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초맘의 [서유견문록]

미주 뉴스코리아 <슬초맘의 작은 행복찾기> - 2008년 5월

by 슬초맘

한국에서 슬초맘의 언니가 텍사스로 몇 년간의 '망명'을 왔습니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처음 미국 생활을 시작한 슬초 이모에게는 모든 것이 낯설기만 합니다. 공항에서 공중전화로 슬초네에게 시외전화를 거는데 30분이 넘게 걸리다 결국 지나가는 아주머니 핸드폰을 빌어 슬초네 집에 전화를 걸어야 했던 슬초 이모, 한국에서는 버젓한 고등학교 선생님이었으나 이곳에선 하루 아침에 전화도 못 거는 바보팅이로 전락한 설움이 만만치 않습니다. 며칠 전에는 모르면 용감하다고 위험한 지역으로 들어가서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고 있는데, 웬 흑인 깡패가 와서 돈을 내 놓으라고 협박을 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세상 눈치없고 진지한 우리의 슬초 이모, 그 사람이 뭐라뭐라 해 대는데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아주 공손히 "Sorry, I am not good at English. Could you please repeat more slowly?”를 몇 번 시전했더니, 그 깡패가 막 짜증을 내면서 떠났다고 하더군요. 여기 쿵, 저기 쿵... 그렇게 슬초 이모는 요즘 자신만의 [서유견문록]을 써 내려가고 있는 중인데, 곁에서 바라보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슬초맘은 마치 그런 적이 없었던 것처럼 말이지요.


슬초맘이 처음 미국 땅을 밟은 것은 지난 1995년, 남미로 가는 비행기를 타고 미국을 경유했을 때였습니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처음 겪은 미국사람은 바로 공항 에스코트 직원이었더랬습니다. 미국 비자가 없이 미국에 경유한 슬초맘이 혹시라도 공항에서 도망을 쳐 불법체류를 하게 될까봐, 다음 남미행 비행기까지 안전히 '에스코트'를 하러 나온 사람입니다. 그런데 말이 좋아 에스코트지 화장실 문을 열고 들어갈 때까지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그 아저씨 덕에 미국에 대한 이미지는 완전히 구겨졌습니다. 기분 나빴던 몇 시간 후, 남미행 비행기에 오르며 이렇게 다짐했었더라죠. "미국? 내 참, 더러워서 오라고 사정을 해도 안 온다~! 에이 퇘퇘퇘!! " 사람 일은 모른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경우에 쓰는 말인가 봅니다. 어찌어찌 하다보니 슬초맘은 8년 뒤 다시 그 더럽고 치사한 땅으로 돌아와, '관광'도 아니고 '학업'도 아닌 '먹고 살아야 하는' 입장이 되어버렸으니 말이지요.


눈물겹도록 민망했던 슬초맘의 미국 적응기 중, 가장 낯 뜨거웠던 기억을 꼽으라면 그것은 바로 엘에이에서 처음으로 혼자 걸어서 운동을 나갔을 때였습니다. 자, 그럼 여기서 그 낯 뜨거운 기억을 풀어 놓아보도록 하지요. 한 대 밖에 없던 차를 타고 슬초빠가 쓩~ 출근을 해 버리고 난 후, 티브이도 없던 집에서 혼자 먹고 자고 뒹굴거리던 슬초맘이 그날 따라 밖에 나가 산책을 해 보겠다 결심을 했습니다. 문제는 제가 만삭이었다는 것이지요. 운동화를 단단히 메고 집 밖을 나서서 좀 걸어보려는데, 지나가던 차들이 자꾸 와서 옆에 서는군요. 어딘가에 가는 길이라면 태워다 주겠답니다. 만삭의 동양인 아줌마가 차가 없어서 걸어가는 것 같아 보였나 봅니다. 아, 이 친절한 국민들이란. "감사합니다만 산책 겸 운동 중이예요~"라고 한 마디 해 주고 싶지만, 문제는 영어입니다. 이놈의 영어가 대충 알아는 듣겠는데 입에서 바로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이지요. 그래서, 말 대신 나름 운동하는 제스쳐를 취해 주고, 씨~익 한 번 넉살좋게 웃어주니, 그 친절한 미쿡인의 얼굴 표정이 미묘하게 바뀝니다. '이 여자 머리에 꽃 꽂았구나... 상태가 안 좋구나...' 하는 표정이 살짝 지나가더니 다시 휑하고 자기 갈 길을 가는군요. 멀쩡하던 사람이 꽃 꽂은 여자되는 것은 아주 순식간입니다. 그러나 진격의 슬초맘, 굴하지 않고 다시 씩씩하게 걸어갑니다. 자, 다음 난관은 바로 횡단보도.


