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축구공
남아공 월드컵을 앞두던 2010년 봄, 증산동에서는 또 하나의 월드컵이 열리고 있었다. 우리 집은 공이었다. H사와 G사가 앞다투어 우리 가족의 신년운수를 기원하고 유람선에 태운 채 호화로운 음식을 가져다주었다. 2차선 도로의 위로 청홍의 현수막이 아첨 실력을 겨루었다. 이웃들은 모였다 하면 두 선수를 두고 입씨름을 해대었다. 나와 동생은 판촉원이 나눠 준 책자 속 조감도를 보고 미래의 집과 각자의 방을 그린다. 어느 선수의 발에 가서 닿을까, 우리는 H사에게 기회를 주기로 뜻을 모은다. 부모님도 동의했다. 앞집 할머니는 반대인 듯하다. 윗집 아주머니는 동의한 듯하다.
그 해 여름, 아빠와 내가 상암월드컵경기장을 찾은 날은 16강 우루과이전이 열리던 날이었다. 폴리에틸렌 비옷을 뒤집어쓴 군중들이 전광판을 응시했다. 전광판 속에서 선수는 공을 찬다. 같은 색의 선수가 공을 받는다. 다른 색의 선수는 공을 뺏는다. 골대에 공을 넣으면 선수들은 얼싸안고 바람 빠진 공은 교체된다. 몇 번 반복하자 끝이 난다. 자리를 우르르 나서는 사람들은 옆 사람에게, 그 옆 사람은 또 앞사람에게 선수들의 잘잘못을 가려내어 주장하기 바빴다. 그 사이에서도 축구공은 공이었다.
4. 털파리
붉은등우단털파리를 아는가. 염치없게 정식 명칭을 놔두고 '러브버그'라는 예쁜 별명으로만 불리는 데에는, 매번 짝짓기 하는 상태로 나타나 우리의 눈꼴을 시리게 한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얼마 전까지 해도 정식 명칭이 없었단 사실도 한몫할 것이다. 2년 전부터 여름마다 서울과 경기에서 기승을 부리는 그것들에게 과학자들은 이름을 붙여주었다. '러브버그'들에게 도대체 어디서 이렇게 튀어나왔냐고 물어볼 수 있다면, 그것들은 답할 것이다. "나의 고향과 본적은 은평구 봉산이오." 내 뒷산 봉산이 러브버그들의 선산이었던가. 다시금 언제서부터 번성했느냐 물어보면, 또 답한다. "때는 4년 전, 증조부님(의 증조부님의 증조부…)을 못살게 굴던 대벌레놈들이 갑자기 많아지니, 댁처럼 다리 둘 달린 것들이 와서 약을 뿌려 싹 쫓아내는 것이라. 우리 증조부님, 그제야 살 맛나니 당신께서 마누라 업고 놀지 않고 배기겠는고." 이번엔 대벌레와 연관이 있나 싶어 찾아가 물으면 "몹쓸 다리 둘 달린 놈들" 따위의 욕만 듣고 문지방도 못 밟기 십상이다. 대벌레 살던 봉산에 찾아가면 빼곡한 편백나무 숲이 있다. 이때 스쳐가는 위화감 때문에 자칫 실례되는 물음이 튀어나올 수 있다. "편백이 아닌 이들은 왜 그루터기만 남고 젊은 편백들만 서있나요?" 물탱크에서 물을 받아마시며 듣고 있던 젊은이가 대표로 답한다. "때는 6년 전, 가지 열 달린 것들이 우리를 여기로 옮겨 심었어요. 원래 살던 나무들은 알 게 뭡니까. 여긴 겨울마다 춥고 목말라 죽겠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을 뿐이에요." 러브버그들에 대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지만, 연관성은 추측해 볼 법했다. 하지만 가지 열 달린 것들을 찾아 녹번고개 위 은평구청으로 찾아가 묻는다면 먼저 모른 체를 할 것이다. 그러면서 답할 것이다. "때는 10년 전, 구민들의 생활환경을 위해 오래되고 병든 나무를 정리하고 풍부한 피톤치드가 나오는 '편백나무 치유의 숲'을 조성하기 시작했습니다."
10년 전으로 거슬러 가봐야 한다. 내가 고등학교에 진학하던 해이자 브라질 월드컵이 열리던 해였다는 사실은 불필요하니 넘어가자. 2014년은 증산2구역의 사업시행인가를 앞두고 붉은 깃발이 온 동네에서 기승을 부리던 해였다. '사업'이라 함은 '주민'들의 생활환경 개선을 위해 오래되고 낡은 집을 정리하는 사업이고, '주민'이란 정리하는 동안 떠났다가 다시 돌아올 능력을 갖춘 주민을 말한다. 아랫집 202호 아저씨는 능력의 기준선 아래에 있는 집이었다. 거친 구릿빛으로 탄 피부와 듬성듬성 자란 수염처럼 짧게 깎인 머리털을 가진 그를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다면 누구든 인사를 걸기 어려울 수 있겠다. 하지만 그러기도 전에 먼저 인사를 건네오던 아저씨였다. 아저씨는 붉은 깃발을 사람들에게 나눠주기 시작했다. 옥상에는 깃발을 여러 개 꽂아둔 탓에 우리 아파트가 마치 전초기지가 된 것 마냥 보였다. 기준선 아래의 모든 집에는 그것이 휘날렸다. 아저씨는 구청의 가지 열 달린 것과 같은 부류의 사람이었다. 주변을 바꾸고 싶어 했다. 그에게 다시 가서 묻는다면 이렇게 답할까. '저 뒷산에 밑동만 남은 참나무, 싸늘한 대벌레가 되긴 싫었다.' 하지만 아저씨는 힘이 없었고 G사는 힘이 있었다. 4년이 지나 철거 현장에 다시 찾아갔을 때 사람은 찾아볼 수 없는 동네였다. 하지만 깃대만은 남아있었다. 10년이 지나 서울에 퍼지는 붉은등우단털파리는 202호 아저씨의 붉은 깃발이었다.
