나 더 있어요. 바로 '나'에 관한 문제에요. "나"를 추상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나'(I)란 무엇일까요?
3. 나(라는 단어) --> 나(라는 어떤 특정 캐릭터) --> 나(라는 개념)
이 세 개가 일치해야 하는 상황이 생겨나요. 타인을 대할 때 논리학은 그럴 듯 했습니다. 예를 들면 3단 논법으로 우리는 '연역적 추론'을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모두 죽는다'는 사실만 알면, 소크라테스도 죽고, 플라톤도 죽는다는 사실을 연역해낼 수 있습니다. 이번엔 다음과 같은 원칙이 주어져 있다고 생각해봅시다.
'나는 스스로 이발할 수 없는 사람만 이발한다.'
자, 지금까지 배운 바로는 철학적 개념이 존재하려면, 어떠한 말이 어떠한 개념을 '지칭'(represent)이 성립해야 해요. 여러분 이건 철학에서만 발생하는 문제가 아니에요. 인생 모든 문제에서 발생합니다. 예를 들면 여러분이 지금 쉬고 있는 집이나 학교를 떠올려보세요. 그것은 무엇을 '재현'(represent)하죠? 어떤 건축가의 '아이디어'에서 왔죠? '아이디어'는 '설계도'가 됩니다. 그리고 그 설계도를 따라 만든 것이 지금 여러분이 있는 집이에요. 여러분이 앉아있는 의자는 어떻구요? 그래서 사실 세상은 이런 '지칭' 관계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떠올려보는 것이 필요해요. 이것이 사실 하비 교수나 마르크스가 주장하는, '변증법적' 사고의 일환이기도 하지요. 하나는 다른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고에요.
이미 다뤘듯이 이것은 민주주의의 문제이기도 해요. 현대 민주주의의 많은 문제는 간접 민주주의의 문제가 아니겠어요. 즉 어떤 정치인이 어떻게 내 의견을 표상(representation, 대의, 대표, 재현)할 것인가?의 문제에요.
자 잠깐 옆길로 샛는데, 다시 돌아와봅시다. 위 문장에서 '나'는 '나'를 이발할 수 있나요, 없나요? 여기에서는 두 가지 '나'가 있어요. 하나는 '스스로 이발할 수 없는 사람'으로서의 '나'가 있어요. 그리고 '그런 사람만 이발하는 나'가 있어요. 내가 다른 사람을 지칭할 때는 지칭(represent)이 가능합니다. 그런데 '나'를 이발한다면? 이 때 나는 '스스로 이발할 수 있는 사람'일까요, 아니면 '스스로 이발할 수 없는 사람 사람'일까요? 만약 이발할 수 있다면, 나를 이발할 수 없습니다. 이발할 수 없으면 이발해야 합니다. 아이고 두야! 도대체 뭐야?
논리학의 지칭 공식은 여기에서 '모순'이 생겨버리는 거에요. 남을 향해서는 잘 작동하는 것처럼 보였던 논리학이 풀 수 없는 모순에 빠져 버리는 거에요. 이것이 바로 '러셀의 역설'입니다. 실제로 비트겐슈타인의 스승이었던 버트란트 러셀은 원래 수학자였는데, 이 지점에서 논리학을 포기해버립니다. 그리고 그는 수학에서 철학으로 전공을 바꿉니다. 나중에 버트란트 러셀의 서양철학사 는 서양 철학을 집대성한 최고의 저작 중 하나로 기록됩니다.
이 역설을 포함하여, 근대가 설정해 놓은 지칭 공식은 언어를 기반으로 하고 있고, 이 언어가 깨지면 논리가 깨지고, 논리가 깨지면 철학이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은 포스트모던의 아주 중요한 밑바탕입니다. '언어'를 조금만 더 확장해볼까요? 언어가 조금 더 확장하면 '기호'(code)가 됩니다. 나중에 지리학 공부하실 분들은 기호화된 지식과 기호화되지 않은 지식을 배우지요? 그것이 바로 codified or uncodified knowledge입니다. 기호의 핵심은 기표와 기의에요. 껍데기가 기표(signified, 시니피에)라면, 그 내용물은 기의(signifying, 시니피앙)이 되는 거에요. 이 용어는 나중에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에서 매우 자주 나오니 이해해두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이 사고는 나중에 료타르의 포스트모던 정의와 소쉬르의 구조주의를 이루는 뼈대가 됩니다. 료타르는 비트겐슈타인의 언어게임 이론을 발전시켜서 포스트모던의 사고를 정리하는데 도움을 줍니다.
이 사고는 플라톤의 '형상론'도 깨버립니다. 아이디어가 개념이 되고, 개념이 언어가 되는 연결고리가 의심 받기 시작한 것이에요. 한마디로 아무도 믿을 사람이 없고, 아무 것이 무엇을 지칭하는지 알 수도 없게 되어버린 것이 바로 포스트모던이 처한 상황입니다.
포스트모던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정의되거나, 혹은 정리될 수나 있는 것일까요? 일부 과학주의 지식인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을 실랄하게 비판하는 수준을 넘어 비난하고 조롱하기에 이르릅니다. 왜냐하면, 포스트모던이라는 말 자체가 너무 다양한 아이디어를 담고 있기 때문ㄴ에 이것이 '탈근대'인지 '근대의 후반'인지, '탈자본주의'인지 헷갈리는 지점에 이르게 되요. 심지어 일부 지식인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을 '유사과학' 즉 학문도 아니라고 비판하기에 이르릅니다.
하비는 이것을 '설명'하겠다고 나온 것이에요. 이러한 시도는 다시 강조하지만, 다소 과감합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것을 포괄하는 것만으로도 일이지만, 이것을 '설명'해내겠다고 한 것은 대단한 도전이었어요. 하비는 포스트모더니즘을 이해하기 위해서 뜬금없이 마르크스의 이론이 아니라 '조절학파'(regulation theory)를 가져오기 시작합니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요? 그리고 조절학파는 또 뭐죠?
(계속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