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캐릭터 연이어 품은 화양연화
단아한 이미지와 달리 옹골찬 연기력을 품은 한지민에게 2018년 여름과 가을은 30대 배우의 ‘리그’에서 화양연화임이 분명해 보인다. 드라마 ‘아는 와이프’에선 두 아이의 독박 육아와 일에 지쳐 드세진 서우진을, 영화 ‘미쓰백’에선 부스스한 머리에 빨간 립스틱을 바른 전과자 백상아로 변신해 선연한 캐릭터사를 연이어 그려간다. 개봉(10월11일)을 앞두고 나눈 인터뷰를 1인칭 시점으로 정리했다.
◆ ‘밀정’과 ‘일수가방’이 맺어준 인연
영화 ‘밀정’ 뒤풀이 때 송강호 선배 단골 맥주집에서였다. 그날 난 검은색 맨투맨 티와 검은색 슬랙스 차림으로 가게에 들어갔다. 그때 ‘미쓰백’ 시나리오 트리트먼트 작업을 끝내고 스태프들과 맥주를 마시러 온 이지원 감독님이 날 보셨다고 한다. 일수가방처럼 보이는 파우치를 팔 사이로 낀 채 등장한 첫 모습에서 백상아가 절로 포개졌단다. 일행에게 “저 사람 누구냐?”고 물었더니 “감독님이 ‘됐어’라고 한 한지민이잖아요”란 대답에 화들짝 놀라셨다.
사연인즉, 백상아 캐스팅 단계에서 내가 물망에 올랐다가 소속사와 초기 조율이 잘 되지 않자 “한지민? 됐다고 해”라며 나를 폐기처분(?)하고 다른 여배우들을 캐스팅 라인업에 올려놓았다는 비하인드다. 새벽에 시나리오를 읽었는데, 무작정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동학대 문제에 분노가 일었고, 백상아가 안타깝고 측은하게 느껴졌다. 이후 감독과의 첫 미팅에서 ‘그날’에 대한 풀 스토리를 들었다. ‘미쓰백’, 백상아, 이 감독님은 내게 운명처럼 다가왔다. ‘밀정’과 ‘밀수가방’이라는 매치메이커를 통해.
◆ ‘가장 힘들었던’ vs ‘가장 인상적인’ 장면
영화 후반부에 공사장에서 지은(김시아)의 계모인 미경(권소현)과 싸우는 장면이 가장 힘들었다. 무려 3일에 걸쳐 촬영했다. 승용차에서부터 악에 받혀 때리고 걸어가는 신이었고 감정선이 클라이맥스로 치닫는 대목이었다.
여자끼리의 싸움은 그간 작품에서 잘 다뤄지질 않았기에 막연했다. 감독님은 막연히 “날 것 같은 여자들의 싸움이어야 한다”고 주문했다. 소현이랑 둘이서 열심히 유튜브를 찾았다. 너무 무서웠다. 처음 시도한 건 “그냥 싸워보자”였다. 연출부의 예상을 넘어 ‘퍼벅퍼벅’ 막 치고받았다. 여자 싸움엔 머리채 잡기와 싸대기 때리는 게 보편적이다. 서로 멍이 많이 들었다. 주먹을 사용하기도 했는데 가짜 같은 느낌, 느와르의 느끼함이 생겨서 피했다.
자신의 인생만으로도 벅찬 상아가 우연히 골목길에서 학대받는 아이 지은과 만난 뒤 소소한 인연을 맺어가지만 그 무게가 버거워 결국은 모른 척 발길을 돌린다. 하지만 도저히 외면할 수 없어 한달음에 달려가 골목 코너를 돌아서 선 저 멀리 있는 지은과 마주하는 장면이 가장 인상적이다. 쌀쌀한 밤에 아무도 없는 공간에 우두커니 서있는 상아도 자신처럼 엄마에게 버림받은 뒤 세상에 내몰려서 저렇게 서있지 않았을까. 되돌아보고 싶지 않은 과거, 끌리는 마음을 부정하고 싶었음에도 본능적으로 뛰어가는 장면이라 찍고도 진하게 남아있었다.
지은을 모텔로 데리고 가 씻기고나서 재운 뒤 자신에게 헌신적인 형사 장섭(이희준)에게 전화해 처음으로 8년 전 이야기를 꺼내며 토해내듯 우는 장면에선 눈물이 너무 흘러 대사를 제대로 처리할 수 없었다. 이 인물이 너무 아파서 따뜻하게 안아주고 싶었다. 스태프들이 모두 철수하고 난 뒤에도 홀로 남아 눈물을 주체하질 못하고 있는데 감독님이 어깨와 등을 토닥여주셨다.
◆ 불편한 진실
아동학대 현실을 다뤄 마음이 편치 않을 수도 있는 영화다. 이런 뉴스를 접할 때마다 아이들을 사랑하는 나 역시도 불편함을 느끼고 크게 분노한다. 하지만 우리는 10분 뒤 잊어버리곤 한다. ‘미쓰백’이 불편한 현실의 아픈 이야기이지만 나도 지은이가 될 수 있고, 내 옆에서 일어날 수도 있는 일들이다. 아무리 이런 작품이 나오고, 뉴스에서 사건을 전달하는 것에 그친다면 무용지물이다. 우리 아이들에게 조금은 나아진 현실에 되려면 법제도 정비, 보호시설 확충, 가해자 처벌 강화 등에 대한 관심이 지속돼야 한다.