5. 묘비석
증산동은 죽었다. 체온으로 유지되던 도시가 식어가는 과정을 목격한다면 이보다 적절한 표현은 있을 수 없다. 세계가 영원하지 않음을 배워 알던 나이였다. 영영 떠날 수 있다면, 스쳐갔던 장소 중 하나로 기억될 수 있다면 조금 더 담담해졌을 텐데, 나는 돌아오리라 약속받았다. 과거에 이어 나의 미래까지 담보하려는 그곳에, 생각하고 생각했다. 아니, 생각이 났다. 이삿날 이후에 이어진 일련의 산책들은 그 생각을 피할 수 없었음에서였다. 벌레의 시체가 분해되는 광경은 징그럽고도 역겹다. 죽기 전까진 분해자들이 내 몸에 찾아와서 좋을 일은 없을 테니 마땅한 혐오다. 그러나 이마저도 시간이 지나 무뎌질 혐오다. 만찬을 즐기고 난 자리에 아무것도 없음만이 있음을 보고 나면 존재가 형상의 변화일 뿐이라는 이치에 담담해지지 않을까.
첫 번째 산책. 넓적한 면마다 경쟁적으로 붙여진 이삿짐센터 스티커들이 얼마 전 이곳 사람들―나를 비롯한―의 삶에 거대한 분절이 있었음을 상기시켜 주었다. 도시의 형체는 여전히 단단했다. 대문 앞마다 온갖 폐기물이 쌓여있던 것을 빼면 말이다. 당사자의 내밀한 삶을 엿볼 수 있다는 공통점에서 유흥가 거리의 예사로운 토사물을 연상시키는 풍경이었고 여전하고 마땅한 혐오에 젖어들었다.
두 번째 산책. 도시의 형체는 녹아내리고 있었다. 관리되지 않은 도로에 승용차 대신 중장비만이 오고 갔다. 시신을 흙으로 되돌려 보내기 위한 분해자들이었다. 분해되어 기억 속 형상과 유리된 그것은 이미 다른 무언가였다. 한때 유리로 막혀있었을 공허한 사각구멍은 백골의 안면부였으며, 목재가구의 파편 틈새로 자라나는 잡초는 소소한 장엄함이었다. 즐겨 찾아가던 구멍가게가 절반으로 쪼개져 너부러진 모습을 봤을 때 느껴야 할 상식적 그것과는 먼 감상을 맺게 되던 이유는 무엇일까. 정갈한 것들은 어질러질 수많은 불안을 안고 있는 반면, 무질서한 그곳에서 느낀 평온은 부서지고 엎지러지고 어질러진 것은 돌이킬 수 없다는 진리로부터 야기된 것이기도 했다.
세 번째 산책. 도시의 형체는 녹아있었다. 가림막 뒤로는 흙뿐이었다. 희한하다. 내가 살던 엘지그린아파트만은 굳건히 서있었다. 그것도 아주 온전하게 서있었다. 엘지그린아파트가 증산2구역의 철거사무실로 지정된 덕분에 나는 당시 증산동 원주민 중 유일하게 과거의 집에 몰래 들어가 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동생이 그린 낙서도, 책꽂이 아래 개미군단의 보금자리도 그대로였다. 너무나 그대로여서 바깥과 다른 시간선을 달리고 있다는 착각마저 들었다. 마치 그것이 이 아파트의 존재 목적이라도 되는 양 필사적으로 잊혀지던 과거를 상기했다. 그 순간 엘지그린아파트는 죽은 것을 기억하는 묘비석이었다. 피라미드 다음으로 큰 묘비석일 것이다. 인과의 순서가 헷갈리기 시작했다. 죽음이 두려워 묘비를 만들게 된 것인지, 묘비를 만들다 보니 죽음을 두려워하게 된 것인지. 갑자기 후자에 손을 들어주고 싶었다. 벌레의 죽음과는 달리 사람의 죽음은 묘비 아래에 본모습을 가린 채 삶의 시간으로의 허구적 회귀로 되풀이되지 않던가. 묘비가 사람의 죽음을 변화가 아닌 종료 내지 완료로 여기도록 만든 것이다. 아파트를 내가 보게 됨으로써 증산동의 죽음도 전자보다는 후자에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다. 머지않아 저 묘비마저 해지고 부서질 거란 예정된 사실만이 위안이라면 유일한 위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