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는 차갑게 가슴은 뜨겁게
'내가 살인범이다'(2012)로 강렬한 존재감을 남긴 정병길 감독이 5년만의 신작 '악녀'로 돌아왔다. '악녀'는 여성 원톱 액션영화를 '어려운 도전'으로 여기는 주변의 시선에 굴하지 않고, 남들이 하지 않는, 새로운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열정으로 탄생시킨 작품이다.
'악녀'에서는 남다른 정성이 묻어난다. 액션 신은 기존 레퍼런스 참고 없이 창의적으로 만들어 보다 신선하고, CG를 적게 사용하고 대부분 실사로 채워 리얼리티를 살렸다. 이런 파격에 지난달 열린 제70회 칸국제영화제에서도 '악녀'에 대한 호평이 가득했다.
- 칸영화제에서의 외신 반응이 뜨거웠다고 들었다.
반응이 너무 좋아서 놀랐다. 왜 이렇게 좋아하는 걸까? 좋으면서도 궁금했다. 외신 기자들은 한국영화에 대해서나, 액션 디자인 과정과 촬영 방법에 대한 질문을 많이 했다. 우리가 새롭다고 느꼈던 장면을 그들 역시도 신선한다고 느끼지 않았을까 싶다.
- 1인칭 시점으로 찍은 오프닝 장면이 화제가 됐다. 슈팅게임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VR 단편영화를 준비하며 관련 공부를 했던 적이 있는데, 결국 프로젝트가 진행되지 않았다. 그때의 아쉬움과 1인칭 시점에 대한 고민으로 오프닝 시퀀스를 만들었다. 배우의 얼굴이 나오지 않으니 많은 감정을 실을 순 없지만, 궁금증을 유발시킬 수 있는 신. 즉 오프닝에 쓰면 좋을 것 같았다. '왜 숙희가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이게 됐을까' 그런 고민을 하게끔 하는 장치인 거다. 슈팅게임을 떠오르게 하지만 총보다는 칼싸움만이 지닌 근접한 거리에서의 사투, 뿜어져나오는 피 같은 것들에 중점을 두고 디자인했다.
- 웨딩드레스 액션, 비녀 액션의 경우 여성 캐릭터에 특화된 부분 같더라.
가장 행복한 순간에 사람을 죽이라는 지령을 떨어뜨리면 어떨까 생각했다. 새 남자를 만나 결혼하는 상황인데, 숙희는 임무를 처리해야 하니까. 또,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가 스나이퍼 총을 든 비주얼을 보고싶기도 했다. 관객들도 신부의 마음으로 보며 영화적 쾌감을 느낄 것 같기도 했고.
비녀 액션의 경우, 극중 상황에 따라 룸살롱을 배경으로 삼을까 하다가 그보단 요정집에서 비녀를 쓰면 여자만의 무기가 되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다 뒤로 갈수록 도끼를 쓰는 등, 투박한 느낌을 주려고 했다.
- 여자 킬러 양성소의 설정은 어떻게 시작됐나.
여자만 전문적으로 자라게 하는 설정이다. 실미도가 존재했다고 하는데, 남자만 있진 않았을 것 같다. 그런데 겉으로 드러나진 않았으니 살인명령이 부여되는 여자 스파이를 키워내는 비밀의 공간도 있지 않을까 상상해봤다.
- 숙희는 남자만 죽이는데 이유가 있나.
딱히 의도가 있는 건 아니었다. 처음부터 나쁜 여자 캐릭터를 설정하지 않았고, 숙희란 인물을 더욱 도드라지게 하려고 그랬던 것 같다. 중상(신하균)의 킬러 훈련소에서도 여자는 숙희밖에 없으니까.
- 숙희가 결국은 모성 때문에 무자비해졌다고 생각돼서 아쉬운 부분도 없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영화 속 여성 캐릭터가 아직까지 가진 한계같기도 했다.
숙희가 처음 싸웠던 이유는 남편을 잃은 복수를 하기 위해서였다. 더는 살 마음이 없었고 권부장의 제안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결국은 은혜 때문에 살게 된다. 아이는 모성애적 면도 있지만, 내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란 점에서 살아야겠단 생각을 하게 만들어주는 부분이었다.
- 김옥빈, 김서형, 신하균은 '악녀'를 단단히 잡아주고 성준(현수)이나 손민지(민주)가 관객에겐 새로운 얼굴이 아닐까 싶다. 어떻게 캐스팅했나.