그런데 분명 아까 저 앞에 있던 사람은 잘만 건넜는데, 왕복 6차선의 도로들이 만나는 교차로에서는 기다려도 기다려도 보행자를 위한 초록색 등이 들어오지를 않는 겁니다. 걸어다니는 사람도 보이지 않고, 그렇게 10분, 20분, 30분. 캘리포니아의 뜨거운 햇살은 서서 기다리는 만삭 아줌마를 지치게 하고, 30분 전 지나가던 쓰레기 수거 차량 운전자는 이번엔 다시 반대 방향으로 지나가며 땀을 뻘뻘 흘리며 서 있는 슬초맘에게 불쌍한 시선을 던집니다. 음성이 자동으로 지원되는 듯 합니다. '불쌍하기도 하지, 상태가 안 좋은 임산부네.' 슬초맘, 결국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 신호등은 고장난 것임이 분명해! 옆으로 돌아가야겠다!!' 그러나 이건 또 무슨 일일까요? 이쪽 신호등 녀석도 10분, 20분, 30분이 되도록 반응이 없다니 말이지요. 저 멀리에서 아까 그 쓰레기 수거 차량이 또 지나갑니다만, 슬초맘은 이번에는 가로수 뒤에 숨어 애써 아까 그 여자가 아닌 척을 해 봅니다. 그렇게 한 시간을 땡뼡에서 땀을 뻘뻘 흘린 슬초맘, 드디어 오늘의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이 동네 신호등들이 다 고장난 것임에 틀림없어.'


슬초맘, 이 시점에서 남미 생활에서 배워 온 '고속도로 무단 횡단하기' 개인기를 캘리포니아에서도 시전해 보기로 결심했습니다. 그까짓거 안 해서 그렇지 하라면 잘할 수 있는 개인기였는데 말이지요. 결국 왕복 6차선의 큰 길들이 교차하는 교차로에서 만삭의 슬초맘은 후다닥 날쌔게도 무단횡단을 감행했습니다. 지나가던 차량의 운전자들은 교차로에 뛰어든 이 머리에 꽃 꽂은 만삭의 동양 아줌마의 모습에 잠시 경악을 하는 듯 하였지만, 솔직히 제가 이렇게 된 것이 제 탓입니까? 사방이 다 고장난 신호등들을 잘 정비해 놓지 않은 자기들 잘못 아닙니까? “그러게 신호등 정비를 잘 해 놓았어야지, 왜 만삭 임산부가 무단횡단을 하게 만드냐고~~” 라고 꿍시렁대며 뒤를 돌아보는데, 그런데... 그런데... 아까 그 문제의 횡단보도 쪽으로 어떤 사람이 다가가더니 신호등에 달려 있는 무엇인가를 누르고 있네요. 그러자 그 죄다 고장나 있었음이 분명했던 그 신호등들에 초록불이 들.어.오.네.요. 우아하게 길을 건너는 그 행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슬초맘은 그날 밤 혼자 괴로와하며 이불 킥을 했더랬습니다.

서유견문록


“허허... 나는 모르는 일이세...” 라고 시치미를 떼며 고상하게 지낼 수 있는 이민 7년차에 접어든 슬초맘이 굳이 이 낯 뜨거운 ‘서유견문록 제 1장’을 들추어 읽어드리는 이유는, 바로 이제 갓 이민을 와 밤마다 혼자 이불킥을 하고 계시는 이민 초보생 여러분들께 다들 모르긴 몰라도 시작은 대충 이러했으니 초장부터 낙담치 말고 용기를 내시라 응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민 생활이 익숙해 보이는 그들도, 단지 그들의 ‘서유견문록’이 조금 더 빨리 발행되었다는 것 외에는 다를 것이 없으니까요!


그런데 이렇게 외치고 보니 스스로를 살짝 돌이키게 되는군요. <슬초맘의 서유견문록 제 1장>을 써 내려가던 그 때의 그 씩씩했던 마음으로만 계속 나아갈 수 있다면 부끄러울 것도 없고 무서울 것도 없는데 오늘의 저는 왜 이렇게 작은 문제 앞에서 움츠리고 있는 것일까요? 이민 7년차인 지금 저는 단지 제 7장을 써 내려 가고 있을 뿐인데 말이지요. 비록 지금 독자는 나 하나 뿐이지만, 이 책이 20장이 될 그 즈음엔 많은 이들과 함께 나누게 될 이야기들이 많이 쌓여 있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슬초맘은 오늘 하루도 씩씩하게 그리고 새로운 마음으로 새로운 도전에 임해 보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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