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망, 하버마스, 파리대개조, 루이 나폴레옹
이 글은 "데이비드 하비 가장 쉽게 이해하기"(가제)라는 원고의 일부입니다. 추후 책으로 출간될 내용이니 인용은 하지 말아주세요. 감사합니다. 그럼 시작합니다.
르 코르뷔제와 같은 계획가와 건축가, 혹은 오스망과 같은 행정가가 직선 투성이의 건조환경을 만들면 우리는 일상적 실천을 그러한 건조환경에 적응시켜야 한다(하비,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 253).
지난 글에서 우리는 하비 교수가 왜 조절이론(regulation theory)를 차용했는지를 알아봤어요. 지난 글을 요약하자면, 하비 교수는 마르크스론자이지만, 자신의 주장(포스트모더니티는 유연적 축적 체계의 산물)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조절이론'이라고 하는 이론체계의 언어들(예를 들면, 포디즘, 주변부 포디즘, 유연적 축적체계) 등의 언어를 사용했다는 것이었어요. 그 태도는 매우 실용적이었고, 하비 교수가 마르크스를 선택한 이유 중 하나가 그가 지식에 대해서 매우 실용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란 요지였습니다.
생각해보니 아글리에타를 비롯하여, 조절이론도 프랑스 학자들이 주도한 학파네요. 르페브르도 그렇고, 하비 교수의 프랑스 사랑!
오늘은 조금 주변적인 이야기로부터 출발해볼까 해요. 먼저 번역가들에 따르면 이 책 한국어판은 1994년에 출간되었어요. 제가 이 책을 처음 산 것이 2001년이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그 때가 대학교 1학년이었는데, 이 책을 추천받았을 때, "마르크스주의자가 왜 포스트모더니티에 대해서 썼지?" 이런 의문을 가졌던 것이 선명하게 기억납니다. 지금은 이 책의 한국어판이 품절되었지만, 제가 확인해보니 제가 가진 판본이 4쇄네요. 그렇다면 판매량을 짐작해볼 수 있는데, 한국에서도 제법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산 것 같아요. 그 중에 몇 %나 살아남았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한국에서 왜 이렇게나 어려운 문화비평서(솔직히 철학서나 이론서는 아니죠.)가 이렇게 많이 팔렸는지 생각해봤어요. 먼저 예전에는 지금과 달리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이 읽던 시대였어요. 책 한권이 히트했다 하면 10만권 20만권이 팔리는 경우도 흔했죠. 그래서 4쇄면 그렇게 많이 팔렸다고는 또 볼 수 없는데(최종 판매량은 모르지만), 어쨌든 어느 정도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던 건 확실해요. 그런데 이 책은 정말 난이도가 높은 책이에요. 붙잡고 읽어내려가기가 정말 쉽지 않은 책입니다. 그 이유는 이미 여러 번 언급했죠. 사람들은 당시 뭔가에 대한 '갈망'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게 뭐였을까요?
1994년, 이 시점은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 정부가 수립된 직후이기도 합니다. 여기에 '문민'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은 '군인이 아닌'이라는 것이었죠. 말하자면, 군부 독재가 사실상 완전히 마무리되는 시점이었죠. 정확하게 말하면 '군사'와 '독재'가 언제 어떻게 끝났는지는 많은 논란이 있겠지만, 김영삼 전 대통령이 영화 '서울의 봄'의 주도 세력이었던 '하나회'를 척결한 시점부터는 사실상 군부 쿠데타가 일어날 가능성이 없어졌어요.
시간을 조금 더 돌려 노태우 정부 시절에는 지금은 상상하기도 어려울 만큼 많은 시위가 일어났어요. 제가 학교를 다닐 때에도 5월이 되면 최루탄 연기 때문에 재채기를 끊임없이 했던 기억이 선해요.
