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연, 한 단어가 만든 착각과 배신
1부 What’s Added 감각을 조작하는 첨가물의 세계
2장. 냄새로 유혹하다 _후각이 지배하는 소비심리
(7) 바닐라’ 향’의 진실 ― ‘천연’ 소송에서 드러난 그림자
2024년, 미국의 아이스크림 브랜드 브라이어스(Breyers)는 집단소송 끝에 8.85백만 달러(약 1,200억 원)를 합의금으로 지불해야 했다. 쟁점은 라벨에 적힌 [Natural Vanilla] 문구에 있었다. 소비자는 이를 바닐라콩만을 사용한 ‘천연향’으로 인식했지만, 실제 제품의 향 대부분은 목재 펄프 등에서 합성한 바닐라였다.
미국 식품 규정상 ‘식물에서 유래한 화합물’은 천연향으로 분류할 수 있어, 기업은 문제없음을 주장했지만, 소비자의 상식은 달랐다. 결국 규정의 허용 범위와 소비자 기대 사이의 괴리가 법적 분쟁으로 비화한 것이다.
바닐라는 세계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향이다. 그러나 바닐라콩 생산량은 한정적이고, 가격은 금보다 비쌀 때도 있다. 이 공백을 채운 것이 ‘합성’ 바닐라다. 문제는 이 합성물질이 ‘천연’이라는 이름으로 라벨에 표기되며 유통될 때다. 소비자는 ‘자연 그대로’를 떠올리지만, 기업은 법적 허용 범위 안에서 마케팅을 활용한다. 결국 분쟁의 본질은 성분 자체보다도, ‘천연’이라는 단어가 주는 신뢰와 이미지에 있던 것이다.
바닐라 소송이 잇따르자, 미국 식품의약국(FDA)은 2024년 1939년부터 유지해 온 ‘정체성 표준(Standards of Identity)’ 52개를 한꺼번에 폐지한다고 발표했다.
정체성 표준이란 ‘특정 식품은 반드시 어떤 원료와 방식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규정한 일종의 법적 레시피다. 아이스크림은 유지방 몇 %, 치즈는 원유와 응고제만 써야 한다는 식이다. 80년 넘게 유지되어 온 규제지만 시대 변화에는 맞지 않았다.
대신 FDA는 ‘통상명(Common or Usual Name)’ 원칙을 새 기준으로 제시했다. 이는 제품 이름이 소비자에게 본질과 원재료를 정확히 알리도록 하는 규정이다. 예를 들어, 바닐라빈이 거의 없는 케이크는 이제 ‘Vanilla Cake’가 아니라 ‘Vanilla-flavored Cake’라고 써야 한다.
소비자 입장: 더 명확해졌다.
이제 라벨에 적힌 단어만 보아도 제품에 실제 바닐라콩이 들어갔는지, 아니면 합성향인지 알 수 있다. ‘천연’이라는 단어 뒤에 숨어 있던 모호함이 줄어들고, 선택권이 강화된 것이다.
기업 입장: 오히려 까다로워졌다.
과거에는 정해진 레시피만 지키면 합법이었지만, 이제는 단어 하나에도 소송 리스크가 생겼다. ‘Vanilla’냐, ‘Vanilla-flavored’냐, 그 미묘한 차이가 곧 법정 공방의 씨앗이 된다. 자유는 넓어졌지만, 소비자 인식과 심리까지 고려해야 하는 더 정교한 전략이 필요해진 것이다.
앞서 연재(8)에서 다룬 식용색소 적색 3호는 안전성 논란 끝에 퇴출되었다. 눈에 보이는 색은 소비자도, 규제 당국도 쉽게 다룰 수 있었다. 그러나 향은 눈에 보이지 않고, 소비자가 직접 검증하기 어렵다. 그만큼 규제는 느슨해지고, ‘천연’이라는 언어 뒤에 숨을 수 있었다.
이제야 FDA가 뒤늦게 손질을 시작했지만, 그 과정은 여전히 불완전하다. 색은 금지되었지만, 향은 여전히 법정 공방 속에서 회색지대에 머물러 있는 셈이다.
바닐라 소송과 FDA의 규제 개편은 우리에게 뚜렷한 질문을 던진다. ‘천연이란 무엇인가?’
소비자는 자연을 기대하지만, 법은 합성을 허용한다. 규제의 칼날은 색소에는 가혹했지만, 향에는 한참 늦게 닿았다.
첨가물에 있어서 후각 파트를 마무리하며 다시 묻고 싶다.
우리는 지금 정말 자연을 소비하고 있는가,
아니면 법이 허용한 합성을 ‘천연’이라는 단어에 포장해 받아들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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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Luci's Lab의 <食解, 가공식품을 알면 건강이 보인다> 시리즈의 일부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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