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 C.S.Lewis -

by 에코 Apr 11. 2019

#03. 이모는 딸이 있으면 좋겠데

성평등 생각하기 시리즈

    #03. 이모는 딸이 있으면 좋겠데


    이모가 하는 말에는 항상 레퍼토리가 있다. 주로 나를 간접적으로 유턴해 엄마에게 향하는 대화 방식이다. '오늘도 00이 이쁘구나.' '어휴 (엄청 예쁜) 배우 누구를 닮았어.'(미리 말하자면 그 배우에게 민폐가 될까 봐 이름을 적지 않았고, 전혀 닮지 않았다.) '결혼 안 하고 그 나이에 아깝게 뭐하니.' '넌 딸이 둘이라 좋겠다.' 거기에 자신의 결혼한 무심한 두 아들과 며느리에 대해 한탄한다. 그리곤 최종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딸이 있었어야 했어.'


    이런 이모의 대화 테크닉이 일정한 것에는 짐작 가는 이유가 있다. 이모는 누구에게 거절을 제대로 못하는 성격으로, 무엇을 말하기 전, 상대방의 기분을 띄우기 위해 칭한 함과 동시에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거다. 이모는 오랜 기간 사모님 소리를 듣는 서울 생활을 하며 약간 미묘하게 흔적만 남은 사투리로 대화하는 상대방에 대해 자신의 눈엔 칭찬할만한 것을 찾아 칭찬한다. 후에 자신이 털어놓고 싶은 뒷이야기들, 어디서 말하지 못하고 흉보고 싶은 마음을 자신의 동생인 엄마에게 털어놓는다. 이모에게 가장 큰 칭찬은 그 사람의 자식을 칭찬하는 것이고 대화 대상인 엄마의 자식인 나를 칭찬하는 것이 일의 발단이다.


    워낙 어렸을 때부터 들어온 레퍼토리라 옆에서 대꾸하긴 애매한 그 칭찬들이 처음엔 숫기 없고 어색할 뿐이었다. 나이가 들어선 이젠 너끈하게 웃어넘길 수 있는 여유는 생겼다. 그러나 나는 다시 한번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째서 이모는 자꾸 딸이 있으면 좋겠다고 한탄하는 것일까. 딸이란 존재가 엄마에게 정말 좋은 것일까? 이모는 그게 칭찬인 줄 아는 건가? 들으면 들을수록 알 수 있다. 그건 나에 대한 칭찬이 아니다. 그 말의 속뜻은 이거지. 엄마에게 '넌 딸에게 효도를 받을 수 있어서 참 좋겠다.'


    사회가 만연하게 딸에 대한 기대가 크다. 무심한 아들들이 이뤄주지 못할 '효'를 딸이 이뤄주는 게 당연한 이치인 것처럼. 세상 심청이가 공양미 삼백석으로 팔려가는 기분은 기꺼운 마음이 아니라 마을 사회의 '효'에 대한 압박 때문일지도 몰랐다. 제 몸을 바다에 던지는 건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자살이다. 그리고 그건 자살을 위장한 타살이다. 그 동화는 효를 강요하는 사회로부터 사회적 살해를 당하는 여자애를 그리고 있다.


    이모는 또 한탄한다. 자신의 결혼한 아들이 무심한 것과, 며느리는 딸과 달라서 아무리 잘해주고 싶어도 서로에게 부담된다는 게 요지이다. 예를 들어 이모는 아들의 집은 마음껏 드나들 수 없다는 것을 한탄한다. 자신이 뭘 하자는 게 아니고 반찬 가져다주고 청소하는 소일거리를 해주고 싶을 뿐이라며 (많은 며느리들이 이 대목에서 경악하겠지. 이해한다.) 억울해한다. 그리고 엄마에게 말한다. '넌 딸이 있으니까 나중에 딸이 결혼하면 비밀번호 딱딱 누르고 집에 들락날락거릴 수 있을 거 아니냐.' 그리고 한 술 더 떠서 조카인 나에게 말한다. '00 이가 결혼하면 이모가 그래도 되지? 이모 그런 거 해보는 게 소원이야' 하며 화룡점정을 찍는다.