그 때 저는 최루탄 냄새가 너무 싫어서 시위하는 학생들을 탓했어요. 어른들도, "학생이 공부를 안 하고 왜 시위를 하느냐"고 하기도 했어요. 물론 '민주화'라는 거대한 명분이 있기는 했지만, 소위 '문민' 정부가 들어선 이후부터는 '민주화'라는 명목 역시 일반인들이 보기에는 없어진 것이었어요. 그래서 아직까지 남아서 시위를 하는 사람은 소위 '친북' 세력, 즉 북한과 뭔가 연관이 있다는 프레임이 본격적으로 먹히기 시작했죠. 이런 프레임 씌우기는 그 전에도 있었지만, 이제부터 사람들은 '민주화 되었다'고 느끼기 시작했고, 학생 운동은 눈에 띄게 줄어들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지금 관점에서 보면 여전히 전국은 여전히 시위로 뜨거웠어요.
2017년 박근혜 전 대통령의 국정농단 의혹으로 시작된 촛불시위를 떠올려 보세요. 전 세계 외신들이 한국의 촛불집회 문화를 보고 시민의식에 놀랐습니다. 이건 한국이 그만큼 시위가 많았던 것의 방증이기도 해요. 시위가 너무나도 많다 보니 합법적으로, 서로 문제가 안 되게 시위를 하는 방법을 찾는 거죠. 예를 들어 시위를 하게 되면, 몇 가지 특이한 일들이 생겨요. 사람들이 일시적으로 특정 공간에 '모이다' 보니 일단 시끄럽죠. 주변 주민들이나 상인들은 소음에 시달립니다. 그리고 시위대가 왔다 가면 엄청난 양의 쓰레기가 쏟아져요. 누군가는 그것을 치워야겠죠. 그리고 시위대도 밥을 먹어야 하다 보니, 사람들이 모인 일부 지역에서는 식당이나 상점, 특히 편의점이 대박이 날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모이고 흩어지면서 매우 특이한 외부효과가 일어나는 것이죠.
우리나라는 유구한(?) 시위의 문화가 있다 보니 어느 순간 시위도 질서정연해야 한다는 인식이 시작됩니다. 시위대가 지나갈 때 생기는 부정적 외부효과를 최대한 막아야 하기 때문이죠. 시위를 하고 나서 시민들이 시위대를 싫어하게 된다면 시위를 한 목적이 없지 않겠어요? 그래서 한국에서는 촛불집회를 하고 나서 시민들이 알아서 청소를 하고, 거리를 정돈합니다(물론 모든 경우에 이렇게 아름답게만 끝나지는 않습니다). "약탈", "방화"? 그런 거 절대 없어요. 그게 K-시위입니다. 얼마 전 서이초 교사의 죽음을 추도하는 집회가 여의도에서 있었는데, 오와 열을 맞춰서 질서정연한 선생님 시위가 화제가 되기도 했었습니다.
시위와 공간만큼 흥미로운 주제도 없는데, 그것은 도시가 시위(혹은 봉기, 혁명)과 함께 발전해왔기 때문이에요. 우리는 여기서 오스망(프랑스어: Baron Georges-Eugène Haussmann, 1809 – 1891)을 만나게 됩니다. '자본의 한계' 서문에 '오스망'과 '뉴욕'이 한꺼번에 등장했었습니다.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에서는 두 번 등장하죠. 도대체 무슨 일이죠? 오스망은 나폴레옹 3세(루이 보나파르트 나폴레옹, 혹은 루이 나폴레옹)의 명을 받아 파리를 대개조한 사람으로 유명합니다. 예전에 고등학교 때 어떤 선생님이 파리에 다녀와서 이런 말씀을 하더군요. "프랑스에서 어떤 시장이 엄청나게 도로를 넓게 설계했는데 그 때는 사람들이 욕을 욕을 했었는데, 지금은 그 도로도 꽉 막혀있다. 이렇게 도시계획을 하는 사람은 100년을 내다봐야 한다"고요. 그 때는 몰랐는데, 그 사람이 '오스망 남작이고, 말 그대로 파리의 도시 구조를 만든 사람입니다. 그 구조가 우리가 한국지리 시간에 배웠던 '방사형' 도시라는 것을 알려줬으면 좋았을 텐데요.