이 영화를 통해 ‘아동학대가 없어져야 합니다’란 메시지를 전한다기보다 보호받지 못한 아이들의 성장한 모습을 상아가 갖고 있고, 연대를 통해 우리가 느끼는 감정이 길게 이어질 것이라고 여겼다. 어딘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배우로서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관객들이 부모 된 마음으로 봐주셨으면 한다.
◆ 나의 멘토 노희경
누구인들 상처 없이 살아갈까. 그러면서 누군가를 통해 치유를 받곤 한다. 영화 속 미쓰백과 지은이처럼. 나 역시 마찬가지다. 내가 확 변한 터닝포인트를 꼽으라면 주저 없이 노희경 작가님을 말해야 할 것 같다. 드라마 ‘빠담빠담’(2011)을 하기도 훨씬 전인 2007년부터 질병과 기아에 시달리는 지구촌 아이들을 지원하기 위한 거리모금 행사에 노희경 작가님이랑 늘 함께해왔다. 그때는 배우와 작가로 만난 게 아니라 문화예술인 수행단체 길벗 회원 사이였다.
말을 꺼내기도 전에 눈물부터 나왔을 만큼 여러 가지로 힘들었던 시기에 작가님이 나와 많이 소통해주셨다. 선생님이 보기에 내가 너무 나약하고 불안정한 상태였는지 법륜스님이 진행하시는 프로그램에도 참여하고 그랬다. 가르침을 주려하기 보다 자신의 과거 얘기를 많이 해주면서 "우리 이렇게 해보자"라고 용기를 주신다. '아는 와이프' 때는 "너가 신나게 노는 것 같아서 너무 좋다"고 자신의 일처럼 기뻐해주셨다.
◆ 서우진 그리고 백상아
비슷한 드라마 캐릭터로 인해 갈증이 있었다. 물론 비슷한 역할이어도 내가 어떻게 풀어 가느냐에 따라 달라지지만, 어느 순간부터 작품 고르는 게 어려워졌다. 드라마는 한계가 많다보니 영화에서 그런 갈증을 풀어보려 했다. 분량이 적더라도 의미 한 가지 정도만 있다면 선택을 해보자 해서 ‘밀정’ ‘두개의 빛’ ‘그것만이 내 세상’ ‘허스토리’ 등에 출연했다.
방송계 트렌드인 판타지 장르에서도 캐릭터에 있어서만큼은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순간에 만난 게 바로 ‘아는 와이프’였다. 유부녀 캐릭터라 소속사에서도 놀랐다. 하지만 내 또래 친구들은 육아를 하고 있고, 난 언니의 육아에도 참여했다. 어색하질 않았다. 서우진이 극중 남편을 향해 욕을 섞어가며 극단적으로 화를 내지만 현실에서도 애 둘을 키우는 엄마들은 분노게이지가 단계 없이 올라가는 경우가 많다.
그랬기에 서우진은 드라마에서 풀지 못했던 나의 숙제를 해결해준 캐릭터다. 고등학생, 싱글 직장여성, 유부녀 모습을 다양하게 보여줄 수 있어서 좋았다. 오랜 시간 쌓인 체증을 풀어줬기에 즐기면서 할 수 있었던 인물이다.
‘미쓰백’은 앞으로 배우 한지민의 행보에 있어 용기를 얻은 작품이자 캐릭터다. 그동안 한 작품, 한 작품 다른 의미로 선택해왔으나 향후 약간의 주저함이 생길 때 굉장히 큰 용기가 될 거 같다.
◆ 후회·집착형에서 현재충실형으로
나의 좌우명은 ‘현재를 충실하게 살자’다. 예전의 난 후회, 과거에 대한 집착으로 몸살을 앓았다. 다가오지도 않은 미래에 대해 걱정하기 일쑤였다. 그런데 노희경 선생님이 “여기에 깨어있으라”고 항상 말해주셨다. 지금 대화하는 상대에 대해 공감하려 노력하면서 변화했다. 나의 직업에서도 마찬가지다. 예전엔 연기와 나는 완전히 별개였다. 그래서 찰영 현장에 갈 때 준비동작이 많았다면 지금은 삶의 일부처럼 받아들이려 한다. 나의 삶을 온전히 나의 것으로 만들어가려 애쓴다.
앞으로 수많은 말을 들으며 배우로서 커리어를 쌓아나갈 텐데 나의 자존감이나 신념이 흔들리면 안되겠다는 생각이다. 특히 30대이다 보니 기준점을 잘 세우는 게 필요해 다져가는 중이다. 과거에 비해 한지민은 조금은 더 단단해졌고, 나이가 들면 더욱 유연해지지 않을까. 미래와 다음 작품이 설렌다. 김혜자 선생님이 주인공인 JTBC 드라마 ‘눈이 부시게’를 준비 중이다. 선생님과 공연하는 것만 해도 영광이다. 이 작품을 잘 마무리하는 게 얼마 남지 않은 올해의 소망이다.
사진=BH엔터테인먼트 제공
에디터 용원중 goolis@slist.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