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의 유럽, 오래된 기억

코로나의 장기화를 핑계로 처음 시작하는 글

by Wasteyouth
코로나의 존재란 정말 (...)

어쩔 때 보면 귀차니즘이 생각보다 참 심한 것 같다. ‘여행에서 돌아오면 반드시 어딘가에 기록을 남겨야지, 좋은 것을 먹으면 짧게라도 기록해 둬야지, 오늘 일을 하면서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아직 부족해서 잘 몰랐던 부분을 일적으로 보완해 나가려면 어딘가라도 기록이 필수다’라고 생각 “만” 너무 잘한다. 기록의 필요성도 너무 잘 알고, 기록을 해야겠다는 생각도 있지만 실.천.에.옮.기.지.않.는.다. 그렇게 지난 한 4년간 미루고 미뤄왔던 글쓰기를 단.박.에. 시작하게 한 계기가 있는데, 바로 ‘코로나의 장기화’이다. 여행을 못 가니 돈이라도 많이 모을 것 같았는데, 결국에는 그 돈으로 아이패드를 사고, 어렸을 때 그렇게 미술학원 가기 싫어했는데 아이패드를 샀으니 드로잉(이라고 하기 너무나 허접한 수준)을 시작하려고 끄적이는 내 모습이 뭔가 낯설었는데, 이제는 미루고 미뤄왔던 기록까지도 시작을 해보려 한다. 하루빨리 코로나가 종식되기를 바라지만 종식이란 단어는 너무나 요원한 것 같고, 백신이라도 하루빨리 개발되기를 바라지만 백신 개발도 시일 내에 될 것 같지 않다. 하루빨리 전 세계적으로 더 이상 코로나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이 없기를, 그리고 여행도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되기를.



성급한 여행 결정, 그러나 ‘후회 없음’

살다 보면, 가벼운 선택이든 무거운 선택이든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라는 말을 실감하게 된다. 어떤 선택은 상당히 막중해서 삶의 방향을 바꾸기도 하니까, 결정이란 단순하기도 하지만 또한 무거운 것이다. 나는 가벼운 선택의 순간에는 ‘좋은 게 좋은 거지’ 하고 생각한다. 에너지 소모를 줄이고 싶기도 하고, 내가 이 선택을 해서 덜(혹은 더) 이득이 될 지라도 다른 누군가에게는 더(혹은 덜) 이득일 거라는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무거운 결정의 순간에서는? 다양한 척도가 있지만 그중 나에게 가장 중요한 척도는 바로 이거다. “어떤 선택을 해야 가장 아쉬움이 덜할까.” 물론 당시에는 최적이라 생각해서 내린 결정인데 돌아보면 형편없는 것도 있고, 당시의 생각은 너무 어리고 경험이 부족해서 지나고 난 뒤에는 아쉬움만 남는 결정도 있지만. 아 뭐 어쩌겠나? 내가 내린 결정인데. 책임도 오롯이 내 몫이지.


26살에 떠난 약 1년간의 유럽 여행. 지금 생각해보면 꽤나 성급하게 내린 결정이었는데 그 이후로 단 한순간도 후회한 적 없는 결정이다. 2016년 5월, 혼자서 약 1년간의 유럽 여행을 떠났다. 한 봄의 이태리를 반드시 두 눈으로 봐야겠다는 단순한 이유로, 그리고 교환학생 갈 생각을 전혀 못했던 20대 초반의 나의 모습에 대한 아쉬움을 더 이상은 남기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하루에 4시간 카운터 볼 테니 숙박만 제공해 줘’라는 내용의 이메일을 로마의 여러 호스텔에 다짜고짜 보낸 결과 로마의 한 호스텔에서 약 2개월 간 Volunteer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렇게 도착한 로마에 거점을 잡고 도시 골목골목을 돌아다니고, 남부 소도시, 시칠리아 섬, 구석구석 다녔다. 이후에는 피렌체로 거점을 옮겨서 에어비엔비로 렌트한 집에서 원 없이 늦잠도 자고, 스파게티 먹고 커피도 와인도 원 없이 마시고, 책도 읽고 공원에 누워서 멍하니 멍 때리기도 하고 생각도 하며 시간을 아낌없이 낭비했다. 이탈리아를 떠난 이후에는 스페인, 프랑스, 프라하, 독일,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 헝가리, 모로코, 벨라루스, 세고비아, 크로아티아.. 나라 개수로만 보면 많지는 않지만 그 나라의 구석구석을 열심히 돌아다녔다.