오스망 남작이 파리 대개조를 하기 전 파리는 매우 지저분하고, 냄새 나고(그래서 향수가 발달했다고 하죠), 요즘으로 말하면 불량한 주거 환경의 표상(representation)이었다고 해요. 파리뿐만 아니라 초기 자본주의 도시들은 지저분하기로 유명했어요. 도시는 농촌에 비해서 덜 성숙하고, 사람과 도둑이 많은 이상한 장소였죠. 뿐만 아니라, 19세기 파리의 고질적인 문제는 소위 말하는 '시위'였어요. 사회 시간에 배우는 프랑스 1789년 '시민 혁명'(프랑스 대혁명) 이후로 파리는 시위로 몸살을 앓게 되죠. 레미제라블로도 유명한 1832년 6월 혁명, 1848년에는 2월 혁명도 있었습니다. 이해는 마르크스의 그 유명한 '공산당 선언'이 출간되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마르크스는 이 유명한 글로 공산주의 혁명의 씨앗을 남기고 1848년 혁명을 준비하기 위해서 고향인 독일로 떠나게 되죠.
1846년에는 프랑스의 소맥 흉작으로 농민 폭동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농가의 어려움은 인플레이션으로 도시 생활의 빈곤으로 이어지게 되고, 이와 같은 경제적 조건이 결합하여 1848년의 혁명으로 이어집니다.1848년 이후로는 혁명의 열기가 천천히 식게 됩니다.
데이비드 하비는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에서 프랑스보다는 영국의 '불황'에 주목합니다. 그가 보았을 때 1848년 불황은 기존의 흉작으로 인한 불황과 질적으로 다른 자본주의적 불황이었다고 해요. 사실 이 부분은 동의하기가 좀 어려운데 1842년대 아일랜드 감자기근으로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죽게 됩니다. 이 때 바로 유명한 곡물법을 시행하여 영국정부가 구제 활동을 벌이죠. 지난 번에도 언급했지만, 이것은 리카아도의 차액지대론과 비교우위론이 나오게 된 계기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맬서스의 '인구론'(1798)에서 나오는 기아사태가 기가 막히게 맞아 떨어진 사례이기도 하죠.
이후 혁명의 열기가 식자, 마르크스는 결국 독일에서 혁명에 실패하고 영국으로 망명을 떠나게 됩니다. 데이비드 하비 역시 1848년 혁명부터 1871년 파리 꼬뮌 탄생까지 도대체 파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고 추후 이 과정을 연구해 '모더니티의 수도, 파리'를 쓰게 됩니다(우리가 나중에 다룰 책이죠). 그리고 하비는 그의 글서 자신의 저작 중 딱 두개만 읽어야 한다면, 하나는 '자본의 한계'이고, 다른 하나는 '모더니티의 수도, 파리'라고 말합니다. 그만큼 하비 교수는 파리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던 것 같아요. 사실 파리 자체보다는 파리가 가지고 있는 변증법적 역사유물론의 조건에 관심이 있는 것이겠죠.