    이모는 엄마와 나이 차이가 많은 편이라 세대차이가 많이 나는 건 어쩔 수 없다. 한국 많은 부모들이 그렇듯 이모는 아들의 영광이 자신의 영광이라 믿어 의심치 않으며 지금도 결혼한 아들들의 돈벌이나, 직업적인 면에 대해 많이 궁금해하고 자랑스러워한다. 그러나 동시에 드라마에서 회자되는 피곤한 시어머니는 되고 싶어 하지 않아 한다. 그는 자신의 모순에 얽매이면서 어쩔 수 없이 생각하게 되고 마는 것이다. 딸이 있었어야 했어. 자신의 한탄을 들어주고, 반찬을 해 다 주며, 쇼핑할 땐 팔짱을 끼고 자신 대신 운전해줄 딸 말이다.


  비단 이모뿐만이 아니다. 한국의 많은 부모들이 자식에게 기대를 하고 그런 결과를 얻어오면 기꺼이 기뻐해 한다. 자식의 학벌, 자식의 연봉, 자식이 만난 배우자와 그 배경, 자식의 그 무엇. 그 모든 것이 부모의 자랑이고 종교가 되어왔다. 그리고 거기서 아들과 딸자식에 대한 기대치는 달라진다. 아들은 학벌, 부모에게 주는 용돈 등이라면, 딸들에겐 좀 더 다른 차원의 기대를 한다. 매일 같은 안부전화, 정겹게 식탁에 앉아 오늘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주는 애교 있는 딸, 이웃집, 남편 흉을 보면 다 들어주는 딸, 설거지, 빨래, 요리 등을 맡겨도 되는 딸 들 말이다.


왜 유독 딸자식들에겐 이런 기대들이 추가적으로 부여되는 것일까? 처음엔 아마 달랐을 것이다. 아니, 딸자식에게 이런 기대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딸에겐 학벌, 연봉, 용돈 등을 아들처럼 기대하지 않았던 것이다. 자식들에 대한 기대치는 분명히 나누어져 있었다. 아들에겐 사회의 지휘, 명예,  경제적인 기대 같은 것들 그리고 참한 며느리 하나 들여 집안 살림을 보필해 주는 것을. 딸에겐 집안 살림과 밑천을 거들어 나중에 결혼할 좋은 배우자를 만나 떠나보내는 것들 같은 기대 말이다. 거기다 딸이 장녀면 제 동생들을 힘든 엄마 대신 키워주리란 학대적 믿음 같은 것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대적 흐름이 바뀌며 다자녀 구성을 이루는 가정에서 핵가족의 흐름으로 흐르면서 키우는 자식 성별 초이스는 협소해졌고, 집안의 경제, 부모의 노후는 딸 아들 할 것 없이 모두에게 부여되었다. 그러나 감정, 정서적 효도는 급격한 사회발전 속에 아직 덜 분배된 것이다.


또한 많은 이들이 딸이 효도를 더 잘한다는 근거를 '여자아이가 공감을 더 잘하기 때문'이라고 꼽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는 지나친 보편화와 그 보편화에 따른 차별로 이어진다. 공감능력은 성별에서 오는 것보단 주변 환경, 사회적 경험을 바탕으로 후천적으로 키워지는 것이다. 여러분의 기억 속에도 남성이지만 공감능력이 뛰어난 사람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여성이지만 냉철하며 이성이 앞선 사람이 있다. 선천적인 공감능력 또한 성별에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개성, 또 하나의 재능일 뿐이다. 그러나 이런 성별에 따른 공감능력 편견은 많은 사람들을 사회적 피로도에 몰리게 만든다. '넌 왜 딸이면서 애교가 없냐?' '넌 왜 아들이면서 눈물이 많아?'


아들에 대한 부모들의 '평균적인 효도'의 기대치가 낮은 것은 작은 효를 크게 느끼게 해주는 이점이 있다. 나쁜 남자 개념처럼 쭉 나쁘게 대하다 한번 잘해주면 그것이 크게 느껴지는 것처럼 못난 자식이 한번 효도를 행하는 것이 크게 느껴지는 경우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남성이 아니라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감수성, 부드러운 공감대 형성에 남자들은 쉽사리 제외된다. 남자는 울면 안 되고 진득이 할 일을 하고 참고 묵묵해야 하며 이성적으로 사고하고 냉철하게 계산하는 것이 이상적인 것으로 상징되어왔다. 생각해보라, 군대에서도, 사회에서도 그렇다. 많은 로맨스 소설에서, 드라마에서, 더 올라가 고전에서까지도 멋진 남자로 그려진 그 이는 (잘생김과 더불어) 침묵하는 입을 가졌다. 이는 좋은 징조가 아니다. 이는 반대로 수다스럽고 하고 싶은 말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이 침묵할 수밖에 없는 규율을 만든 것이다.


