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지고 다치더라도 도전하고 싶다"
'박열'의 이제훈은 낯설다. '건축학개론'의 수줍음 많은 새내기도, '시그널'의 집요한 프로파일러와도 다르다. 풀어헤친 긴 머리에 먼지를 뒤집어쓴 듯한 얼굴과 그 성질처럼 거친 옷차림까지. "이렇게까지 해도 되겠냐"며 감행한 분장은 배우 이제훈을, 박열이 살았던 일제강점기로 그대로 데려다 놓았다.
28일 개봉하는 영화 '박열'은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에 맞서 항거한 아나키스트 박열과 그의 연인이자 동지 가네코 후미코에 대한 작품이다. 최근작에서 부드럽고 귀여운 매력을 보여줬던 이제훈이지만, '박열'에선 보다 거칠고 뜨거운 청춘을 느낄 수 있다.
실존인물 '박열'에 대해 얘기할 땐 한없이 진지해지다가도, 작은 칭찬에도 소년같은 얼굴이 되어 환하게 웃는 이제훈과의 인터뷰를 8가지 키워드로 정리했다.
# 이준익
예전부터 이준익 감독님과 작업하고 싶었다. 전작(tvN '내일 그대와')의 촬영 후 준비기간이 넉넉하지 않았고, '박열'에서의 연기가 부담되는데도 출연하게 된 건 감독님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다. 이준익 감독님은 배우의 표현을 모두 받아주시고 전혀 강요하지 않는 분이다. 마음껏 해보라고 장을 열어주셔서 과감하게 표현했고 그러다보니 오히려 스스로를 누그러뜨려야 하는 부분도 있었다. 박열은 실존인물이다보니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은지 메시지 전달이 가장 중요했다. 순간순간의 집중이 상당했고 고민이 여타 작품보다 깊었다.
# 일본어 연기
마무리한 작품의 대사는 곧 잊어버려서 완벽히 외우지 못하는 편인데, '박열'의 일본어 대사는 지금 해 보라고 해도 바로 나올 정도로 연습을 많이 했다. 한 사람의 녹음본만 들으면 부족함이 있을까봐 여러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틈만 나면 대사를 뱉으며 연습했다. 일본어를 전혀 할 줄 못하는데, 대사에 감정까지 담아 표현해야 하니 도전으로 느껴졌다. 일본인들이 '박열'을 봤을 때 이질감을 느끼지 않길 바라면서, 촬영 때 감독님이 오케이를 외쳐도 일본어 선생님들이 만족하는지를 더 확인했다.(웃음) 마지막 일본어 장면이 끝났을 땐 기쁨의 소리를 질렀다.
# 최희서
희서가 주연이 처음이라 많이 부담됐을터라 안심시키고 이끌어줬어야 했는데 오히려 내가 도움을 많이 받았다. 똑똑한 친구고 정말 좋은 배우다. 영화를 대하는 태도가 마음에 들고, 좋은 배우와 작품에 대한 이야기들을 함께 끊임없이 할 수 있어서 현장이 지루하지 않았다.
내가 희서에게 의지했듯, 박열과 후미코 역시도 마찬가지다. 최희서가 연기한 후미코 없이는 박열을 설명하기 부족하단 생각이 든다. 박열이 최종공판까지 가는 과정에서 표현과 억압에 굴복하지 않았고, 성장할 수 있었던 건 후미코가 있어서였다. '박열'을 보러온 관객들은 극장을 나설 때 최희서란 배우를 굉장히 궁금해하지 않을까.
# 애드리브
자경단이 감옥에까지 쳐들어와 조선인들을 죽이려 하는 장면이다. 자경단이 "조선인이냐"고 물었을 때, 대본엔 박열이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 것으로 돼 있었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수 없겠더라. 자경단의 창을 뺏고 욕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감독님도 "네 말이 맞는 것 같다"고 하셔서 그렇게 했다. XX XX!(웃음) 그 욕 때문에 심의가 걱정됐는데 다행히 12세 관람가가 나왔다.
# 나와 박열
나 역시 기성세대가 만든, 사회의 권력에 대한 불만이 내재적으론 있지만 표현에 있어선 부족하다. 박열은 실제 행동으로 옮긴 사람이기에 존경스럽고 현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로서 부끄러울 뿐이다. '박열'을 찍으면서는 앞으로는 내 목소리가 작을지언정 표현돼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됐다. 이런 목소리가 한 명 한 명 늘게 된다면 더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 나의 20대
연기하고 싶어서 학원에 다니고 극단에 찾아가고, 뮤지컬도 해보고…. 연기를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가면서도 이 직업에 대한 고민도 동시에 했다. '이 직업은 날 찾아줘야 할 수 있는 일인데 내가 기다리기만 하면 안 될 것 같다', '힘든 길을 이겨낼 수 있을까', '효도하고 싶은데 연기를 하면서 가능할까' 그런 걱정을 했다. 그럼에도 그 꿈이 오히려 커져서 25살에 학교에 새로 입학해(한예종) 정말 열심히 다녔다. 뒤처져 낙오자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시기를 놓치기 싫었다. 다들 20대 초반 나이에 입대하는데, 그때 군에 가지 않고 꿈만 봤던 이유다.
# 청춘
청춘을 남기는 작품을 한다는 게 영광이다. 28살에 교복을 입었던 '파수꾼' 때도 이질감이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다행히 잘 넘어갔었다.(웃음) 앞으로 30대 중후반, 40대를 연기하면서 '이제훈이 좀더 성숙해지고 나이가 들면서 이런 모습도 보여줄 수 있구나'란 걸 보여드리고 싶다. 난 청춘을 연기하는 게 정말 좋은데… 하지만 40대, 50대에도 청춘을 연기하고 싶은 건 욕심이겠지?
# 나
난 내가 어떤 사람이라고 말을 잘 못하겠다. 그래서 누구든 연기로 표현해낼 수 있는 이 일을 하는 것 같기도 하다. 분명한 건 안정적인 길은 재미가 없다는 거다. 깨지고 다치더라도 계속 도전하며 날 발견해나가고 싶다.
사진=메가박스플러스엠
에디터 오소영 oso0@slist.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