다시 파리로 돌아와 봅시다. 1848년 시민혁명으로 프랑스는 부르봉 왕가를 내 쫓는데 성공합니다. 그런데 다시 프랑스는 혼란에 빠졌고, 이 와중에 대통령 선거에서 나폴레옹의 조카인 루이 나폴레옹이 대통령으로 선출됩니다. 그는 3년 뒤 친위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하고 황제에 오르며 제 2 제정의 시대를 열었어요. 친위 쿠데타라는 것은 이미 합법적으로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후에 여당이 실질적으로 권력을 장악해버리는 것을 의미해요. 민주주의는 3권분립이 기본 원칙인데, 행정부의 수반인 '대통령'이 남은 사법부(법원)와 입법부(국회)를 모두 장악하려는 것이 넓은 의미의 친위 쿠데타라고 할 수 있어요. 루이 나폴레옹은 대통령령을 통해서 선거권을 되돌려놓고(나쁘게), 의회를 강제로 해산하고, 당시 반대파였던 일부 공화파 정치인들을 체포해 공화파 저항을 막았습니다. 이후 국민투표를 통해 '친위 쿠데타' 인정 여부를 물어 사실상 독재체제를 완성하게 됩니다.
이 때 '친위 쿠데타'는 언뜻 합법적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정권을 장악하는 과정이었어요. 1832년 혁명, 1848년 혁명의 불씨가 아직 남아 있었기 때문에 여전히 언제 또 혁명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인 것 같았습니다. 마르크스는 아마 프랑스의 '시민' 혁명, 즉 부르주아지 혁명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큰 기대를 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이것은 마르크스의 이론으로 봐도 별로 맞지 않는 기대였어요. 왜냐하면 변증법적 역사관에서 생산량이 증대해서 생산관계를 압도하려면 그렇게 성숙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한데, 1848년은 지금 관점에서 보면 자본주의가 꼬꼬마였던 시절이었거든요. 1848년에 부르주아 혁명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지만, 공산주의 혁명으로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일어난다는 것은 '지금 관점에서 보면' 기대하기 힘든 일이었어요. 하지만, 혁명가 마르크스는 기대를 놓지 않고, 혁명을 준비합니다. 공산주의 혁명이 단기간에 일어나지 않을 것을 확인하고 마르크스는 '자본론' 집필 작업에서 몰두하게 됩니다.
1850년대 루이 나폴레옹은 오스망 남작을 파리시장으로 임명하여 파리 대개조를 지시합니다. 도시정비 사업을 벌인 것이죠. 여기에서는 두 가지 주목할만한 사실이 있어요. 이미 파리는 혁명의 분위기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는 겁니다. 좁은 골목길에서 한 쪽을 바리케이로 치고 막아 버리면 그 안에 틈새공간이 만들어지는 거에요. 그 곳은 해방구가 되어서 경찰과 군대와 싸울 수 있는 기지로 활용됩니다. 대로에서는 경찰과 군대가 유리하지만, 골목으로 가면 사정이 달라져요. 영화에서 보면 총을 든 나쁜 사람들이 쫓아올 때 주인공들이 시장이나 상점으로 들어가죠? 그래야 숨을 수 있고, 또 때가 되면 반격을 노릴 수 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오스망 남작은, 루이 나폴레옹의 의지를 충분히 반영해서, 개선문을 중심으로 한 소위 '방사형' 도시를 만들게 됩니다. 도로는 시원시원하게 널찍하게 뚫어놓고, 개선문 가운데 있으면 사방을 한 눈에 내다볼 수 있는 시야(sight)를 창출해내죠. 이 과정에서 파리 주민들과 얼마나 많은 마찰이 있었는지는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지금까지 한 이야기를 조금 요약해볼까요? 일련의 사건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결국 파리 대개조라는 공간적 변동을 이뤄냅니다. 공간의 철학적 의미를 탐구하는 학자에게 이보다 더 드라마틱한 사례가 또 있을까 싶어요. 데이비드 하비가 파리의 역사에 빠진 이유를 알것도 같습니다.