반대로 딸에 거는 효의 개념은 다르다. 여자애는 집안 식탁에서 이것저것 수다도 떨어야 하고 아빠의 딸바보 대상이 되어야 할 만큼 애교도 피울 줄 알아야 한다. 조금 더 자라면 엄마의 설거지, 세탁, 요리들을 차츰 도와줘야 하고 나이가 들 수록 그 분배도는 높진다. 집안에 아빠나 오빠, 남동생같이 남성밖에 없으면 집안에 엄마 대신 요리나 설거지도 대신해 줘야 한다. 이런 딸에 대한 기대치로 최근 우리나라에선 딸을 선호하는 것이 조사자료에서 뚜렷하게 나타난다. 근본적으로 이런 효도는 잘못되었다. 특히 어머니 쪽이 그 보상심리를 누리고 싶어 한다. 왜냐하면 혼자 하는 집안일은 너무 힘드니까. 이해한다. 집안일은 혼자 하는 것은 힘들다. 분명 가정에서 분담해서 진행되어야 한다. 이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 글에서 진행하도록 하고. 여하튼 집안일이 힘드니 어머니들은 자신의 입장을 가장 잘 이해해줄, 어쩌면 남편보다도 잘 이해해 줄 것 같은 딸에게 기대게 되는 것이다. 이는 성차별적 집안일에 따른 대대적 차별 물림이다.


      물론 딸들이 더욱더 부모님, 특히 어머니 쪽에 집안일적으로 도움을 주는 경우가 있다. 왜냐하면 딸들은 보고 자랐기 때문이다. 같은 성별의 여성 사람 부모가 집안에서 어떻게 힘들었는지를. 그들은 같은 성별로써 미래에 제가 겪게 될지도 모를 일들을 지금 겪는 사람을 보며 동정하고 안쓰러운 것과 비슷하다. 그리고 나이가 들 수록 생각하게 된다. '난 결혼하지 말아야지.' 딸에 대한 이런 많은 기대는 어머니들에겐 죄송하지만 딸에 대한 학대다. 자세히 말하자면 정서적인 학대다.  


      기본적으로 효도란 뜻은 뭘까? 한자적 의미를 되새겨 보았을 때 '부모를 섬기는 도리'라고들 한다. '도리'라는 것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는 의미라는 것을 보아도 우리는 효도라는 것을 마땅히 해야 되는 것이라 생각하며 이 치열한 한국 사회에서 우리를 키워낸 부모에게 빚을 진 느낌을 지우기 위해서라도 행해야 한다고 배운 내용이다. 많은 자식들이 부모의 기대에 부흥하기 위해 애를 쓰는 경우가 많다. 치열한 교육열은 부모의 기대에 부흥하려는 우리나라 학생들의 눈물겨운 전쟁터나 다름없다. 자식들은 부모의 기대를 성취시켜주는 것이 큰 효라고 배워왔으며 그렇게 믿어왔고, 부모는 자식이 배움에 성공해야 품위 있는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기반을 다질 수 있을 거라 믿어왔다. 한국의 높은 교육열 때문에 투자된 비용이 높은 만큼 부모들은 무의식으로도 투자된 비용이 기본은 회수되길 바랄 것이다. 그것이 이 경제 민주주의의 민낯이니까. 우리 사회는 효마저도 자본주의의 개념으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나이 차이 많은 동생인 나의 엄마가 지금 딸 노릇 비슷하게 되었다. 그 한탄을 들어주고, 반찬을 서로 번갈아 해 주고, 같이 쇼핑을 하며 돈독한 자매 연을 이어가는 것이다. 형제자매들 중 나이 많은 윗 손인 이모는 막내인 엄마를 말 그대로 '엄마'처럼 키운 노릇이니 어쩌면 '딸 효도' 엇비슷한 그 무엇을 받고 있는 건지 몰랐다.


     자식에게 사랑을 주는 부모가 받는 효도는 성별로 효의 종류가 가름 나는 것이 아니다. 당신은 당신 자식을 어떻게 키웠는지, 그것을 되돌려 받는 것이다. 그저, 당신은 그런 식으로 베풀고 공경하는 방식을 당신에게서 배운 사람을 마주 보고 있는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02 나는 할아버지를 용서하지 않았다.

매거진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