우연히 SBS '상류사회'를 보게 됐는데 성준의 연기 느낌과 이미지가 마음에 들었다. '악녀'의 현수 역에 어울리겠다 싶었다. 손민지 배우는 아는 매니지먼트사의 소속사 배우라 알게 됐는데, 액션스쿨에 운동을 하러 왔더라. 내가 아는 배우들 중 가장 민주 캐릭터에 어울리는 귀여운 마스크, 긴 팔다리를 갖고 있어서 오디션을 거쳐 캐스팅하게 됐다.
- 액션 장면에서 꽹과리, 북 소리가 쓰인다.
처음엔 칼부림 신에 꽹과리를 사용해 정신없는 굿판같은 느낌을 줘 볼까 싶었다. 그런데 악기 자체의 힘이 컸다. 꽹과리가 모든 소리를 뚫고 나가는 악기라고 하더라. 이 영화에 쓰이면 심장박동 소리같은 느낌을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 '한나' '루시' 같은 영화가 떠오르기도 한다. 참고하거나 주의했던 작품이 있나.
결국은 그 작품들도 '니키타'를 연상시킨다. 나 역시 '니키타'를 너무나 좋아했던 영화이기 때문에 해당 이미지를 배제할 수 없어 오마주, 베이스를 느낄 수도 있을 거다. 그렇지만 액션신만큼은 비슷한 느낌이 날까봐 참고하지 않았다. 새로운 액션을 만들기 위해 실제로 부딪치며 앵글을 잡았다.
- "칼싸움을 소재로 한 과거 단편영화가 '악녀'의 초석이다"는 말을 했다. 어떤 영화인지 소개해 준다면.
25살 때 액션스쿨에 가서 처음 만든 영화다. 스물다섯이 뭘 알겠나. 앞으로 뭘 해야 할까, 영화감독, 배우, 스턴트맨, 미술감독… 여러 생각을 하던 땐데 제작, 촬영, 주연, 연출, 콘티를 혼자 맡아보며 스스로를 시험해봤다.
그때 참여했던 친구들이 '악녀'의 미술감독이 됐고 배우로 나온 경우도 있다. 말도 안되는, 후진 영화인데 '다음엔 이것보단 잘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완성도나 예산 같은 부분에선 비교할 수 없지만, 그때의 첫 도전처럼 '악녀' 역시도 맨땅에 헤딩하는 느낌이라 초석이란 생각이 들었다.
- 계속해서 액션을 선보이고 있는데, 전작과의 딜레마나 어려운 점이 있다면.
딜레마는 아직까진 모르겠다. 오히려 찍고 나선 아쉬운 게 많고 더 잘 찍어야겠다는 생각만 있다. '다음부턴 이렇게 하지 말아야겠다'면서 아쉬운 점을 체크한다. 시간이 없어서 타협한 부분들도 있고, 아니면 정말 몰라서 미처 못한 부분도 있다. 알면서 못했던 부분은 화나고 억울하지만, 몰라서 못한 건 다음엔 보완하면 된다.
어떤 때는 오늘 찍고 실수했던 부분을 내일 또 찍는 식으로, 하염없이 찍으면 퀄리티가 높지 않을까 그런 꿈도 꿔 본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고, 내가 생각하는 연출력이란 주어진 시간과 예산에 맞게 잘 해내는 것도 포함된다.
그래도 만족도가 너무 높은 것보다 이런 쪽이 나은 것 같다. 너무 잘 만들면 다음 영화를 만들기 싫을 것 아닌가.
- 액션영화 감독으로서의 즐거움은 무엇인가.
생각을 스크린에 옮겼을 때, '된다!'고 느끼는 그 순간. 신기한 장면을 찍어냈을 때의 쾌감이 있다. 사실 현장에선 긴장이 많이 된다. 부상의 위험도 있고 많은 인원과 예산이 필요하고, 그만큼 책임도 크니까.
- 평소 현장에서의 스타일은.
'머리는 차갑고 가슴은 뜨겁게' 찍으려 한다. 조용한 스타일이다. 촬영 현장은 소리지르는 사람 없이, 화내는 사람 없이 차분하면 좋겠다. 그래야 어떤 것이 최선의 결정인지 빠르게 판단할 수 있고, 하나라도 좀더 생각해낼 수 있으니까.
촬영기간 때는 아예 술을 안 먹으려 한다. 다음날 촬영이 힘들어지면 놓치는 부분이 분명히 생긴다. 물론 스태프들이 먹자고 할 땐 그것도 감독의 일일 수 있으니 한 두 잔만 먹기도 한다. 평소에 비하면 거의 안 먹는 수준이다.
- 다음 작품도 액션물일까?
다 열어놓고 생각하고 있다. 코미디를 할지, 멜로를 할지, 공포도 관심이 있다.
- 그중 확률이 높은 건?
액션이다.(웃음)
사진=라운드테이블(지선미)
에디터 오소영 oso0@slist.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