(소맥흉작)-->(1848 혁명) --> (루이 나폴레옹 선출) --> (친위쿠데타) --> (파리 대 개조)
(경제변동)-->(정치 변동) ------------> (도시 건조환경)
또 한편으로 오스망 남작의 파리 개조는 도시 정비 이외에도 혁명을 누그러뜨리는 기능을 가지고 있었어요. 오스망 남작의 파리 대개조는 대체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습니다. 파리는 깨끗해지고, 예뻐졌어요. 뿐만 아니라 오스망은 공원과 광장을 새로 만들었어요. 지금 우리가 아는 낭만의 도시 빠리는 사실 이 때 본 모양을 갖춥니다. 레미제라블에서 장발장이 마리우스(코제트의 남자친구죠)를 들쳐업고 하수구를 빠져나오는데, 이런 혁명의 열기로 인해 나중에 깨끗하고 정비되고, 무엇보다도 냄새 안나는 파리로 거듭나게 된 것이죠. 데이비드 하비는 위 인용구에서도 볼 수 있듯, 이러한 건조환경(built environment)가 만들어내는 공간적 효과를 지적하기도 합니다. 즉 직선화된 거대한 거리는 이제 "사람들을 보다 효율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공간"으로 거듭나게 된 것입니다.
데이비드 하비는 오스망을 '모더니티의 영웅' 중 하나로(약간 비꼬는 듯한 느낌) 언급하기도 합니다. 하비 교수는 1975년에 파리로 안식년을 떠납니다. 사실 모든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파리는 정말 엄청난 영감을 불어일으키는 도시가 분명해요. 1848년 부르주아 혁명, 1968년 혁명 등 굵직한 혁명이 일어났던 도시이기도 하고, 오스망 남작의 대개조라는 사건으로 아름답고도 질서정연한 통치공간을 만들어내는 유례 없는 도시이기도 하니까요.
파리 대개조는 혁명의 공간이라는 측면에서 두 가지 특이하고도 이상한 점을 가져요. 하나는 대규모 군중집회를 하기 좋은 도시구조가 되었다는 것이죠. 이전의 도시가 좁디 좁은 골목길에서 경찰 군대와 싸우는 것이었다면, 이제 시위대는 널찍한 곳에서 마음껏 시위를 할 수 있게 되었어요. 이런 널찍한 공간은 경찰과 군대로 하여금 '시야'(sight)를 제공합니다. 널찍해진 도시 구조는 시위대를 효과적으로 제압할 수 있는 물적 토대를 만들어주기도 한 것이죠. 다른 하나는 파리 시민들에게 "놀 공간"을 일부러 조성해줬다는 거에요. 이것은 데이비드 하비도 지적하고 있듯이 오스망이 하워드의 '전원도시론'이란 이론을 받아들였기 때문이기도 해요. 파리 시민들은 이제 광장과 공원 등 '놀 공간'이 생겼고, 오페라하우스에서 오페라를 보고 커피하우스에서 토론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기 시작해요. 덕분에 혁명의 열기는 사그러들고 좀 낯 간지러운 말을 하자면 '숙의'(deliveration)과 토론(discuss)의 문화가 생겨나기 시작했어요. 이것은 나중에 하버마스의 의사소통 행위 이론으로 연결되는 아주 중요한 단추가 됩니다.
요약하자면,
하비 교수는 1975년에 파리로 안식년을 가서 그곳의 학자들과 교류하다가 파리 역사에 흠뻑 빠지고, 나중에 1848년 혁명부터 1871년 파리꼬뮨 탄생까지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아내기로 결심합니다. 이 때 얻은 지식이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 곳곳에 녹아 있어요. 1850년대 혁명 분위기가 약해지자 루이 나폴레옹은 그 유명한 오스망 남작을 시켜서 파리개조사업을 벌리고, 개조사업은 빠리를 보다 깨끗하고, 냄새 안 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대도시에서의 시민혁명의 양상도 바뀌었죠. 그러나 이러한 격변은 기존 파리 주민들의 축출과 저항을 담보로 한 것이었습니다.
이 사례는 자본주의 불황이 정치에 영향을 주고 나아가서 파리 도시공간 구조를 바꿔버리는 아주 드라마틱한 사례이죠.
다음 시간에는 진짜로 '포스트 모더니티의 조건'을 조망해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