여행 당시 찍은 (아마도) 모나코. 딱 이 시기쯤이었다 7말 8초.


사람에 대한 기억

사실 여행 자체가 갖고 있는 분위기 덕분에 거의 모든 여행지의 풍경들은 제멋대로 아름답기 마련이다 (베트남 산지 풍경도 사실은 한국의 시골 풍경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그것 또한 너무 특별하게 느껴지는 것처럼). 물론 숨 막힐 듯한 풍경 하나만으로도 머릿속에 다른 도시들 다 제치고 원탑으로 자리하게 되는 곳들도 있다. 그렇지만 여행지의 기억을 좀 더 강렬하게 남기는 큰 요인은 사람, 바로 사람이다. 그곳에서 누구와 무엇을 먹고 마셨는지, 그곳에서 누구와 어떻게 시간을 채웠는지, 그 아름다운 장소에서 어떤 이야기를 나눴었는지. 시간이 흘러서 세세한 기억들은 모두 사라져 가도, 소중한 사람과 보냈던 그때 그곳의 공기, 분위기, 그리고 그때 느꼈던 느낌에 대한 기억은 이상하게도 생생하게 남는다. 웬만해선 혼자 여행을 떠나는 것을 선호하지만, 여행지에서까지 결코 혼자 다니지는 않는다. 홀로 떠난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과 ‘Though you choose to travel alone, you will never travel alone.’이라고 말하면서 깔깔 웃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렇다.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이 아름다우면, 그들과의 기억이 좋으면, 여행지에 대한 여운도 기억도 훨씬 더 짙게 남는다.


The Power of Hospitality

유럽 여행을 하면서 다양한 숙박 형태를 이용했었다. 웬만해선 호스텔로 자주 다녔고, 에어비엔비도 활용했고, 너무 분주한 호스텔의 일상에 지칠 때면 저렴한 호텔 방을 예약해서 혼자 고요히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카우치 서핑도 많이 이용했다. 좋은 기억만 있다고 하면 거짓말이지만 나쁜 일은 발생하지 않았고, 생각하면 운이 따라준 것이어서 감사한 마음뿐이다. 카우치서핑을 시작할 때 나조차도 많은 의문을 가졌던 것 같다. ‘왜 이런 자본주의 시대에 공짜로 이렇게 자기들 방 한 칸을 내줄까?’ 하는. 카우치 서핑을 하다 보면 실제로 로컬들이 즐기는 장소들에 가서 시간을 보내기도 하였는데, 그럴 때 어떤 호스트는 심지어 내게 밥을 사주기도 하고, 버스표를 사 주기도 하고, 자기 시간을 내서 같이 도시를 소개해 주기도 하고, 요리를 해 주기도 하고. 한 번은 호스트에게 물었다. ‘너는 왜 굳이 이렇게 공짜로 여행자들에게 시간을 내 주니? 너무 고마워서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모르겠어.’ 호스트가 대답했다. ‘나는 환대(hospitality)의 힘을 믿어. 너는 나에게 보답할 필요는 없어. 긴 여행이 끝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을 때, 지금의 너와 같은 배낭여행자를 만나면 그 여행자에게 베풀어 주렴. 그러면 그 여행자는 또 다른 사람에게 베풀어 주게 될 거야. 환대의 힘은 이렇게 반복되겠지.’



긴 여행은 끝났고, 흘러간 시간 덕분에 당시의 순간들은 기억에서 많이 희미해졌으며, 이후의 일상에서 당시에 가졌던 나름의 포부를 모두 실천하며 사는 것은 쉽지 않다. 그래도 그 기억들, 감정, 생각, 분위기는 여전히 내 어딘가에 쌓이고 쌓여서 지금의 나를 이루고 있음을 알고, 현재의 삶을 지탱하게 하는 너무나도 큰 힘이다. 김애란 씨의 소설 ‘바깥은 여름’을 읽다가 너무나도 크게 공감한 부분을 소개하며 첫 브런치 글을 마무리하고 싶다.



과거가 지나가고 사라지는 게 아니라 차오르고 새어 나오는 거란 생각이 들었다. 살면서 나를 지나간 사람, 내가 경험한 시간, 감내한 감정들이 지금 내 눈빛에 관여하고, 인상에 참여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표정의 양식으로, 분위기의 형태로 남아 내장 깊숙한 곳에서 공기처럼 배어 나왔다. / 김애란, 바깥은 여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